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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은 구유에 나셨다 (눅 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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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였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라](7저) 하였습니다. 우리들은 세계의 위인들의 출생지를 보면 모두가 제나름의 유서가 있고 뜻이 있고 인류의 고적이 되어 있으나 베들레헴의 구유 교회는 보다 독특한 사실을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거부하는 편과 환영하는 편이 있었습니다.

거부하는 편으로는 요셉과 마리아를 생각할 있습니다. 마리아가 성령 으로 잉태했을 때 놀랐고 요셉은 당황하여 마리아와 파혼하려 하였습 니다 (막 1:19) 요셉은 의로운 자라는 증언을 받았으며 마리아는 만고 에 없는 성모가 되었습니다만 일시적이나마 예수가 잉태된 것을 거부 하는 편에 섰다고 보겠습니다. 베들레헴의 여관이었습니다. 영리와 순 서만 통하는 사관은 예수를 맞이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가장 적극적이 고 발악적인 사람은 헤롯이었습니다.

이제 주님을 환영한 편은 짐승의 처소인 외양간과 거기 있었던 외양 간과 거기 있었던 구유가 주님을 환영하였습니다. 구유 앞에 목자와 동방 박사가 찾아 왔습니다. 지금은 세계가 환영하고도 대중적 방법으 로 크리스마스를 축하하지만 과연 우리들은 나신 아기 예수를 거부하 는 편인지 진심으로 환영하는 편인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들뜬 크리스마스의 행사 중에서 우리는 고요히 구유에 나신 예수님을 명상하는 시간을 갖기를 바랍니다.

첫째, 겸손하게 나신 주님을 묵상합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은 천하고 낮은 구유에 나신 것입니다. 동방 의 박사들은 나신 주님을 찾으려 헤롯 궁전을 먼저 찾아갔습니다. 그 곳이 주님이 나시기에 적절하다고 생각했기에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헤롯의 왕궁이 아니고 베들레헴 구유에서 나셨습니다. 그것은 극단의 겸손이었습니다.

빌립보서 2장 6절에서 8절에 주님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 가 사람의 모양으로 나나신 것은 겸손이었나]고 합니다. 더구나 사람 이 되신 주님께서 사람의 집도 아닌 짐승의 처소에서 나신 것은 겸손 의 주시요 너무나 황송한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교의 석가는 왕자로 태어났으며 공자는 상류의 가정에서 태어났습 니다. 괴테나 세익스피어등 위인들의 생가도 아름답게 보존되고 있습 니다.

그런데 하나님의아들 주님 베들레헴 외양간에서 나신 것은 지극히 겸 손하신 생애를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대 헬라철학은 세상을 악하 고 더러운 것으로 취급했습니다. 필로의 로고스설에 의하면 세상은 악 하고 더러운 것으로 취급했습니다. 필로의 로고스설에 의하면 세상은 악하고 더러워 하나님의 손이 닿을 수 없기 때문에 로고스를 통하여 만유를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도 세상은 한갖 [춤추는 그늘] 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 러나 하나님의 아들은 세상에 오셨는데 가장 낮고 천한 구유에 누워 계셨습니다. 톨스토이는 [참된 예술은 어진 아내처럼 자신을 장식하려 하지 않는다. 거짓 예술이 창녀처럼 화려하게 단장하는 법이다]고 말

하였습니다. 속이 비어 있는 사람. 진실치 못한 사람일수록 외적으로 과장하고 장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진실한 사람은 겸손하고, 겸손한 사람은 자신을 장식하려 하 지 않습니다. 구유에 나신 주님은 가장 소박하고 가장 겸손한 인간상 을 보인 것입니다. 구유에 나신 주님은 스스로 겸손하실 뿐더러 겸손 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부유한 가정에 태어나 어려움없이 호사로이 자란 사람은 인생의 깊은 뜻을 배우지 못하고 어려울 때 거 기에 대항할 힘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려운 가정에서 많은 고난 을 겪으면서 자란 사람은 첫째 겸손을 배우게 되며, 둘째 굴하지 않는 투지를 기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유에 나신 주님의 철저한 겸손의 미덕을 배우고 진실한 인간상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들은 겸손한 마음 으로 구유에서 탄생하신 주님을 맞이하여야 하겠습니다. 모든 사람은 모든 종류의 교만과 현세의 자랑을 버리고 구유에서 나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되겠습니다.

둘째, 만인을 구속하시려 오신 주님을 묵상합니다. 주님의 겸손은 타락하여 비참한 자리에 떨어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 한 것입니다. 탕자처럼 인생의 시궁창에 빠진 인간을 건지려고 그 자 신이 인생의 가장 낮은 곳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유대인 왕으로 묘사한 마태는 동방의 박사가 헤롯 왕을 찾아간 일과 헤롯이 성탄에 관련하여 범과한 일을 특별히 기록하고 있 습니다. 그리스도를 헬라 철학적인 표현인 로고스로 육신이 되어(요 1:14)라는 성육신의 교리로 탄생의 이야기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그리 스도를 사랑으로 표시한 누가는 선민 목자들의 내방을 먼저 소개하고 구유에 나신 것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종으로 표현한 마가는 성탄의 이야기와 그의 족보를 생략했습니다. 하여튼 인간을 구속하시 려고 오신 주님은 철저한 인간 체험을 하셨습니다. 로마서 5장에서 바 울은 이 사실을 아담의 불순종으로 모든 인간이 사망에 이르고 한사람 주님의 순종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었다는 것은 불순종은 교 만이요 순종은 겸손을 뜻합니다.

셋째, 새 인간 역사를 시작하려 오신 주님을 묵상합시다. 주님의 오심으로 인류의 역사는 일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이 역사는 바로 베들레헴 구유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교회론에서 만울 위에 교회가 있고 교회의 머리가 주님이시란 삼단계 의 세계관을 보이며 하나님의 충만이 주님으로 교회에 임하고 다시 교 회에서 넘쳐 만물에 미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엡 1:22-23) 분명히 주 님이 오심으로 세계에는 변화하였습니다.

현 세계의 정치 교육,문화,예술 군사 등 어느 분야이든 주님의 영향 을 받지는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인간 구원시에 는 더 말할 필요도 없는 것습니다. 구약의 히브리 역사는 주님의 오심 을 위한 준비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님의 탄생으로 인류 구원은 실현 되고 그 후의 기독교의 역사는 주님의 구원의 진행상을 그린 것이었습 니다.

같은 베들레헴에서 그 옛날 이새의 막둥이 다윗이 나던 날은 이스라 엘의 중흥사가 시작된 날이었습니다.

18세기말 덴마크의 우드비촌에서 그룬트비가 나던 날은 덴마크의 정

신혁명이 시작된 날이었습니다. 우리는 같은 말을 세계사에 이름을 남 긴 위인들에게 모두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위인들의 영향은 국부적이고 시대적이나 주님의 나신 날 은 세계사를 근본적으로 새 방향으로 전환시킨 날이었습니다. 실로 너 무나 위대하여 형용하기도 어려운 일입니다.

초로한 외양간 구유에서 이루어진 이 위대한 사실과 교훈에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금년에도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이 구유에 나신 주님을 고요히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겸손하게 오신 주님을 묵상하며 인간을 구속하시고 만물을 갱생시키려 오신 주님을 묵상하며 그 구유에서 시작된 새 인간 역사를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구세군 창설자 부스대장이 임종시 [장차 주님이 없는 기독교, 중생 없는 구원, 주님이 없는 성서, 그리고 회개없는 용서를 논할 때가 올 것이다] 한 것은 현재가 바로 그때입니다. 적어도 성탄의 경우 [주님 없는 크리스마스]를 볼 수 있습니다. 주님없는 성탄은 빈 구유처럼 초 라하고 무의미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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