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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방을 비추는 빛 (눅 02:2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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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은 아들을 낳으면 8일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나신 예수님도 8일되던 날 할례를 행했고 그 이름을 예수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예수라는 이름은 천사가 이미 알려준 이름이었습니다.
그들은 할례식과 명명식을 하는 날이면 가족,친척,친지들이 함께 모여 축하해 주곤 했습니다.그러나 예수님의 경우는 객지였기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 단둘이 그 일을 했을 것입니다.
본문은 성전에서 시므온과 아기예수가 만난 사건을 기록한 것입니다.
먼저 시므온이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는 유대나라의 유명한 율법학자 힐렐의 아들이었고 가말리엘의 아버지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25-27절 사이에 그의 인품이 요약 설명되고 있습니다.그는 최초로 그리스도를 성전에서 만난 사람이 된 것입니다.그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1.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의롭다는 것은 율법을 준수했다는 것이고 경건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겼다는 것입니다.
구약은 이런 사람을 의인이라고 합니다.신약적인 표현을 빌리면 바로 믿고 바로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누가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바로 믿고 바로 사는 사람이라야 순간순간 주를 만나고 주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2.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은 메시야를 이스라엘의 위로로 기다렸습니다.
이사야 41:13을 보면 “여호와가 그 백성을 위로하였은즉 그 고난 당한 자를 긍휼히 여길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66:13을 보면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자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위로라는 말의 뜻 속에는 “곁에”“가까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가장 좋은 위로는 언제나 가장 가까운,곁에 있으면서 위로해 주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 미국에서 목회하시던 친구 목사님이 병원에 입원하신지 석달만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주일 아침 샤워하시고 머리 감으시고 난 후 오늘도 교회 못나가 미안하다며 침대에 다시 눕더라는 것입니다.
오전 11시경부터 숨이 차오른다며 고통하더니 아들 딸 차례로 불러 신앙생활을 당부하고 마지막 숨이 차 말을 못하게 됐을 때 교회,교회…라는 말을 남기며 세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저는 친구의 비보를 듣고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는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도 잊지 못해 하는 목회자와 교회의 관계였습니다.
목회자는 죽어도 교회 생각하다가 죽어야 합니다.
둘째는 사모님의 고독입니다.
남편은 죽으면서도 여보!를 부르지 않고 마지막 순간 교회를 부르며 눈을 감았습니다.
본래 사모님은 남편은 좋지만 목사는 싫다던 분이었는데 한평생 남편 뒷바라지로 청춘을 보냈습니다.지금 얼마나 외롭고 쓸쓸할까 생각했습니다.
셋째는 영원히 곁에 있어 줄 위로자는 주님 뿐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가까운 친구라지만 저는 그분의 장례식에도 못갑니다.내일이 장례식인데 어떻게 갈 수 있겠습니까
아내도 자식도 친구도 교인도 죽음 곁에,내 곁에 영원히 머물러 있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자로 오실 메시아를 대망한 것입니다.영원한 위로자는 영원히 곁에 있어줄 사람인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위로를 찾지 맙시다.

3.성령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었습니다.
25절 끝을 보면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고 했고 26절 끝을 보면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라고 했습니다.또 27절을 보면 “성령의 감동으로”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그위에 계시더라”는 것은 그가 성령을 높이는 겸손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성령위에 군림하면 안됩니다.“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라는 것은 성령께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감동으로”라는 것은 성령안에서 성령과 교제하고 성령과 함께 사는 것은 의미 합니다.
한마디로 그는 성령의 사람이었고 성령 충만해야 그리스도와 교제가 가능합니다.

4.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을 수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얼마나 메시야를 사모했고 대망했는가를 단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신앙은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할 때 깊어지는 법입니다.
물론 그 당시 모든 유대인이 메시야를 대망했습니다.그러나 죽더라도 메시야 오시는 것 보고나서 죽겠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시므온의 심정과 신앙을 아셨습니다.그래서 “너는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지시를 주신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신앙입니까.
살아도 예수,죽어도 예수,살아도 천당,죽어도 천당,우리도 이 신앙으로 살아갑시다.

5.성전에 들어 갔습니다(27)
할례식을 행한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헌아식을 하기 위해 그 부모가 성전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때 시므온도 성전에 들어갔습니다.그리고 거기서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얼마나 감격적 사건이며 순간이었겠습니까.
본문 28절 보면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라고 했습니다.
어떤 가정 주부는 “아들 대학만 들어가면 한이 없겠다”고 했습니다.
어떤 할머니는 “손자 장가가는 것만 보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했습니다.
시므온은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만났고 품에 안을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기를 만난 장소입니다.그곳은 “성전”입니다.
성전은 예수를 만나는 장소입니다.
누가복음 2장을 보면 열두살 때 나사렛 동네에서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 왔다가 그 부모가 예수를 잃어버렸습니다.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런데 성전에서 찾았습니다.성전에 나와야 잃어버린 믿음을 찾습니다.
잃어버린 찬송과 기도와 감사를 찾게 됩니다.
오늘 성전에서 예수를 찾읍시다.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안고 부른 찬송을 생각해 보십시다.6.“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29)
예수 그리스도는 죄에서 죽음에서 고통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분입니다.
평안히 놓아 주신다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평안한 분입니다.믿을수록 평안해 집니다.
그러나 마귀는 가까워질수록 불안합니다.

7.“내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라고 했습니다(30)
예수님이 구원의 주로 오셨고 그리고 마침내 구원을 완성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았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욥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뵈옵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눈으로 본다는 것은 확실성을 의미합니다.
내 믿음은 어떻습니까
남이 하는 말을 듣기만 하는 정도입니까.아니면 내 눈으로 보고 경험합니까

8.이방을 비추는 빛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세가지 선택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땅을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셨고 야곱에게 주신 그 땅은 성지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사람을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이것은 선민의식입니다.
셋째는 할일을(사역)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만 세계 구원의 사역을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시므온은 그리스도는 이방을 비추는 빛이라고 했습니다.
즉 유대인만 비추는 것이 아니고 이방인도 비춘다는 것입니다.
그 덕택에 나도 빛받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주여 내 심령을 비추소서.
주여 내 마음을 비추소서.
주여 내 갈길을 비추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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