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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을 찾습니다 (눅 02:4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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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12살 때에 부모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기록과 30세가 되어 인류의 구세주로서의 공적인 생활을 시작하신 그 이후의 많은 사건에 대한 기록은 있지만 탄생하셔서 30년 동안의 예수님의 사생활에 대한 것은 모두 가리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말씀은 공생애 이전의 예수님의 사적인 삶을 다룬 유일한 성경말씀 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의 이름이 이 본문속에 나타나고는 다시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 요셉은 예수님이 12살 된 후에 곧 죽었다는 추측을 하게 됩니다.

또한 본문 말씀은 예수님 스스로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기인식을 명확히 보여주는 최초의 성경 말씀이기도 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찾아서 기뻐하면서도 또 한편은 잃어버렸던 예수님을 찾았을 때에 웬지 모르게 투정이 나서 한마디 했습니다. "보라, 너의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하고요. 이때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집에 있어야 될 줄 알지 못하였나이까 하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요 나는 하나님의 집 곧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입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 있다]는 이 말은 "내가 내 아버지의 일에 관하여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저는 오늘 예수님을 잃어 버렸던 마리아의 체험과 예수님을 다시 찾았던 마리아의 경험을 우리의 삼과 비교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유대인은 12살이 지나고 13세가 되면 성년이 됩니다. 이때부터 자기 힘으로 율법을 지키며 자기 인생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32Km이내에 사는 사람은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에 가서 유월절 절기를 지키고 제사를 드려야 하는 것이 의무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마리아와 요셉, 이 세 식구는 동네의 많은 사람들과 함께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유월절 절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요셉과 마리아는 으례히 예수님이 따라오는 줄로 알았습니다. 저녁 때가 되어 예수님을 찾았더니 보이지 않았습니다. 친척이나 이웃사람들 속에 있는 줄 알고 찾아 보았지만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예수를 찾으러 올라갔습니다.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에 계셨습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마리아는 예수그리스도를 잃어버린 경험을 그의 인생 속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최소한 3일 동안 예수를 잃어버렸습니다. 육신적으로 마리아는 여전히 예수님의 어머니였고 예수님은 여전히 마리아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진정한 의미의 사귐이 끊어진 모습을 우리는 이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잠깐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요 우리는 그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관계는 변하지 않지만 주님과 우리 사이에 더이상 사귐이 없는 인생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저는 본문말씀을 통하여 관계는 있지만 사귐이 없는 관계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때까지 우리가 예수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왔지만 그러나 예수님과 사귐이 없는 삶을 혹시 살아왔지 않았나 하는 것을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이 있던 삶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마리아에게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에는 두려움이 앞셨습니다. 자기의 몸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할 것이라는 주의 천사의 소리를 들었을 때 두려워 떨었으며 정혼한 요셉으로부터 받을 오해를 생각했고 세상
사람들의 눈총을 의식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을 잉태했습니다. 자기 속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잉태 되었다는 믿음이 두려움도 세상의 눈총도 이기게 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이 찾아와서 격려해 주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를 낳았습니다. 비록 말구유에서 아기를 낳았지만 동방의 박사들과 양치던 목자들이 찾아와 경배했습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되어진 일들을 마음에 새겨 놓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애굽까지 피난을 가기도 했지만 거기에 보람이 있었습니다. 애굽에서 돌아온 후에 마리아는 어린 아기예수를 안고 성전에 데리고 갔습니다. 비록 가난해서 송아지나 양을 잡아 바치지는 못했으나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바쳤던 비들기 2마리를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로 드렸지만 그래도 마리아의 마음에는 감사한 마음 뿐 이었습니다. 늘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예루사렘 성전에서 시몬이라는 사람이 아기 예수를 안고 기뻐하면서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했던 그 모든 일을 마리아는 예사로 보지 않습니다.

마리아는 예수가 누구였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자기 태중에 있었던지, 가슴에 안겨 잠이 들었든지, 자기 집에서 뛰어노는 아이였든지간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 놀라운 사실을 마리아는 언제나 알고 있었습니다. 그 예수와 얼마나 많은 대화를 했겠습니까 마리아와 예수님
과의 관계는 날이 갈수록 그 사귐이 깊어졌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2:40에 보면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가리아에게 태어나시고 그 마리아의 보호를 받고 예수님은 키가 자라고 지혜가 풍족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마리아 속에서 자라났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그리스도를 멀리두고 구세주로 믿는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 분과 모든것을 나누며 그와 함께 모든 일을 이야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태어나신 지가 몇 년이 되셨습니까 예수님을 처음으로 영접 했을 땐 한편으로 두렵기도 했을 것입니다. 세상의 조롱과 친구들의 눈총을 의시가기도 했을 것이며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는 세상이 두렵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했을 때에 우리는 거듭났으며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과거가 용서받아 깨끗해졌습니다. 기쁨이 있었습니다. 교회에 가도 기쁘고 말씀을 듣고 말씀을 읽을 때에도 마음이 뜨거웠습니다. 괴로움도 환난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우리안에 탄생하셨던 예수는 우리 속에서 자랐습니다. 우리안에 계신 예수는 강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담대했습니다. 지혜가 충족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 세상에서 기쁘게 살고 지혜롭게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예수에게 충만했습니다. 우리도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은 은혜가 컸습니다.

이것이 마리아의 예수 체험이요 오늘 우리들의 예수 그리스도 체험인 것입니다. 아직도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와 깊은 사귐속에 들어가지 못한 분들이 계시면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속에 뛰어드는 그것이 여러분의 기도의 제목이요 간절한 소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두번째로 그리스도와 사귐이 끊어진 그러한 관계를 또 한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마리아는 유월절 절기를 마치고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으례히 예수님이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12년 동안 모시고 키우다 보니까 마리아가 예수님을 위해서 존재하고 예수님이 마리아의 몸을 빌리신 것이 아니라 이제는 예수님이 마리아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마리아는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하룻길을 걸어갔습니다. 예수님이 그들과 같이 동행하고 있는지 확인하지도 않았으며 아무에게 물어보지도 않았고 의아해 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가 자기와 함께 있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았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없이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하룻길을 가고 날이 저물었을 때에야 예수가 자기들과 함께 있지 않은 것을 알게 되어 친척과 아는 사람들 속에서 예수님을 찾았지만 그들속에 예수님은 없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마리아와 예수님의 사이에 관계는 남아 있지만 더이상 사귐이 끊어진 상태였음을 오늘의 본문말씀은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했습니다. 가정을 떠나 이 마을 저 마을로, 이곳 저곳으로 다니시며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고 죄 지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고 천국의 비밀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님을 면담하고 가정으로 데리고 가려고 했으며 심지어는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상당한 착각을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처음 잉태했을 때의 그 감격은 사라지고 이제는 의당히 예수가 마리아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존재로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예수와의 관계는 있지만 사귐이 끓어지지 않았습니까 지난날의 삶이 어떤 삶이었습니까 마리아와 요셉처럼 예수님이 동행하는 줄로 생각하고 살았는데 실제로는 사귐이 끊어져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과의 관계는 여전히 맺고 있는 우리들 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분과의 사귐이 끊어져 버릴 수가 있습니다.

과거에 예수님이 우리 각자의 안에 잉태되고 예수님과 가졌던 깊은 은혜를 기억하고 그 체험을 이야기도 하며 이웃과 나누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 속직하게 예수님과의 사귐이 전혀 없는 삶이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교회생활을 몇 십년 혹은 몇 년을 하다보니 으례히 예수님은 자기와 동행해야 하는 분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정말 함께하고 계시는지 확인하지도 않고 우리가 신앙인인 줄 알며 주님이 함께하시는 줄로 착각하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음성도 더이상 듣지 못하고 하나님의 손길도 전혀 느껴보지 못하고 살면서도 예수님이 당연히 나와 함께 계신다는 생각으로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실지로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우리 자신의 인생의 이야기에 빠지고 경험에 빠지고 10년 20년의 신앙생활에 빠져서 예수님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체험의 이야기에 빠져 있기도 하며 교회의 예배에 참석하는 일에만 열중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만나 재미있기 사귀는 것이 곧 그리스도와 사귀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정작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우리의 삶인지 모릅니다. 많은 시간을 교회에서 보내며 교회의 주위를 뱅뱅 돌면서 살아가지만 예수님과 깊은 사적인 관계를 맺고 영적인 교제를 가지며 진정한 사귐을 갖고 있는지요

우리들이 언제 하나님의 말씀을 펴놓고 예수님과 조용히 사귀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까 언제 우리가 주님과 마주 앉아서 조용하게 대화를 하면서 사귐을 갖고 있습니까 교회를 위하여 많은 시간을 드리지만 그리스도를 위하여즌 시간을 드리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도 많이 있습니다.
얼마나 큰 착각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러다가 우리는 어느날 갑자기 예수님의 얼굴이 더이상 보이지 않을 때가 옵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더이상 듣지 못할 때가 옵니다. 우리의 삶에 깊이 간여하시는 그 분의 손길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함을 체험하게 될 때가 옵니다. 주님을 잃어버리고 친척과 이웃들 속에서 주님을 찾으려고 쫓아다니던 마리아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다른 그 어디에서 찾으려고 애쓰고 다니지만 주님을 거기에서 발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가 의당히 함께 동행한다고 생각했지만 주님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렇다고 마리아가 끔찍한 일을 저질렀거나 무슨 더러운 일을 행해서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예수님과의 사이가 끊어진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 바쁜생활과 부주의로 인하여 주님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너무 바쁜생활과 10년 20년 신앙생활하는 가운데 타성에 빠져서 주님의 손길을 놓쳐버리게 됩니다. 우리의 지나온 신앙생활을 이러한 각도에서 한번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세번째 걸음을 돌이켜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마리아의 모습을 통해 생각해 보십시다. 마리아와 요셉은 친척들과 이웃들 가운데서 예수님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마지막 보았던 장소 예수님을 잃어버렸던 장소인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갔습니다. 사람이 가던 길을 돌이켜서 돌아 간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돌이켜서 자기의 인생을 되돌아가기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를 두고 간 장소로 되돌아가서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찾게 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 2:5에 보면 주님은 에베소 교회의 교인들에게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다른 말로 하면 돌아가라는, 발걸음을
돌이키라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잘못된 길을 걸었음을 인정하고 되돌아가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하게 사귀는 생활을 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그 분이 우리의 삶속에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때 그리스도의 삶이 그때보다 더 괴롭고 슬픈 적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계시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분이 내 마음속에 계시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마리아는 하루종일 걸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성전에 앉아 계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는 "아이야, 어찌하여 아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하고 말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요셉의 아들로 착각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자기의 소유화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요. 내가 아버지의 일에 관여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하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야곱의 인생을 잘 알고 계십니다. 야곱은 형의 장자의 특권을 팥죽 한 그릇으로 빼앗았고 눈이 어두운 아버지를 속여서 맏아들에게 가는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형 에서의 미움을 사서 죽게 되어 외삼촌의 집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가다가 날이 저물어 허허벌판에 돌을 베개하고 누웠습니다. 그날 밤에 야곱은 하나님을 거기에서 만났습니다. 야곱과 하나님 사이에 사닥다리가 놓이고 하나님의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하며 하나님의 뜻을 야곱에게 전해주고 야곱의 기도와 소원을 하나님께 전해주었습니다. 야곱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기가 베게했던 돌을 세우고 거기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여 하나님이 여기에 계시는 줄 제가 몰랐습니다. 과연 여기는 하늘의 문이요 하나님의 집이요 거룩한 장소입니다."하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 장소를 벧엘이라고 했습니다. 벧엘은 하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이 하나님께 "하나님 내 가는 곳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나에게 복을 주시면 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릴 것이고 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거기에서 야곱은 놀라운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예수님이 그 안에 탄생하시는 마리아의 체험과 같은 체험을 했습니다.

그는 외삼촌 집에 가서 하는 일마다 성공하고 여러명의 아내와 많은 자식을 낳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가축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는 모든 재산과 가족을 거느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거기서도 잘 살았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잘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야곱에게 디나라는 딸이 있는데 이 딸이 이웃 이방여자들을 보러 나갔다가 그곳의 추장인 세겜으로부터 강산을 당했습니다. 야곱의 집안이 큰 수치를 당한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하몰의 아들인 세겜 추장을 복수해야 한다고 계교를 꾸몄습니다. 세겜을 만나서 "네가 내 동생을 데리고 살려면 조건이 있다. 우리 유대인들은 태어나면 모두 할례를 행하는데 너희는 그렇지 못하니 우리와 사돈이 되려면 너희 모든 남자들은 할례를 해야 된다"라고 했습니다. 이 세겜추장은 디나를 무척 좋아하여 그 여자를 얻고 싶은 욕심에서 모든 남자에게 전부 할례를 행했습니다. 할례를 행하면 일주일을 고통이 있어 제대로 움직이지를 못하는
데 이때 야곱의 아들들이 칼을 들고 가서 고통중에 있는 하몰의 후손들을 전부 죽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성공하며 승리입니까 야곱의 인생의 큰 실패였습니다.

야곱은 지금까지 으례히 하나님은 자기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인 줄 알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하나님을 떠난 인생뿐이었고 집안에는 우상숭배로 가득찼습니다. 야곱은 가슴을 쳤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야곱에서 나타나셔서 "야곱아,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에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할 때에 너에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단을 쌓아라"하고 말씀 하셨습니다. 야곱은 모든 식구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너희들이 섬기던 이방 신상을 다 가지고 오너라. 너희의 모든 옷도 벗어라"하며 지난 날의 더러웠던 인생의 옷을 다 벗고 새 옷을 갈아 입혔습니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러 가노라"하고는 자기의 가정에서 하나님을 떠났던 인생의 보따리를 전부 싸서 벧엘로 올라가는 중에 세겜 근처의 상수리나무 밑에 구덩이를 파고 하나님을 떠났던 삶의 보따리를 그 구덩이에 묻어버리고 처음 하나님을 만났던 장소로 야곱은 모든 식구들을
데리고 올라갔습니다. 그 벧엘에 단을 쌓고 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면의 모든 고을로 하여금 야곱을 두려워 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야곱의 아들을 추격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난 세월동안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망각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성경으로 우리안에 예수님이 탄생하셨던 때가 언제입니까 그런 경험이 지난지가 벌써 몇 년이 되었습니까 어디서 주님을 잃어버렸습니까 이제 그 장소로 되돌아 가십시다. 우리가 주님께 찬송하며 기뻐했던 그때, 하나님의 앞에 엎드려 기도하던 그때,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며 감격했던 그때를 오늘에 되살리십시다. 야곱과 같이 하나님은 의당히 나와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고 살아 왔다가 실상 인생을 돌이켜 보았더니 우상숭배가 가득하고 세상만을 쫓아다녔던 인생의 모든 보따리를 상수리나무 밑에 구덩이를 파고 묻어버리는 결단이 우리들에게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다시 찾아 사귐을 갖기 위하여 새로운 믿음의 각오를 해야 합니다. 가던 길을 멈추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모실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예수와 관계를 맺고 있지만 사귐이 끊어진 관계, 주님의 손길을 잃어버린 삶이 우리들에게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어느 한 순간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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