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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 (2) (계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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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하시는 모습 자녀들을 책망할 일이 있을 때 칭찬을 먼저 하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책망을 먼저 하는 것이 좋습니까? 얼마 전에 제 둘째 아 들이 성적표를 가져왔는데, 절반은 A이고 절반은 B였습니다. 제 가 그때 이것도 성적이라고 받아 왔니? B가 왜 이렇게 많아? 라고 하면서 무조건 책망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들 녀석이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그런데 제 아들이 성적표를 가져와서 하는 첫마디가 『아빠, 나 C 하나도 없어요』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야, 너 정말 점점 잘하는구나. 아빠는 정말로 네 가 자랑스럽단다라고 말하면서 한참을 끌어안고 칭찬을 해 주었습 니다. 그런 다음에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해 주마. 식당에 함께 가자꾸 나. 그런데 말이지, B가 없고 다 A이면 얼마나 더 좋을까?

그러니까 아들 녀석이 귀가 번쩍 뜨여서 그 다음에 제가 하는 말 을 잘 알아들었습니다.

대학 입시에서도 수학과 영어가 제일 중요한데, 다른 것보다도 수학과 영어는 A를 받아야 한단다.

제가 처음부터 야, 그런데 B가 뭐냐 B가?라는 식으로 말했 다면 아들의 반응은 달랐을 것입니다.

 저는 주께서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책망할 일이 있어서 책망의 메 시지를 보내실 때 먼저 칭찬을 하셨다는 사실에서 그분이 얼마나 의사 소통을 잘하셨는가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커뮤니케이션 에서도 우리의 진정한 본(本)이 되십니다. 교회에서 목사가 잘못 했을 때도 목사님, 참 수고가 많으셔요. 그런데 이런 일은요… 라고 말한다면 기분이 좋겠지만, 목사님, 이게 뭡니까? 하 면 그 말씀이 아무리 맞는 말이라 해도 참 받아들이기가 힘이 듭 니다. 교회를 향해서도 우리 교회는 왜 이렇게 사랑이 없습니까 ?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그것이 만 번 지당한 말임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먼저 좋은 점이나 자랑할 만한 점들을 이야기하면서 목사님, 그런데 이런 면이 보충되면 얼마 나 더 좋을까요?라고 말한다면 그 충고를 받아들이는 저희 사역 자들의 마음이 얼마나 편안하겠습니까? 주께서 이 편지를 기술하는 방법을 통해서 우리는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분은 먼저 칭찬을 강조하셨습니다.

 2,3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우선은 주께서 에베소 교회의 행위, 즉 업적을 안다고 했습니다.

또 수고도 알고 인내도 안다고 했습니다. 행위와 수고가 어떻게 다릅니까? 저는 에베소 교회의 놀라운 업적을 말하면서 그것을 수고와 인내라는 두 가지 표현으로 나누었다고 생각합니다. 적극적 인 표현으로는 수고라는 말을 쓰고 소극적인 표현으로는 인내 라는 말을 쓴 것인 듯합니다.

 그런데 주께서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특별히 칭찬한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드러낸 것입니다. 거짓된 자들로부터 교회 속에 참된 진리를 수호한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어떤 배 경을 가진 사건일까요? 6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사건이 언급됩니 다.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이 부분만으로는 니골라 당의 정체를 알기가 어렵습니다. 2장 1 4,15절에 보면 니골라 당의 교훈이 두 가지 나옵니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니골라당은 우상 숭배와 부도덕한 음행의 생활 태도를 가지고 있었 던, 초대 교회에 존재했던 유명한 이단 중의 하나입니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위협하던 이단들은 크게 두 가지 로 나눌 수 있습니다. 어떤 신약의 서신서를 보든지 이 두 종류 의 이단이 항상 경계 대상이 됩니다. 그 하나는 율법주의인데, 이것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 를 믿음으로써 구원받는다는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곡해합니다. 또 하나는 무율법주의입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면 아무렇게 나 살아도 좋지 않은가 하는 논리로서, 도덕적인 성결한 삶의 중 요성을 일부러 격하시키고 무분별한 방종의 삶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어떻게 가르칩니까? 물론 행위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행위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열매로서 반드시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행위는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구원의 열매로서 반드시 강조될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히 에베소 교회와 에베소 도시 안에서 문제가 된 것은 이 무 율법주의 성향을 지난 니골라 당이라는 이단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이단이 에베소 도시에 성행하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배경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바울 사도가 에베소를 선교하던 당시에 그 도시민의 최대의 자부심 은 자신들이 아데미의 신전이 있는 도시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었습 니다. 이 도시에서 제일 유명한 것이 알테미스 신전인데, 알테미 스는 희랍 명칭이고 다이아나는 로마 명칭입니다. 이것은 고대 세 계의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입니다.

이 신전 안에는 무려 127개의 대리석이 있습니다. 제가 터키를 방문하고 놀란 것은, 그리이스와 비교가 안 되는 엄청난 규모의 사원들이 그곳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알테미스 신전은 지금 은 페허가 되어서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지만, 본래 그곳에는 금이나 보석으로 입혀진 대리석 기둥이 있었고 앞쪽에 풍요와 생식 을 상징하는 알테미스 신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또 많은 남녀 사제들이 신전에서 알테미스 신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여사제들 대 부분은 창기였다고 하며, 신전 안에서는 날마다 음행이 행해졌다고 합니다. 그 당시 알테미스 신전은 은행으로 사용되어서 돈 거래 가 성행했습니다. 또 이 신전에 들어오는 자는 처벌을 받지 않았 기 때문에 범죄자들의 은신처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무서운 것은 이 신전이 부패와 향락의 원천이 되었다는 사실 입니다. 이사원의다이아나상(像)이나 그 밖의 신전의 상을 보면 생식기가 과장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데미 신과 관련해서 바울 사도가 굉장히 애를 먹는 사건이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사도행전 19장 23,24절을 보십 시오.

그때쯤 되어 이 도(道)로 인하여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銀匠色)이 아데미의 은감실을 만들어 직공들로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데메드리오가 아데미 신상을 조그맣게 만들어 에베소 사람들에게 팔 아서 집에 놓고 섬기게 했다는 말입니다. 지금도 그들은 그 신상 을 만들어서 관광객들에게 팝니다. 저도 그곳에서 하나 사 가지고 왔습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겠습니다. 25절부터 29절까지입 니다.

그가 그 직공들과 이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유족(裕足)한 생활이 이 업(業)에 있는데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아시아 전부를 통하여 허다한 사람 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우리의 이 영업만 천하여질 위 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전각(殿閣)도 경홀히 여 김이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 라 하더라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분이 가득하여 외쳐 가로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온 성이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 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잡아 가지고 일제히 연 극장으로 달려들어가는지라.

 제가 터키에 갔을 때 연극장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2만 4천 명 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의 반원형 극장입니다. 그 극장에서는 축제가 있기 전에 먼저 동물을 잡아서 제물로 드리는 풍속이 있었 다고 합니다. 그런데 종종 그리스도인들이 야수들의 밥이 되어서 제물로 바쳐지는 비극적인 사건들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제가 터키 에 다녀오고 나서야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한 구절이 하나 있는데, 바로 고린도전서 15장 32절입니다.

내가 범인(凡人)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이 구절에서 바울이 맹수와 직접 싸웠다는 해석을 유추해 내기는 어렵지만, 저는 바울이 맹수의 밥이 될 뻔했는데 하나님께서 놀랍 게 지켜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해석이 아니고 제 상상일 뿐입니다. 로마서 16장에 보면, 바울이 에베소 선교에 동참했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가리켜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 목이라도 내어놓았나니(롬 16 :4).

제가 에베소에 다녀오면서 생각한 것은, 에베소 연극장에서 바울이 야수의 위험 앞에서 목숨이 위태할 때 브리스길라나 아굴라 같은 제자들이 목숨을 걸고 바울을 지켜 주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바울은 이런 고난과 역경 속에서 에베소에 복음을 전했고, 그 복음은 에베소에서 영광스러운 복음으로 계속 전파되어 갔습니 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에베소를 떠난 후에 어쩌면 그들의 신 앙을 위협할 이단의 미혹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예상했습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를 치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 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 을 내가 아노니(행 20:28-30).

바울의 예언은 적중했습니다. 바울이 떠난 후에 드디어 이단이 일 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단이 바로 니골라 당입니다. 이들은 에베소 도시의 풍속을 받아들여서 부도덕과 우상 숭배를 조장했습니 다. 이 니골라 당의 영향 때문에 교회가 순결을 잃어버릴 위험에 처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인들은 이것을 잘 분별 하여 그 거짓된 자들의 정체를 드러내며, 복음의 진리를 수호했습 니다. 그것이 잘한 일이라고 주께서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책망하시는 모습 4절에 책망의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의(義)와 사랑의 균형이라고 생각합니다. 진리를 강조하고 올바른 교리의 수호를 중시하다 보 니까 필연적으로 비판의 분위기가 조성됩니다.

저 친구는 가짜인데, 니골라 당과 관련이 있을지 몰라.

저 사람은 우리 교회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지? 저 사람이 구원받았을까? 이런 식으로 사람을 분별하고 비판하는 일에 열중하다 보면 틀림없 이 일어나는 현상 중의 하나가 사랑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진리 를 분별하고 수호하는 것은 올바른 일이지만, 필요 이상으로 그것 을 강조하기 시작하면 점차 사랑에서 떠나게 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첫사랑을 잃어버리는 것이지요.

 마치 신혼 부부의 경우와 비슷합니다. 처음에 신혼 생활을 할 때 는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남편과 아내가 상대 방의 정체를 알기 시작합니다. 이때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 정 반대의 결과를 맞게 됩니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용납하고 사랑하는 부부들이 있는가 하면 난 속았어. 속았단 말야. 연애할 때와 지금은 다르단 말야 하는 부부들도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에는 문제가 시작되는 것이고, 결국은 한 가정이 깨어지는 비극이 초 래되기도 합니다. 극단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 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교회 안에서 이단을 분별하지 않아도 좋다는 말은 아닙니다. 주님이 에베소 교회를 칭찬하셨던 것처럼 우리는 진리를 수호하고 진리를 분별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 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비판이 우리의 생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는 점입니다.

 우리 교회에 있다가 불행히도 이단에 빠져 떠나간 형제가 하나 있 습니다. 제가 수개월 전에 그 형제와 제 사무실에서 만났을 때, 저는 그 형제에게 형제여, 형제가 우리 교회에 처음 왔을 때 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변함없이 형제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 앞에서 분명히 말하십시오. 당신은 그 이단 사설을 우 리 교회에서 퍼뜨릴 의향이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자기는 그것이 진리라고 생각한다고 대답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미안하지만 우리 교회에서는 당신을 용납할 수 없겠습니 다. 형제가 그 잘못된 이단 사상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다음 주 에 공동회의를 열어서 당신을 제명해 버릴 것입니다. 그 사상을 포기하지 않으려면 당장 떠나십시오. 나는 거짓이 우리 교회에서 용납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나 는 형제를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가 가진 그 이단 사상을 거 절하는 것입니다. 형제가 그 이단 사상에서 돌이킬 수 있다면 언 제든지 나는 형제를 다시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단을 포용하고 그것을 선전할 의도를 가지고 있는 한, 나는 형제를 우 리 교회 안에서 용납할 수 없음을 분명히 아십시오.

 우리는 진리를 수호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를 분별해야 합니다.

주님은 그것을 인정하시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신앙의 근본 문제가 아닌 것들에서까지도 형제를 의심하고 비판하는 것이 생리가 되어 버리면 위험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공동체 는 사랑을 잃어버린 냉랭한 비판의 공동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눈의 들보는 깨닫지 못하고 형제 눈의 티를 지적하는 운동 들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들은 진리를 한 번 강조할 때 사랑을 두 번 강조하시오.

세상은 우리의 사랑을 통해서만 진리를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오.

세상은 진리에 대한 관심을 먼저 갖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진실로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사랑의 문제를 먼저 봅니다. 그리고 그들 은 우리의 사랑을 통해서만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면 에서 어거스틴의 충고는 얼마나 적절한지 모릅니다.

 권면의 말씀 5절에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 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는 권면의 말씀이 나옵니 다. 여기서 생각하라는 말은 계속적으로 생각하라는 의미입니다. 끊임없는 자기 성찰의 요구인 것입니다. 자기의 건강을 끊임없 이 돌아볼 수 있는 사람이 건강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계속 자신에 대한 성찰을 거듭해야 합니다.

 또 회개하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계속적인 동작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단 한번의 동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을 희랍어 에서는 부정과거형이라고 말합니다. 회개는 점진적으로 계속 하는 것이 아니라 단번에 하는 것입니다. 형제여 죄를 떠나시오라고 하면 『목사님, 제가 차차 정리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 치고 죄를 정리하는 사람을 못 보았습니다.

옛날 부흥 강사로 오신 목사님이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는데, 저는 그 이야기가 진리 같습니다.

지옥이란 뭐냐? 차차 하던 사람이 아차차 하는 것이 지 옥이다.

회개는 단번에 돌아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고 용납 하시지 않는 모든 죄에서 단번에 돌아서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처음에 시작했던 그 자리, 내가 당연히 서 있어야 할 그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처음 행위를 가지라.

왜 사랑을 잃었습니까? 형제에 대한 기도를 망각했기 때문입니까? 그러면 형제 자매를 위한 기도를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가장 작은 일에서부터 형제와 자매를 섬기려는 사랑의 노력을 포기했기 때문입니까? 다시 그 노력의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 으면 촛대를 옮기신다고 했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사명을 다하지 못하면 하나님은 그 교회를 향한 사명과 기대를 다른 교회에게 부 탁하실 것입니다.

오늘의 에베소는 페허의 도시입니다. 고고학자들이 발굴해서 관광용 도시로만 남아 있습니다. 이 도시의 입구에는 사도행전의 역사를 기록했던 누가의 무덤만이 쓸쓸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화 려했던 에베소가 페허의 도시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요한계시록의 경고가 응답되었습니다.

회개하지 아니하면 네 촛대를 옮기리라.

사랑하지 않는 공동체, 진리가 진리로서 인정될 수 있는 그 바탕 을 상실해 버린 공동체, 그런 공동체는 이미 주님의 사역을 감당 할 자격을 잃어버린 공동체입니다. 주님은 다른 공동체를 찾기 시 작합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 메시지를 우리 교회를 향한 성령의 음성으로 들을 때 우리에게 도전과 성숙의 메시지가 되리라 믿습니다.

 약속의 말씀 7절 말씀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 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창세기 3장에서 범죄한 인간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을 때, 그들 은 다시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한계 시록 22장에서 우리는 생명나무로 나아가는 길이 다시 열리는 것 을 봅니다.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요한계 시록의 마지막 장에서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낙원에서 생 명나무의 과실을 먹고 있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의 교제를 나누는 모습입니다. 교제는 두 가지 차원의 교제가 있습니다. 나를 구원 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영원히 교제하는 것(영생)과 내가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과 더불어 영원히 교제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죄가 하나도 없이, 약점이 하나도 없이, 시기나 비난이나 의심이나 아픔도 하나도 없이, 자 기를 변호할 필요도 없이 모든 것을 드러내놓고 모든 것이 완성된 상태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과 더불어 영원히 영원히 교제할 수 있는 자리가 바로 천국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런 교제의 소 망을 가진 자들에게 이 땅에서 살아갈 때부터 그렇게 교제하는 연 습을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큰 계명입니다.

 사도 요한은 A.D. 96년 밧모 섬의 귀양에서 풀려나고 얼마 있다가 에베소로 돌아옵니다. 요한은 90세 이상을 살았다고 전해 집니다. 나이가 많아 기력이 쇠하자, 요한을 존경했던 제자들이 그를 들것에 메고 의자에 앉게 한 다음 설교를 해 달라고 했답니 다. 그러면 사도 요한은 항상 같은 내용의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 요한일서에 보면 하나님은 사랑이신 것과 사랑의 교제에 대해 씌어 있습니다. 요한의 메시지는 늘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한번 은 어떤 제자가 요한 선생이 설교하려고 올라왔을 때, 선생님, 그 메시지 말고 다른 메시지는 없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때 사도 요한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내가 다시 말하노니 소자(小子)들아 서로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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