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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교 명령에 순종한 빌라델비아 교회 (계 2: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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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델비아라는 도시는 로마와 아시아를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로서, 아시아로 통하는 관문(Gateway to Asia)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 빌라델비아를 중요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이 도시를 통해서 아시아 지역에 로마의 정치적, 문화적 영향을 확산시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헬라 문화를 보급하는 통로 역할을 했던 도시 빌라델비아, 그러나 그리스 도인들은 이 도시를 복음을 전하기 위한 선교 중심 도시로 전환시키기로 작정했습니다. 이것이 빌라델비아 교인들의 거룩한 야망이었습니다.

 선교의 기회를 포착한 빌라델비아 교회에 나타난 주님의 모습을 주목해서 봅시다. 7절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使者)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 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주께서는 열쇠를 가지고 등장하셨습니다. 그 열쇠를 가지신 분이 그 열쇠로 문을 열 수도 있고 닫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열쇠로 이 교회 앞에 문을 여셨습니다. 8절 말씀을 보십시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 이 교회 앞에 열린 문을 두었다고 선언하십니다.

 다윗의 열쇠는 이사야서 22장 15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앗수르의 침략을 받았을 때 셉나라는 반역자가 생깁 니다. 이 반역자는 궁중에도 출입했고, 나라의 가장 중요한 국고(國庫)도 마음대로 열 수 있는 권한을 가졌습니다. 이 반역자 때문에 나라가 매우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사람을 등장시키는데 그가 엘리아김이었습니다.

그에게 열쇠를 맡겨서 그가 궁중에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여기에서 엘리아김은 장차 오실 예수님의 모형이 됩니 다. 마치 엘리아김이 다윗 왕국의 열쇠를 갖게 된 것처럼,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열쇠를 갖고 계십니다.

 닫을 수도 있고 열 수도 있는 그분이 빌라델비아 교회 앞에 구원 의 복음을 전하도록 문을 활짝 열어 놓습니다. 문을 연다는 표현 이 성경에 많이 나오는데, 선교의 기회를 묘사할 때 열린 문 이라는 문구를 사용합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이 아시아를 향해서 전도하러 가려고 할 때 성령께서 막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울이 잠든 중에 환 상이 보이는데, 자기가 가고 있는 아시아와 정반대 방향인 마게도 냐 지방의 사람이 나타나 건너와 우리를 도우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유럽 쪽으로 문을 여신다고 생각했습 니다. 이렇듯 선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느 곳으로 문을 열어 주시는지 민감하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닫아 놓으신 곳 에 억지로 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낭비입니다. 물론 그 곳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지만, 그곳에도 문을 열어 주시도록 기다 려야 합니다. 좀더 효과적인 선교 전략은 하나님이 문을 열어 놓 은 곳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 전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에게 전도하는 것이 좋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억지로 하라고 하지 않았 습니다. 자꾸만 반대하면 거기에 투자하려고 하지 말고 열린 사람 에게로 가야 합니다. 반대하는 사람은 포기하지 말고 그를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이 시점에서 내 발걸음을 어디로 인도하시는지를 주목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 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 라(행 14:27,28).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유하려 함은 내게 광대하고 공효(攻效 )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니라(고전 1 6:8,9).

 빌라델비아 교회에는 어떤 선교의 문을 열어 주셨습니까? 요한계시 록 3장 9절에 보면 보라 사단의 회(會)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 안에는 유대인 그리스도인이 많이 있었을 텐데, 아마도 그들은 동족인 유대인들 때문에 많은 고통과 박해를 당했 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유대인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백성이라 고 자부하고 있지만 사실은 사단의 도구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 러나 이런 박해 가운데서 빌라델비아 교인들이 늘 어려움만 당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9절 전체를 다시 보십시오.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 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사람의 인내에는 한계이 있기 때문에, 늘 고생만 하고 박해만 당 하면 자칫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는 회 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과 박해의 와중에서도 성 도들에게 시시때때로 좋은 일을 주십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우리 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우리를 반대하고 거스릴지라도 우리는 주 님 앞에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자라는 것을 확신시켜 주십니다.

 주경학자들은 이 9절 말씀을, 아마도 빌라델비아에 있었던 유대인 회당의 주요 지도자들 몇 사람이 그리스도인들의 전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으로 넘어오게 된 것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그 들이 복음으로 깨져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광경을 지켜보는 빌라 델비아의 교인들은 얼마나 신났겠습니까? 박해만이 아니로구나. 우리는 여전히 주님의 사랑을 받는 자로구 나.

이렇게 말하면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확신했을 것입 니다. 이렇게 복음은 유대인들 가운데서 계속 전파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된 유대인들 가운데 몇 사람은 소아시아를 두 루 다니면서 그곳에 흩어진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계속적으로 그들은 소아시아와 그 당시에 알려진 세계에 벽을 헐고 문을 열어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역사를 확장 시켜 나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문을 열고 계십니다. 지금 열린 문을 주셨습니다. 여전 히 고난과 박해가 있고 복음의 대적들이 있지만, 주께서 문을 여 셨기 때문에 복음은 여전히 그 가운데서도 승리하면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존귀케 하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가고 있었습니다.

 상급을 바라본 교회 11절 말씀입니다.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 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빌라델비아 교회는 과연 자기의 면류관을 잃어버리지 않았던 교회입 니다. 그들은 상급을 바라보았고, 그 상급을 얻었던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전도를 안 한다고 해서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명령인 전 도와 선교를 등한히 하면 상급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안 받으면 되지 뭐 하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상급 이 없다는 사실을 단순하게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가 받아야 할 상급이 없다는 것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주님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 사람이 볼 때는 굉장한 사람같이 살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는 전혀 가치 없는 생애를 산 사람, 얼마나 비참합니까?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임받지 못한 가치 없는 생애를 항상 두려워했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케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여기서 버림은 지옥에 가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하나 님 앞에 쓸모없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내 삶을 잘 관리하지 못하고 복음을 전하기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한다면, 마침내 나는 하나님 앞에서 버림을 받고 말 것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이 나를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향해서 아무 기대도 갖지 않는다는 것처럼 비극이 어디 있습 니까?

사울 왕이 왕 노릇을 제대로 못하니까 하나님께서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못한다고 해서 그 일 이 중단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일을 스스로 행 하십니다. 우리가 잘못하면 다른 사람을 통해서 하시고, 우리 교 회가 못하면 다른 교회를 통해서 하십니다. 순종하는 교회를 들어 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복음을 전파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실패함이 없습니다. 내가 순종하지 않으면 나만 버 림받고 마는 것입니다. 사울이 불순종했을 때 다윗을 통해서 이스 라엘에 하나님의 뜻을 펼치셨고, 에서가 장자의 권한을 소홀히 여 겨 팔았더니 에서 대신에 야곱을 쓰셨습니다. 야곱이 잘못도 많이 했고 결함도 많지만, 그가 가진 한 가지 장점은 마음 속에 정 열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장자의 권한을 존중히 여겼는데, 그것은 장자의 권한을 통해서 자기에게 돌아오는 재산을 노렸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장자의 권한이 중요한 이유는 메시야가 이 장자권을 통해서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야곱은 주님에 대 한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주님에 의해서 쓰임받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 이것이 정열입니다. 신앙에 이런 정열이 있어야 합 니다. 가룟 유다가 빠진 대신에 맛디아가 들어갑니다. 한 사람이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을 때,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통해 서 하나님 자신의 일을 계획대로 밀고 나가십니다. 당신은 이 시 대에 하나님의 쓰임을 받기 원하지 않습니까?

여기 상급을 바라보았던 교회, 면류관을 잃어버리기를 원하지 않았 던 교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를 역사적으로 정말 귀 하게 쓰셨습니다. 일곱 교회가 하나하나 다 망가져 갈 때, 빌라 델비아 교회는 소아시아 지역에서 끝까지 남아 있었습니다. 기독교 의 복음을 유일하게 지키고 있었던 빌라델비아 교회, 그 최후의 신자들은 일차대전 때까지 남아서 복음을 전하다가 전쟁이 끝난 후 그리이스로 떠났다고 합니다. 소아시아 지역에 복음의 영광이 떠 나가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이 교회를 끝까지 사용하시고 끝까지 붙잡으셨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선교를 향한 뜨거운 심장을 가 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를 존재할 가치가 있다 고 보셨고 그래서 마지막까지 쓰셨던 것입니다.

약속의 말씀 이 장(章)의 앞 부분에서 살펴본 10절 말씀에 환난 중에서 지 키신다는 약속이 나옵니다. 이 약속은 역사적으로 성취되었는데, 이슬람에 의해서 이 지역의 교회들이 다 망하는데도 이 빌라델비아 교회만은 지키십니다. 마지막 날에도 이런 교회, 이런 성도들은 하나님이 지키실 것입니다.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 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그들을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소중한 존 재로 삼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 기둥에 이름을 새기는데 , 첫째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새기고, 둘째로는 새 예루살렘, 즉 천국의 이름을 새기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이름을 새기겠다고 하 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네가 진실로 하나님과 그분 의 나라를 위하여 또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았던 성도인 것을 내가 인정하마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 교회 앞에, 이 시대에 선교의 문을 열고 계신데, 우리는 얼마나 순종하고 있습니까? 제가 선교 역사를 공 부하면서 흥미롭게 생각했던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의 한 가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1269년 중국 선교의 기회가 있었습 니다. 마르코 폴로 형제가 원(元) 나라 때에 중국을 방문하고 이탈리아로 돌아올 때, 징기스칸의 손자였던 쿠빌라이 칸이라는 황 제의 편지를 한 장 가지고 옵니다. 그 내용은 유럽에서 많은 과 학자들과 종교를 가르칠 많은 교사를 보내 달라는 것입니다. 여기 서 종교는 기독교를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기독교를 가 르칠 수 있는 교사들을 보내 달라는 이 요구에 따라 1278년에 다섯 명이 가려고 했는데 실패합니다. 그 후 1294년에 프랜 시스코 종단에 속한 선교사 한 사람이 갔습니다. 그것은 선교 요 청을 받은 후 25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 습니다. 쿠빌라이 칸은 이미 죽었고, 선교의 기회는 지나가고 말 았습니다. 복음을 전해 달라는 요구 앞에 그 당시의 교회들은 마 땅한 반응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요즘 중국의 문이 다시 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이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기회 를 놓치면 중국을 향해 열린 복음의 문은 영 닫힐지 모릅니다.

 제 2차대전이 끝난 후에 맥아더 장군이 미국 선교 본부에 편지 한 장을 썼는데, 그것은 지금 일본 땅은 선교의 황금기를 맞고 있습니다. 수천 명의 선교사들이 필요합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 그런데 이때 미국과 세계가 선교사를 몇 명 보낸 줄 압니까? 맥아더 장군이 그 요청을 한 후 10년 동안 일본에 파송된 선 교사는 백 명도 못 됩니다. 그 후 일본 사람들이 황금에 눈을 뜨고 물질주의에 빠지자마자, 그들은 복음에 대한 관심을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기회는 지나갔습니다.

 러시아(독립국가연합)가 열리고 있습니다. 갑자기 굳게 닫혔던 철 의 장막이 열리고 성경을 한없이 들여와도 좋다고 합니다. 교회에 서 성경을 준다고 선전하기만 하면,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까지도 줄을 서서 성경을 받다가 자기 차례가 돌아오지 않으면 엉엉 운 다고까지 합니다. 얼어붙었던 러시아 땅에 선교의 새로운 문이 열 리고 있습니다. 중앙 아시아 우즈벡 공화국 타슈켄트, 50만의 고려인이 살고 있는 그 도시에서 목마르게 복음을 기다리고 있습니 다. 이 기회를 놓치면 러시아 선교의 문은 닫힐지 모릅니다.

 러시아 문제에 정통한 한 학자의 책을 제가 읽고 있는데, 그 책 에서 그 분이 이런 경고를 합니다. 러시아의 문이 열렸다고 해서 이 문이 마냥 열릴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구 (舊)소련 역사를 보면, 소련은 항상 종교에 대해서 문을 열었다 닫았다 했습니다. 비록 지금 글라스노스트(개방)의 물결을 타고 있다고 해서 이 문이 영원히 열릴 것으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공산주의를 포기한 것으로도 착각하지 마십시오. 이 문은 어느 날 갑자기 닫힐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러시아 사람들을 사랑해서 조금 문을 열어 주신 기회일 수가 있습니다. 이때 기회 를 놓쳐 버리면, 문은 영원히 닫힐지 모릅니다.

 우리 앞에 열려진 이 기회의 문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하고 있습니 까? 대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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