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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렇게 믿음을 계승하라 (딛 01: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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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지도자들에게 맡겨진 가장 커다란 책임은 설교를 잘하는 것도 행정 업무를 제대로 처리하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설교를 잘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사역임에 틀림이 없으며 교회를 잘 다스리는 행정적인 기능도 대단 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교회의 순결을 지키는 일을 가장 크게 책임 져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교회가 부패하고 거짓된 진리로 오염되기 시작할 때 두 가지 중대한 결과 가 초래됩니다.

 첫째, 교회에 속한 사람들의 영혼을 병들게 하여 마침내는 그 영혼들을 죽 음의 자리로 몰고 가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교회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죄악이요 또한 최대의 비극인 것입니다.

 둘째, 교회를 교회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떠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세상을 향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어 더 이상 빛으로 소금으로 생명 력 있게 존재할 수 없게 됩니다. 결국 세상의 조롱거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 다.

 독일의 철학자 니이체가 당시의 교회를 바라보면서 신(神)은 죽었다고 말한 것은 사실상 하나님이 실제로 죽었다는 선언이기보다는, 그의 눈에 비 친 그 당시의 교회나 교인들이 더 이상 세상에 영향력을 나타내지 못하고 죽어 있던 것을 가리킨 말이었을 것입니다. 이 비판적인 지성이 보기에는 그런 죽은 자들이 믿고 있는 신, 그와 같은 교회가 대표하고 섬기고 있는 신은 이미 죽어 버린 신으로밖에는 여겨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 서 신은 죽었다는 니이체의 선언은 어쩌면 정당할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의 순결은 곧 교회의 생명과 직결됩니다. 본문에서 바 울 사도는 교회의 순결에 대해 두 가지로 접근합니다. 즉, 적극적으로는 바 른 교훈을 확신하고, 소극적으로는 잘못된 교훈, 거짓된 교훈을 거절하라고 권면합니다.

 바른 교훈에 대한 확신

올바른 교훈에 대한 확신이야말로 교회의 순결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요소입니다. 잠시 1장 9절을 보십시오.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 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미쁜 말씀이란 믿을 만한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바른 교훈이 라는 단어는 건강한 교훈, 즉 병들지 않은 교훈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 습니다. 교회의 순결은 우선 그 교회가 건전한 교훈을 견지하고 있는지 그 리고 그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이 건전한 교훈을 선포하고 있는지에 달려 있 습니다. 건강한 교훈만이 건강한 교인을 양성하여 결국 건강한 교회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건강한 교훈이란 어떤 교훈을 뜻할까요 즉, 우리가 정말 신뢰할 만한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바울 사도는 디도서 내에서는 건강한 교훈이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하지 않 았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 편지를 받는 디도가 건강한 교리가 무엇인지 이미 확실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다시 설명해야 할 필요를 바울이 느끼지 않았으 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둘째, 디도서와 같은 부류에 속할 수 있는 소위 목회서신서인 디모데전후 서에서 이미 바른 교훈이 무엇인가를 설명해 놓았기 때문에 여기에서 거듭 그것을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목회서신이란 바울이 영적인 후계자와도 같았던 디모데와 디도에게 앞으로 교회를 어떻게 섬기고 목회할 것인가를 가르치고자 하는 의도에서 기록한 서신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 3절 이하를 보십시오.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 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3절).

바울은 다른 교훈, 즉 거짓된 교훈, 진리가 아닌 교훈을 경계할 것을 우선 권면한 후에, 바른 교훈이란 무엇인가를 알려 주기 위해서 다른 교훈 과 바른 교훈을 1장 10절과 11절에서 각각 대조적으로 제시했습니다.

음행하는 자며 남색(男色)하는 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며 거 짓말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를 위함이니(10절)

이 교훈(바른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음이니라(11절).

 바른 교훈의 기초는 바로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십자 가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사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우 리들의 의로움과 죄 사함과 새로운 생명의 기초가 되셨다는 십자가의 복음 입니다. 이 복음이야말로 바른 교훈의 가장 중요한 기초입니다. 한 교회의 순결의 척도는 그 교회가 이러한 건전한 교리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 다.

 흔히 신학자들은 바른 교훈을 정통 교리(orthodoxy)라고 말합니다.

orthodoxy라는 단어가 상당히 변질되어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이 말의 본래 뜻은 바른 교훈입니다.

 어떤 사람이 주장하고 선포하고 가르치는 교리가 얼마나 건전한가에 대한 테스트는 세 가지 측면에서 가능합니다.

 첫째/계시성

우리는 계시라고 하면 꿈에 보았다, 무슨 소리가 들렸다는 식으로 하 나의 계시가 이루어지는 방법의 측면에서 계시를 강조하기가 쉽습니다. 그 러나 그것은 계시의 핵심이 아닙니다. 계시의 핵심은 그것이 한 개인의 의 견이나 철학, 생각이 아니라 참으로 진리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고상하고 아무리 좋은 철학이나 생각 같아 보여도 그것이 사람의 주장에 불과한 것이라면 진리일 수가 없습니다.

 즉, 계시성이란 과연 그 진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했는가를 살펴보는 것 입니다.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 1장 11절 이하를 보십시오. 이 부분에서 바 울 사도는 그가 가르치고 있는 복음이 사람에게서 난 복음이 아니라는 사실 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 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 이라(11,12절).

 여기에서 바울 사도가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복음이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내 주장이 아니다. 내가 학문을 통해서 학습한 것도 아니다. 오직, 진리 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그렇기에 이것은 진리이다.

이렇게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시성이야말로 바울이 복음을 진리라고 주장하게 된 가장 중요한 근거입니다. 우리도 바른 교훈인지 살필 때 언제 나 계시적 성격이 있는가를 첫번째로 생각해야 합니다.

 둘째/전통성(역사성) 계시라는 말도 오용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바울이 복음에 대해서 내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했지만(갈 1:11,12) 이단자들도 자기가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렇 기 때문에 계시성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래서 그 다음으로 따져 보아야 할 것이 바로 전통성(역사성)입니다.

 복음적 그리스도인들의 중요한 고백 가운데 하나는,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계시는 완성되어 있습니다. 즉, 창조에서 종말에 이르기까지 구원을 비롯하여 역사 속에 펼쳐지는 하나님의 뜻이 성경 안에 우리가 알기에 충분하게 계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닫혀 진 계시의 책이라고 부릅니다. 이제 더 이상 기록할 계시가 없다는 뜻에 서 말입니다.

 성경에 부족함이 있다면 계시가 보충되어야 하며 지금도 계시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게 됩니다. 그러나 창조에서부터 역사의 완성에 이르기까지의 모 든 교훈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며, 우리가 구원을 받아 승리의 삶을 살며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도록 할 말씀을 하나님께서 성경 한 권에 충분히 계 시하셨습니다. 이것을 계시의 충족성이라고 합니다.

 더 이상의 계시가 필요없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 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미 계시하신 말씀을 더 깊이, 더 확실하게 이해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깨닫는 일은 계시라 하지 않고 조명이라고 합니다. 말씀이 비춰짐으로써 그 말씀을 알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부 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미 계시하신 성경 말씀을 사람들에게 이해시킬 때 어떤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한꺼번에 다 알게 하시지 않고 점진적으로 이 해할 수 있도록 섭리하십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오늘 깨닫는 진리는 과거에 이미 주어진 계시와 절대로 충돌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 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이것이 계시의 역사성입니다.

물론 우리의 선배들이 잘못 이해한 부분들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그러한 부분들은 성경의 근본적인 진리와 어긋난 왜곡된 주장들일 것입니다.

 예수님도 말씀을 가르치실 때 새로운 진리를 계시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더욱 확실하게 하신 것입니다. 주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 전케 하려 함이로라(마 5:17)고 선언하셨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종교개혁을 일으킨 루터나 칼빈 같은 사람들도 자신의 주 장을 새로운 진리라고 떠들어 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루터나 칼빈의 생 각은, 본래 계시된 말씀을 재발견하여 천명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진 정한 의미에서의 진리의 복귀요 회복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성(전통 성)입니다.

 새로운 진리를 계시하는 무리들이 있다면 이단인지 일단 조심할 필요가 있 습니다. 그들에게는 이미 제시된 진리를 붙들었던 선배들의 역사적인 전통 성이 없습니다.

 셋째/윤리성 바른 교리는 바른 삶을 낳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전제입니다. 그리고 바르 지 못한 교리는 바르지 못한 삶으로 직결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마 7:16).

열매는 곧 삶입니다. 한 사람의 삶에는 그 사람의 진리의 기초가 어디에 있 는지가 나타납니다. 오늘 우리는 바른 교리와 함께 바른 생활을 강조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른 생활은 바른 교리의 토대 위에서만 비로 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3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다른 교훈에 대해 반대하며 바울은 두 가지 사실을 강조합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말씀이며 둘째는 경건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란 우리가 믿어 야 할 교리의 핵심을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말씀만 강조한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경건을 강조했습니다. 경건은 교리에 기초한 삶의 한 부분입니 다. 올바른 교리는 반드시 올바른 삶을 가져옵니다. 삶과 교리는 결코 분리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과연 내가 믿어야 할, 내 운명을 걸어야 할 바른 교리는 무엇인가 그것을 나는 정말 확신하고 있는가 바른 교리에 대한 확신이야말로 교회의 순결의 기초입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흔들리며 세상을 향해서 아무런 영향을 끼치 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쩌면 그것은 교회를 출입하는 그 많은 사 람들이 내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곧 바른 교리에 대한 확신의 결핍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믿는지도 모 르는 사람들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거짓된 교훈(유대주의)의 특성

우리는 바른 교훈을 확신해야 하는 한편 거짓된 교훈은 경계하고 거절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바울 사도가 다루고 있는 거짓된 교훈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여 기에서는 특별히 율법주의로서의 유대주의를 다루고 있습니다.

  유대주의의 교리적 특성

첫째/할례 강조

복종치 아니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특별히 할례당 가운데 심하니(10절).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을 할례당이라고 불렀습니다. 할례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구원의 조건으로서 할례를 강조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의미해지고 맙니다.

우리는 다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우리를 위 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구원 의 유일한 기초입니다. 그런데 할례를 강조하면 어떻게 됩니까 할례를 안 받고 너희들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다고 말할 수가 있느냐 이런 식으로 나오면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 됩니다. 할례는 필요한 것일지는 모르지만 본질적인 것은 아닙니다.

 이단, 혹은 그릇된 교훈의 특성은 언제나 비본질적인 것을 본질적인 것과 바꾸어 놓는다는 데 있습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 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시선을 옮겨 비본질적인 것에 치중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진리를 떠나게 됩니다.

 둘째/음식에 대한 규례

본문에는 이에 대한 바울의 비판이 노골적으로 나타나 있지는 않습니다.

할례에 관한 것 이외에 율법주의자들이 강조했던 것 중에 하나는 구약 시대 처럼 먹지 말아야 할 음식과 먹어야 할 음식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 다. 그들은 이것을 건강의 차원을 넘어서서 교리 차원에서 주장했습니다.

음식에 대한 규례를 구원의 조건처럼 강조하여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백성 의 표시인 것처럼 여기기 시작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충족 성을 부인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본문 15절을 보십시오.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 이 더러운지라.

 그 당시 율법주의적 성격을 지닌 유대주의자들, 즉 이단적 성향을 지닌 유 대주의자들은 우리는 내적인 경건보다도 할례를 받고 또 어떤 음식을 먹 고 안 먹는 것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나타낸다라고 생각하고 자기들처럼 행하지 않는 사람들을 구원 못 받은 사람으로 정죄했습니다.

할례도 받지 못한 백성들 같으니라구, 저런 더러운 음식을 먹는 것을 보 면 저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것이 틀림없다.

이렇게 되면 어떤 음식을 먹고 안 먹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이냐 아니냐를 구별하는 표준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음식을 가려서 먹는 일은 좋 은 일입니다. 또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로 본질적인 일은 아 닙니다.

  유대주의자의 윤리적 특성

첫째/불복종 복종치 아니하고(10절).

 이 말은 고질적으로, 습관적으로 권위에 대해 반항한다는 것을 의미합니 다. 요즘에도, 무엇이든 일단 걸고 넘어지고 반항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즉 반항이 체질화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사고 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흔히, 교회를 파괴하는 이단의 경우 에 이런 경향이 강합니다. 반항이 체질화되는 것처럼 위험한 것은 없습니 다.

 둘째/헛된 말을 함

헛되다는 말에는 무의미하다는 뜻도 있습니다만 여기에서 헛되다는 것은, 우리 삶에 어떠한 영향도 끼칠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그 당시 유대주의자 들은, 우리 삶에 진정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과는 거리가 먼 헛된 말 을 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그것이 재미가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재미는 재미에서 끝나는 것입니 다. 헛된 말은 우리 삶에 거룩한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셋째/속임수

속임수는 우리를 진리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속임수는 결국 거짓된 인격에 서 비롯한 것입니다. 속임수는 진리의 반대입니다.

 넷째/더러운 이(利)를 취함

유대주의자들의 말과 행동의 근본적인 동기가 돈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오 늘날의 많은 부도덕한 이단들의 정체를 살펴보면, 그 밑바닥에 돈 문제가 게재된 것이 드러납니다. 그들의 동기는 결국 돈에 있었던 것입니다.

 다섯째/가정 파괴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러치는도다"(11)

오늘날도 각종 이단들 때문에 가정이 파괴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 말장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장이라(12절).

 그레데 출신 사람 가운데에는 바울 사도를 향해서 여러 가지 공격을 하면 서 거짓된 사상으로 교회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고 나가려는 사람들이 있 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만약 그들을 공격할 때 당신들 그레데 사람들은 거짓말장이입니다라고 말하면 그레데 사람 전부를 공격하는 발 언이 되어 스스로를 궁지에 몰리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바 울은 그레데 사람이 한 말을 인용했습니다.

너희들 중에서 어떤 선지자가(어떤 시인이) 말하되... .

 역사적으로 추적해 보면, B.C. 600년대에 에피메니데스라는 시인이 실존했 다고 합니다. 바울은 지금 그가 한 이야기를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들의 시인이 말하기를 그레데인들은 거짓말장이라고 했는데 그 말이 옳습니다. 당신들 중에 정말 거짓말장이가 있습니다. 지금 진리가 아닌 거 짓말을 가지고 교회를 흔들리게 하는 자들이야말로 정말 거짓말장이입니다.

 그레데의 역사를 살펴보면 사실 이 섬은 범죄자들을 유배시켰던 장소였다 고 합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이곳에는 굉장히 부도덕한 사람들이 많이 살 았다고 합니다. 특히 거짓말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레데』라는 말 도 본래 헬라어 『크레티조』에서 나왔는데 이 말의 뜻은 거짓말하다입 니다.

정말 당신들은 그레데 사람답습니다. 당신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들의 치욕스런 문화를 극복하지 못하고 그 거짓된 문화 속에서 거짓으로 진리를 오도하고 있었던 사람들을 신랄하게 공격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그레데 교회가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를 제시합니다.

 거짓된 교훈에 대한 대응

본문 11,13절에 나타난 두 가지 동사를 특별히 주목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저희의 입을 막으라(11절).

엄히 꾸짖으라(13절).

이 두 동사가 바울이 그레데 교인들을 향해서 말하고 싶어했던 메시지의 결 론입니다.

 첫째/입을 막으라

거짓된 교훈을 가지고 교회에 악영향을 끼치던 사람들의 입을 막으라는 것 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입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결국 이 말의 뜻은, 그러 한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펼 수 있는 자리를 제공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 니다. 가르치게 되면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교리를 가지지 않는 사람들이 설 자리가 없어야 합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적어도 이 문제에 관해서만은 타협이 없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즉, 우리의 구원을 좌우할 수 있는 결정적인 부분에 관해서는 타협이 없어야 합니다.

어떤 교회는, 사회적으로 상당한 교육을 받았다거나 학위를 가졌다는 이유 하나로 성경 가르치는 자리를 넘겨 줍니다. 이것은 굉장히 위험한 처사입니 다. 그 사람이 무엇을 믿고 있으며 그가 가르치는 것은 성경에 근거하고 있 는가를 깊이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사회적인 배경 때문에 가르치는 자리를 내어준다면 그 교회는 어떤 방향으로 가겠습니까 또 적극적으로는 진리를 가르침으로써 그 교회가 정말 진리를 강조한다면 거짓된 교훈을 말하는 자들의 입을 자연히 막게 될 것입니다.

 둘째/엄히 꾸짖으라

엄히 꾸짖어야 할 대상과 입을 막아야 할 대상은 다릅니다. 13절을 보십시 오.

이 증거가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이는 저희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고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 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좇지 않게 하려 함이라.

교회가 엄히 꾸짖어야 할 대상은, 거짓된 교훈을 가르치는 자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있던 그레데 교인들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교리의 순결을 지 키기 위해 그레데 교회가 감당해야 할 책임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엄격하다는 말은 원어에서는 칼로 베이듯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예리하게 꾸짖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성경학자들은, 만약 한 교인이 잘못된 교리의 영향을 받아 잘못된 영향력을 교회 안에 계속 확산시키고 그런 다음에도 자신의 잘못을 반성할 기미가 전 혀 없어 회복할 가능성이 없다면 그를 문자 그대로 짤라 버릴 준비까지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교회의 순결은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상실할 때 교회는 모든 것을 상실합니다. 다른 모든 부분에 관해서 우리는 사랑과 용납을 가지고 교회를 치료하되, 그러나 교회의 생명인 건강 한 교리에 관한 한 타협하지 말고 진리를 고수해야 합니다. 이러한 결단이 야말로 이 시대의 빛이 되기 위해 교회가 서야 할 자리요 주께로부터 받은 엄숙한 소명임을 바울 사도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 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울이 마치 몸 전체의 건강을 위해서 내 몸의 병 든 한 부분을 잘라 버리듯이 그러한 자세로 교회의 순결을 지키려 했음을 알게 됩니다. 교회의 순결은 그만큼 소중한 것입니다.

 교회의 생명은 올바른 진리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무엇을 믿어야 할 것인가 를 성경을 통해서 발견하여 그 진리를 확신하고 붙들고 전하고 자기 삶에 적용시킬 줄 아는 사람들을 통해서, 또 그런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은 세상 을 변화시키십니다.

아버지여, 우리 교회가 정말 순결한 교회로서 진리를 전하고 또 이 진리 를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우리를 지켜 주시옵소 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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