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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은 확실히 구원받으셨습니까? (합 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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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 습니다. "인자(人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라"(마 1:21). 사도 바울은 구원을 가리켜 "위대한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구원론을 체계적으로 공부해 볼 때 그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 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단계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뉠 수 있습니다.

첫째/구원의 예비 단계 여기에는 구원받기 전에 일어나는 세 가지 사건, 곧 은혜, 선택, 소명 (召命)이 포함됩니다. 우리의 구원은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에서 출발합니 다. 사실 구원의 단계 처음부터 끝까지가 전부 다 하나님의 은혜인 데, 그 은혜의 과정 속에 선택도 있고 소명도 있습니다. 선택 안에는 예지(豫知)와 예정(豫定)과 택정(선 택)이 포함됩니다. 소명의 단계, 곧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그분은 누구 든 다 오라고 하실 뿐만 아니라 그 부르심이 효력을 발하게도 하십니다.

둘째/구원의 시작 단계

우리가 구원받을 때에 일어나는 사건들입니다. 부르심의 음성을 듣고 난 다음에는 회개가 따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선택하고 불러 주셔서 우리가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하면서 믿게 되고, 믿고 나서 는 마음이 변하여 삶에도 변화가 일어납니다. 회심(回心)하면서 동시에 거 듭나는 것입니다.

셋째/구원의 지속 단계

구원받고 영화(榮華)로 이어지기까지의 단계입니다. 영적으로 태어난 (거듭난) 사람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게 되어 그분과 영원히 하나가 됩니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양자 로 삼아 주십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변화시켜 주시는데, 그것 이 곧 성화(聖化)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를 변화시킬 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보호해 주고 영원히 보존하다가 마침내는 영화 롭게 만들어 주십니다. 여기에서 거듭남(重生)과 의롭게 됨과 그리스도 와 하나 됨과 양자 됨은 단회적(單回的) 사건인 반면, 성화와 영원한 보존 과 영화의 상태는 계속적 과정입니다.

시편 84편 11절에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라는 말씀이 있 습니다. 구원의 출발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구원의 종착역은 영화(榮華)입 니다. 그래서 시편 84편 11절만 봐도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준다"고 했습니다. 은혜로 출발해서 영화에 이르는 것입니다. 죄로 타락하고 멸망 할 우리를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 변화시켜서 마지막에 영화롭게까지 하 십니다. 그러므로 구원론을 요약해서 말하면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도다"입니다. 어떻게 은혜로 시작해서 영화까지 가는가를 공부해 나 가는 것이 구원론입니다.

번호:123/214 등록일시:95/04/08 11:05 길이:240줄 제 목:김동호목사(동안) / 고지를 점령하라

김 동호 목사(동안교회) 2000년대를 향한 성경적 지도자상  섬기는 사람이 되려면  고지를 점령하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 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 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 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 님이 가라사대 내가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食物)이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 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 1:26-3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저희 것임이 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義)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자는 襟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 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팝박 하였느니라"(마 5:1-12).

우리에게는 부끄럽게도 나라를 빼앗겼던 경험이 있습니다. 나라를 빼앗기면 비참한 일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비참한 것은 모국어를 빼앗기는 일 입니다. 일제 시대 때 우리 나라 학생들은 국어 시간에 일본 말을 배웠습니 다. 일본 말이 곧 국어였고 한국 말은 조선어라고 해서 따로 구분했습니다 . 한국 말을 하면 매를 맞거나 변소 청소를 해야만 했습니다. 나중에는 성(姓)도 다 빼앗기고 일본 성을 붙여야만 했습니다.

똑같은 일이 이 사회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사는 신앙인입니다. 피 말을 하면 매 맞고 혼이 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성(姓)을 빼앗깁니다.

서울에 안동교회라는 교회가 있는데 100년 가까이 된 오랜 교회입니다. 그 교회에서 발행되는 교회지를 읽다가 참 가슴 아픈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집사님 한 분이 교통 경찰인데 교통 경찰로서의 일을 신앙적으로 하려고 무 진 애를 썼습니다. 특별히 뇌물을 결코 받지 않겠다고 결단하고 그렇게 살 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동료로부터 따돌림을 받았습니다. "너만 깨끗하냐" 하는 식이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인데 그 사회에서 따돌 림을 받는다는 것은 죽음과도 같은 일입니다. 상관들에게 무능한 공무원으 로 낙인 찍혀 승진이 안 되었습니다. 불의한 재물로 상납하지 못했기 때 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사회에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그는 스스로 사 표를 내고 나왔습니다. 그것만 해도 마음이 아픈데 그는 6개월 동안 신경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단적인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이 세상에서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의 말씀을 빼앗겼습니다. 정직하고 성실한 것은 무능한 일로, 사랑하는 것은 바보스러운 일로 여겨지고 도리어 악인의 꾀와 세상의 요령을 좇아 살아야 만 제대로 살 수 있는 사회가 됐습니다. 나라를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겨, 예수를 믿으면 믿을수록 더욱 곤란해지고 하나 님의 말을 하면 할수록 더욱 매를 맞는 세상을 만들어 놓고 사람들에게 예 수 믿으라고 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요 믿음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기고 말을 빼앗겼는데도, 무엇을 먹고 입고 마실까만을 고민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수준 낮은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먹어야 할 줄도, 입어야 할 줄도, 마셔야 할 줄도 아십니 다.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義)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 지금 우리에게 매우 시급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여 하 나님의 말이 세상에서 통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소명입 니다.

미국 고등학교 1학년 남학생의 70% 이상이 이미 성관계를 갖고 있고, 그 중의 사분의 삼 이상이 네 명 이상의 상대와 관계를 갖고 있다고 들었습 니다. 제가 한국 목사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일 입니다다. 문화는 그런 특성을 가 지고 있습니다. 그런 것처럼 미국이라는 사회의 문화에서는 순결을 지키기가 불가능합니 다. 왜냐하면 문화 자체가 혼전 성관계를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이고 누구 도 그것을 비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화가 그러면 순결을 지키고 깨끗하 다는 것은 별 의미도 없고 깨끗함을 지킬 수도 없게 됩니다.

`어떤 문화가 이 땅에 정착하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수 그리 스도의 문화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는 일이 우리에게는 가장 중 요한 일입니다. 지금 이 세상은 위험 수위를 넘어섰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는 일이 우리의 절대적 소명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와 예 수 그리스도의 문화를 이 땅에 정착하고 건설하기 위해 공부하고 애쓰는 사 람들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데 헌신하려는 사람들이 생각해야 할 것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1) 고지(高地)를 점령하라 흐르지 않는 물은 썩습니다. 그런데 흐르지 않는데도 썩지 않는 물이 있 습니다. 그것은 바닷물인데 바다가 썩지 않는 까닭은 소금이 있기 때문입니 다. 큰 바다를 썩지 않게 하는 소금 양은 전체 바닷물의

2.8%입니다. "너희 는 세상의 소금이라"(마 5:13)는 말씀은 세상에 그리스도인들이

2.8%만 있 어도 세상을 썩지않게 할 수 있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 인구 의 25%가 그리스도인입니다. 또 서울 강남 인구의 45%가 그리스도인입니 다. 이것은 교회가 밝힌 통계가 아니라 1987년 대통령 선거 때 어느 정당이 조사해서 분석한 결과입니다. 지금은 더 늘었을 것입니다.

한국이라는 바다에는 25%의 소금이 있고, 강남이라는 바다에는 45%의 소금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국산소금은 참 이상합니다. 소금이 많은 곳일 수록 더 잘 썩습니다. 강남 지역이 한국에서 가장 향락적이고 세속적이고 퇴폐적인 곳이 아닙니까 소금이

2.8%만 있으면 바다가 도저히 썩을 수 없 다는데 교인이 전국민의 25%나 되는 이 세상과 문화의 형편이 지금 과연 어떻습니까 우리는 예수를 너무나 엉터리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저 입 으로만 "주여 주여" 하고 정말 그리스도인다운 모습과 실력은 못 갖추고 있 습니다. 그러나 절망할 것은 없습니다. 숫자 많은 것은 절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미숙하다가 성숙하지 갑자기 성숙하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 미숙한 상태에 있다는 것은 인정하되 낙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많은데도 이 땅의 문화가 기독교적이지 못 하고 향락적이고 퇴폐적인 까닭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군사 전략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인데 지상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기본적인 전략은 고지(高 地)를 점령하는 것입니다. 고지에 있는 사람과 저 아래 있는 사람이 싸우면 아래에 있는 사람이 작전상 3-5배 불리하다고 합니다. 고지를 점령하지 못 하고 밑바닥에서 기면 70%를 차지해야 승산이 있지만 고지를 점령하면 100 명이 500명을 상대할 수 있기 때문에 기를 쓰고 고지를 점령한다고 합니다. 사실 모든 전투는 고지를 중심으로 일어났고, 모든 전투의 이름은 곧 고지 이름이었습니다.

25%의 그리스도인들이 있으면서도 이 한국이라고 하는 사회에 예수 그 리스도의 문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지 못하는 중요한 까닭은 우리가 밑 바닥에서 기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지를 점령하면 25%로도 벌써 승산이 보이는데 밑바닥에서 기기 시작하면 전국민의 70%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 에는 이 나라의 문화를 기독교적으로 바꾸지 못합니다.

정계(政界)와 재계(財界)를 쥐고 흔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나마 예수 믿는 사람 많다는 국회도 정치 철학은 기독교적이지 않고 세속적입니다. 한국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고지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 게 점령당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 대통령 된다는 것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예수 잘 믿는 사람이 대통령 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을 내세워 표 긁어 모 으는 정치꾼 말고, 정말 소명을 가지고 "하나님, 나를 대통령 삼으신 뜻이 무엇입니까"라면서 나라를 위하여 방문 걸어 잠그고 기도하고 성경에서 정치 철학을 찾아내고 신앙이 곧 그의 정치 신념이 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이 나라가 복을 받습니다. 또 우리 나라 경제계를 예수 잘 믿는 사람 이 정복하면 이 나라 경제가 복받습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고지를 점령하라는 것이 세상적 출세라 하 며 비성경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낮아지라고 늘 가르 치셨습니다. 스스로 높이는 자는 낮아진다며 자기를 낮추는 자가 되라고 끊 임없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고지를 점령하라, 재벌이 되라, 대통령이 되 라, 높아져야 한다는 얘기를 비성경적인 것으로 오해하기 쉬운데 사실은 그 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낮아지라고 하신 것은 실력입니까, 자세입니까 자 세입니다. 고지를 점령하는 것은 실력입니까, 자세입니까 이것은 실력입니 다. 예수님이 낮아지라고 하신 말씀 속에는 하나의 전제가 숨어 있습니다. 낮아질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높은 사람이 낮아지지 낮은 사람 은 낮출 것도 없습니다. 낮아지라고 하는 말씀 속에는 높아지라고 하는 무 서운 전제가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키가 아주 작은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강대상에 서면 교인들에게 목만 보여서 단을 높혔습니다. 그래서 설교하는 데 지장이 없게 되었는데도 이 분은 설교하다가 흥분하면 발을 들었습니다. 발을 드는 것은 키를 높이기 위한 것이고, 키를 높이는 것은 자기 키가 작다는 것을 인식한다는 뜻입니 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을 알 수 있는데, 모든 교만의 뿌리는 열등감입니 다. 열등감과 교만은 달라 보이나 실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서로 높아지려고 다툴 때 자신이 이 땅에 온 것 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온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0:28).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높아지려는 것을 비판하신 것이 아니라 높아지려 하는 "의도"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자 하셨습니다. 우리가 높 아지려고 하는 것은 섬기기 위함입니까, 섬김을 받기 위함입니까 우리는 섬김을 받으려고 높아지는데 예수님은 섬기기 위해 높아 지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낮은 자가 높은 자를 섬깁니다. 약자의 섬김을 받으려는 인간의 본능은 사실 짐승의 원리입니다. 약육강식(弱肉强食)하는 짐승의 본능은 약자가 강자를 섬기고 강자가 약자의 고기를 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법은 강자가 약자를 섬기는 것입 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약점을 마땅히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 말씀입니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녀에게 공부하라는 소리를 많이 합니다. 이것은 공부하여 좋은 대학 가서 출세하고 높아지라는 것입니다. "왜 높아져야 합니까"라고 물으면 부모들은 똑같이 대답합니다. "그래야 네가 남 부리고 살지. 너 남 섬기고 살테냐" 이것은 비기독교적인 원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이들에게 이 렇게 가르쳐야 합니다. "공부 잘해야 돼. 그래서 높아져야 한다. 그래야 많은 사람을 섬길 수 있단다." 이것이 기독교와 세상의 다른 점입니다.

예수님은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그런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主)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 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 중요한 가르침이 이 말씀 가운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더러 제자가 되 라는 뜻으로 이 말씀을 하셨습니까 아니면 선생이 되라는 뜻으로 이 말 씀을 하셨습니까 여기에서는 선생이 주제입니다. 제자가 선생의 발을 씻 기는 게 아니라 선생이 되어 제자의 발을 씻기라는 것입니다. 또 마태복음 28장에도 보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가르쳐 지키게 하라"(19,20절)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을 제 자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높아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세 상을 축복하고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교회에서 고등부 설교를 몇 년 했는데, 고 3(高三) 학생 하나가 하루는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목사님, 공부가 인생의 전 부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너무 당연한 것을 물어서 아니라고 했더니 자기도 싱거운지 머뭇거리다가 가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붙들고 "너, 하나만 물어 보자. 너 공부 못 하지"라고 물었습니다. 그렇다고 하길래 " 공부 잘하는 사람치고 그런 것 물어 보는 사람 한 명도 못 봤다. 너, 하나 만 더 물어 보자. 네가 공부를 못 하는 것은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 라는 신념 때문이냐, 아니면 핑계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학생은 머리를 긁적이며 핑계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이런 말을 하고 학 생을 돌려보냈습니다. "가서 공부 열심히 해. 공부 잘하고 나서 나에게 물어 봐라. 내가 아니 라고 그럴께. 넌 그거 물어 볼 자격이 없어. 그리고 밥이나 먹자고 공부하 면 너 공부 안 해도 된다. 많은 사람들이, 공부해서 남 부리라고 가르쳐 주지만 우리 기독교는 그게 아니다. 많은 사람들을 섬겨야 하기 때문에 공부를 하는 거다. 너 남많이 돕고 섬기고 싶으면 공부 열심히 해라."

새벽 기도회에 참석하려고 차를 운전하고 가다 보면 새벽에 차도 사람 도 거의 없으니까 차들이 신호등을 완전히 무시하고 마구 달리는 것을 자 주 목격하게 됩니다. 저는 하여간 교통 규칙을 따르려고 파란 불이 면 가고 빨간 불이면 아무도 안 지나가는 횡단 보도에서도 섭니다. 그 런데 그렇게 서 있으면 뒷차에서 경적 소리가 크게 울리고 전조등이 켜지 고 난리입니다. 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계속 버티고 있으면 뒷 차는 지쳐서 옆으로 비켜 갑니다. 그러면서 그 차 운전자는 꼭 저를 힐끗 쳐다 보고 갑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주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차선이 둘인데 빨 간 불이 켜지자 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운전하는 차가 제 옆에 와서 섰습니다. 이차선에서 맨 앞에 선 차 둘이 움직이질 않으니까 뒷차들 이 꼼짝도 못 했습니다. 저는 그때 선두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교통 신호 지키는 사람이 길 막아 놓고 앞장서면 뒷차들도 별수없이 신호를 지 키게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밤낮 뒤쫓아가니까 세상이 이 모양인 것입니다. 예 수 믿는 사람이 고지를 점령해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신속하고도 확 실하게 임하게 됩니다. 우리는 돈 몇 푼 벌자고 공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생하는 목적을, 이 나라의 고지를 점령해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와 문화를 건설하는 데 두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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