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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 역사의 세 시기 (계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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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처럼 그리스도인로서 신문이나 TV를 보면서 민망스러운 적도 없을 것입니다. 교회의 비행 혹은 목사를 비롯한 일반 그리스도인 들의 비행을 고발하는 내용이 머리 기사로 나오는 것을 종종 목격 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이런 뉴스를 대할 때 어떤 느낌을 가집 니까? 저는 한편으로는 부끄러운 생각도 들고 한편으로는 분노의 감정이 솟구치기도 합니다. 부끄러운 생각이 드는 것은 나 자신을 포함한 그리스도인들의 부족함과 과오 때문이고, 분노의 감정이 생기는 것은 사소한 사건들도 과장해서 보도하는 대중 매체의 배후 에 교회의 파괴를 노리는 사단의 음모가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물음을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과연 미래가 있는가? 질문을 조금 바꾼다면 앞으로 교회가 정말 살아남아서 승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1장은 교회가 걸어왔던 길과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 을 환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초대 교회부터 예수님이 재림할 때까지의 교회 역사의 요약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 6장부터 죄 많은 세상과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본격적인 심판이 시작되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이 심판의 역사가 단계를 따라 펼쳐지고 진행되는 가운데 사도 요한은 심판의 계시 와 별도로 몇 가지 중요한 비전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7장 에 보면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늘 나라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 이 나옵니다. 10장에서는 성경을 가지고 이 땅을 섭리하시는 그 리스도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런가 하면 11장에서는 교회의 오늘과 내일, 교회의 궁극적인 미래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심판의 계시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이런 몇 가지의 비전이 삽입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교회가 때로는 서로 싸우고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고 하나님의 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부정과 부패를 저지르기도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교회를 사랑 하시고 채찍질을 해서라도 교회를 정화시키시며 결국에는 교회를 사 용하셔서 역사 속에 빛나는 승리를 이루실 것을 나타내시기 위함입 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 11장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교회가 걸어 온 길과 오늘날의 교회가 처하고 있는 현실, 그리고 교회 앞에 기다리고 있는 미래를 어떻게 제시하는지 볼 수 있습니다.

 교회의 핍박과 증거의 시기(1-6절) 이 시기는 교회가 핍박을 받으면서도 복음을 계속적으로 증거하며 하나님의 승리를 역사 속에 이룩하고 있던 때입니다. 저는 초대 교회 때부터 시작해서 바로 오늘날까지가 이 시기에 해당된다고 생 각합니다.

요한계시록 11장이 열리면서 성전과 성(城)이 등장합니다. 예루 살렘 성이 무너지고 성전이 파괴되고 제단이 없어지게 된 것이 주 후 70년의 일이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이 씌어진 시기(주후 95 년경)를 생각해 보면 그 당시에는 성전과 성이 존재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사도 요한이 지금 환상 가운데에서 보고 있는 성전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1절을 보십시오.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나오는 성전을 역사의 말기에 다시 건립될 예루살렘 성전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구절의 성전이나 제단은 모두 상징적인 방법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래서 이 환상은 가시적(可視的)인 성전은 무너졌다. 그러나 아 직도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척량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보호권 혹 은 소속권 안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무너진 성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직도 예배하는 자신의 백성들을 갖고 계시 고 그들을 보호하시며 그들을 통해 예배를 받으십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용하셔서 이 어두운 역사 속에서 아직도 복음의 증거를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본문에 서 전달하려고 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2절 말씀입니다.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 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여기의 마흔두 달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문 자 그대로 삼 년 반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저는 요한계시록의 성격상 이것을 상징적으로 보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합니다.

삼 년 반이라는 말을 들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곧바로 떠올리 는 사건이 있습니다. 소위 신구약 중간기 때 수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라는 사람이 예루살렘에 쳐들어와서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성전 제사를 금지하고 제우스의 신단을 세운 사건입니다. 우리 민족이 일제 36년을 치욕의 기간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삼 년 반을 예배와 신앙의 자유를 상실했던 악몽 같은 기간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나오는 마흔두 달은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 세력에서 짓밟힌 어두운 시기의 상징적 표현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일천이백육십 일도 삼 년 반입니다. 마흔두 달은 박해를 받는 어 두운 시절을 표현했지만, 일천이백육십 일은 두 증인이 베옷을 입 고 예언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베옷을 입는 것은 슬픔의 표시입니다. 그러나 구약적인 배경에서 보면, 하나님의 선지자들 이 그 시대의 부패한 백성들을 깨우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대 언할 때 베옷을 입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외치는 메시 지는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증인들이 슬픔을 짊어지고 회 개하라 외치는 장면이 구약에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증인은 문자 그대로 역사의 말기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쓰실 두 사람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 두 증인의 활동을 읽어 보면, 옛날의 모세나 엘리야를 방불케 하는 그런 사역들이 등장하는 것 을 볼 수 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한 것은 모세의 기적과 연결되고, 하늘을 닫아 비 오지 못하게 한 것은 하늘 문을 닫기도 하고 열기도 하 는 사람 엘리야를 생각나게 합니다. 그래서 모세와 엘리야가 역사 의 말기에 다시 한번 등장할지 모른다는 주장도 있고, 모세와 엘 리야 같은 특별한 사람들이 등장해서 말세에 어떤 활동을 할지 모 른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저는 좀더 포괄적인 관점에서 보았습니다 . 즉, 역사의 말기에 하나님이 쓰실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 다 시 말하면 교회 공동체가 수행해야 할 그 사명을 증인이라는 상징 적인 이미지를 통해서 나타냈다고 봅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두 증인일까요? 성경에서 둘이라는 숫자는 증 언을 성립시키는 최소한의 숫자입니다. 법정에서의 어떤 증언이 믿 을 만한 증거로 채택되려면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이 필요합니다.

장차 마지막 날에 심판대 앞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나는 복음 을 듣지 못해서 예수를 믿지 못했습니다라고 자기를 변명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그런 경우를 위해서 복음을 전할 때 반드시 둘씩 전하게 했습니다. 둘은 증인의 숫자입니다. 그러므로 두 증 인이라는 것은 복음 증거라는 사명을 감당해야 할 교회 공동체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두 증인이 4절에는 다른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이는 이 땅의 주(主)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감람나무는 기름을 공급하는 원천입니다. 그 기름이 촛대에 들어가 서 빛을 발합니다. 빛을 발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이 아닐까요? 그것이 바로 교회의 책임이 아닐까요? 요한계 시록의 서론에서도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라고 말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두 증인을 특정한 개인과 연결시키는 것보다 교회 공동체가 주님 오시기 직전에 감당해야 할 사명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계속해서 핍박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핍박 의 역사 속에서도 여전히 교회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가 핍박 속에서도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교회에 능력 을 부여하실 것입니다. 마치 옛날 모세와 엘리야가 그 사명을 수 행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하나님이 능력을 주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 바로 이것이 본문 메시지의 중요한 핵심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엘리야의 경우, 그들은 문자 그대로 하늘을 열기도 하고 닫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야고보서에서는 우리가 기도를 통해서 하 늘을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교회의 무기는 기도입 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그 능력으로 이 악한 세상과 대결합니다. 교회를 향한 핍박이 그 정도를 더해 가는 역사의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은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이 복 음의 증언을 계속 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끊임없이 능력을 부여하 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허락하신 또 하나의 무기는 말씀 입니다. 예레미야서 5장 14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불이 되어 사람들을 심판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사로잡아 변화시키기도 하고, 악한 세상과 대결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유명한 과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본래 교회에 대해서 굉장히 비 판적인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독일이 히틀러 치하에 들어갔 을 때 아인슈타인은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목격하기 시작했습니다 . 그 역사의 암흑기에 진리를 포기하지 않고 예언자적 음성을 발 하면서 백성들을 위로하고 있었던 놀라운 한 공동체를 보기 시작했 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다 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나는 종종 교회를 조롱했다. 그리고 나는 교회를 과소평가해 왔 다. 그러나 내 조국이 이런 짙은 어둠 속에 있었을 때, 내가 기대했던 대학도 침묵을 지켰고 언론조차도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진리를 말한 유일한 공동체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교회였다.

나는 빛을 발하는 이 교회를 향해서 새로운 애정을 가지기 시작 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부정적인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하나 님은 참된 교회, 진정한 교회를 보호하시고 지키십니다. 이 교회 야말로 짙어가는 역사의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유일한 하나님 의 기대라는 사실을 본문은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 한은 교회가 핍박을 받으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 복 음을 증언하고 있는 첫번째 시기의 모습을 환상을 통해서 보았던 것입니다.

 교회의 마지막 수난의 시기(7-10절) 교회는 예전부터 여러 가지 수난을 많이 당해 왔습니다. 그러나 더 큰 수난이 아직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지막 수난입니다. 9절 에 보면 그 기간이 사흘 반이라고 했습니다. 핍박을 받으면서도 복음을 증거하는 삼 년 반의 기간과 비교할 때 사흘 반이라는 기 간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저는 핍박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 복음을 증거해 왔던 지 금까지의 긴 시기에 비하면, 이제 교회가 마지막으로 경험해야 할 수난의 시기는 대단히 짧은 시기라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삼 년 반에 비해서 사흘 반은 아주 짧은 시간입니다. 사흘 반이 어느 정도의 기간을 가리키는지는 모르지만, 대단히 짧은 어떤 시기에 대한 상징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7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 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교회 공동체가 이 세상을 향한 복음 증거의 사명을 거의 다 마칠 무렵,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인 적그리스도가 두 증인을 죽입니다. 8절에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 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이니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곳 을 좁은 의미에서 예루살렘 성이라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 에서 예루살렘이 애굽 땅과 혼동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소돔 은 부패의 성읍의 상징이고 애굽은 박해의 땅의 상징입니다. 그곳 에서 주님이 못박히셨다고 했는데, 결국은 포괄적인 의미의 이 세 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세상 한복판에서 주님의 증인들이 노략거리가 되고, 웃음 거리가 되고, 조롱거리가 됩니다. 마귀의 궁극적인 목표는, 복음 을 증거하는 모든 증인들과 그리스도의 교회를 죽음까지 몰고가는 것입니다. 교회의 죽음 그리고 증인들의 죽음이라는 목표 아래 진 행되는 사단의 계략 때문에 교회가 가사 상태까지 갔던 사례들도 많습니다.

한때 저 유명한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자기 시대의 기독교의 모습 을 보면서 신은 죽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을 상실한 교회를 보고 그런 사망 선고를 내린 것입니다. 약 20년 전, 미국을 중심으로 해서 사신(死神) 신학자들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신은 죽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미국 교회가 점점 쇠퇴해 가고 침체 속에 빠지는 모습을 보고 또 한 번의 사망 선고를 내릴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전세계의 많은 교회들이 다시 한번 뒷걸음질을 치고 있습니다. 지 금은 조금 사정이 다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공산주의 치하에 있는 동구라파나 소련이나 중국을 보면서 또 한 번 교회의 죽음을 확인해야 되는 그런 어려운 시기를 지냈습니다. 그러나 사단의 기도(企圖)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에 교회를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가기 위해서 사단은 집요하게 교 회를 유혹할 것입니다. 배도(背道)의 현상이 일어나고,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가고, 교회는 텅텅 비게 될 것입니다. 드디어 마귀 와 귀신들이 교회의 마지막 죽음을 선언해야 되는 그런 때가 올지 도 모릅니다. 그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10절입니다.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서로 예물을 보내니라 하더라.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실제로 못살게 굴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좋은 소식을 전한 것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들이 자기들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제 교회가 전도를 포기합니다. 교회가 죽었습니다. 그러자 즉시 악령들의 축제가 벌어집니다. 이제 정말 교회는 죽었다고 선언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예물을 보내면서 잔치를 벌이고 있습니다. 교회의 죽음에 대한 처절한 묘사입니다. 이것이 교회 의 마지막 수난의 시기입니다. 역사의 거의 마지막 때에 교회가 죽음을 경험하는 이런 시기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 마지막일까요? 그렇게 끝나야 될까요?

교회의 부활과 승리의 시기(11-13절) 교회는 다시 부활될 것입니다. 이 철저한 죽음을 극복하고 교회는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 속에 마지막 멋진 승리를 선포하고야 말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 가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이 증인의 부활은 바로 교회의 부활입니다. 이 불신앙의 세상, 무신론적인 세속의 흐름을 넘어서서 교회가 찬란하고 위대한 부활을 하는 마지막 역사의 최후의 드라마를 보여 주고 있는 장면입니다 . 이어서 13절을 보십시오.

그 시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 님께 돌리더라.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그 시간에 심판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심 판 전에, 부활된 교회가 부활의 승리를 선포한 후에 휴거됩니다.

부활한 교회가 이 역사와 세상을 향해서 위대한 승리를 선포한 후에 원수들 앞에서 당당하게 하나님의 영원한 집을 향해서 복귀하 는 모습이 얼마나 놀라운지 모릅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교회는 지금까지 핍박 속에서도 복음을 증언해 왔습니다. 하나님은 이 교회를 당 신의 능력으로 보호하시고 도우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최후의 날에 교회는 큰 어려움을 경험할 것입니다. 교회는 아마 도 가사 직전까지 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이 교회의 마지막 이 아닌 것을 기억하십시오. 주께서는 자신의 증인들을 부활시킬 것입니다. 교회는 다시 찬란한 부활을 경험할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궁극적인 소망이요 미래라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이 시대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할까요? 우리는 주께서 우 리에게 부탁하신 교회 본연의 사명을 행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들에게 붙여진 그 많은 별명 가운데서도 가장 적절한 별명이 있다 면, 그것은 증인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교회가 교회 된 사명, 즉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을 다할 때만 교 회는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계속되는 핍박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교회 , 존재하여야 할 이유가 있는 그리스도인들, 이들을 하나님이 지 키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사용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자문해 봅시다. 우리는 이 증인의 사명을 다하고 있습니까 ? 그리고 우리 교회는 복음 증거의 사명을 다 감당하고 있습니까 ? 우리 교회가 해야 될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배 당 건축과 같은 문제를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의 본질적인 혹은 최종적인 과제가 아닙니다. 교회의 본질적인 과제는 전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 교회라는 장 막을 넓혀야 한다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서가 바뀌면 안 됩니다. 마치 성전 건축이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사 명인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류입니다. 교회가 교회로서 존재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전도의 사명 때문입니다.

 과거 프러시아 제국의 영광을 이끌던 프레드릭이라는 대왕이 있었습 니다. 그가 한번은 전쟁에서 최소한의 사상자만을 내고 거뜬하게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이 통쾌한 한 판의 승리를 경험한 후에, 어떤 신하가 와서 프레드릭 대왕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대왕님, 우리가 최소한의 사상자를 내고 이런 멋진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비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적군은 일곱 명의 요리사에 한 명의 군인을 가지고 있었 는데 우리는 일곱 명의 군인에 한 명의 요리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먹는 것도 해야 되고 친교도 해야 되지만, 군인 본연의 임무인 싸움을 소홀히 할 때는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얼만큼의 군인을 가지고 있을까요? 주께서는 그리 스도인들의 명칭 가운데 하나로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라는 이름 을 주셨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는 얼마나 많은 군사들이 있습니까 ? 아니 얼마나 많은 구경꾼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받 고 그분의 은혜에 빚진 자임을 고백하는 사람들이라면, 우리 주변 에 그리스도 없이 죽어 가는 영혼들을 그대로 방관할 수 있습니까 ? 만약 복음을 가지고 나가서 통곡하는 심정으로 잃어버린 영혼들 에게 복음을 전하고, 사단의 역사를 궤멸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구체적인 전투에 참여하는 군인들이 없는 교회라면, 그 교회의 존재 이유는 무엇입니까? 핍박의 어려움, 역사의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을 묘사한 가장 놀랍고도 숙연한 표현 들! 나의 두 증인.

그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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