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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목자들에게 들려 온 소식 (눅 02:8-20)

첨부 1


I. 원문비평

이 토막(pericope)에서는 세 가지만 문제삼기로 한다.

가. 2:9에 있어서 (1)어떤 사본들은 kai(그리고)라는 접속사가 서두에 나오고 (2)어떤 사본들은 kai idou(그리고,보라,)로 시작한다. (3) 그리고 어떤 고대 역본들에는 그 어느 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 말 번역에는 "그리고"라는 말을 넣지 않아도 말이 통하기 때문에 문제가 아니다. 짧은 reading이 긴 reading보다 낫다는 원문비평의 기본 원칙으로 보나 (1)을 지지하는 사본들( B L W 565 579 700 1241)과 고대 역본들과 교부들의 증언들이 권위가 있기에 그것이 원본이었으리라고 추정된다. 그러나 상당히 일찍부터 idou를 넣어서 읽어 왔고 그런 종류의 사본(Α Β Δ Θ Ψ등)이 많이 남아 있다. 주의 천사가 나타난 사건을 좀 더 극적으로 묘사하기 위해서 사서자(寫書者)나 해석자가 감정을 넣으며 idou를 삽입한 듯하다.

나. 2:11에 있는 "그리스도 주"가 사본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변한 것을 볼 수 있다. 크게 네 가지 종류로 분류된다. (1)Xristos kurios 혹은 Kuri os Xristos (2) Xrisistos kuriou (3) Xristos 'Insous 혹은 Xristos 'Insous ku-rios (4) Xristos soter.

(2),(3),(4)를 지지하는 사본들은 많지 않을 뿐 아니라 권위도 별로 없어서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1)을 지지하는 사본이나 역본 그리고 교부들의 인용구가 압도적이어서 그것이 원본이었음을 십분 시사해 준다.

다. 2:14의 천사의 말 가운데 원문비평적 문제가 있다. 크게 세 가지 종류로 분류된다. (1)en anthropois eukokisa,(2) en anthpopois eudokia,(3) kai en anthpopois eukokia. (3)은 무시해도 상관없지만 (1)과 (2)는 물의를 일으킬 만한 소지를 가지고 있다. 문법적 고찰을 할 때 거론되겠지만 (2)를 지지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1)를 지지하는 사본들이 압도적인 권위를 가진 것들이어서 그것을 원본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Ⅱ. 문법적 고찰

< 8절 >

"그 지경에"(개역)와 "그 지역의"(표준새번역)의 "그"는 지시대명사나 관사가 아니라, 영어로 말하자면 the same에 해당하는 것으로서(te aute) 2:1-8에서 언급한 바로 그 베들레헴 지역을 명확히 지시하려는 것이다. 개역에는 동사가 하나만 나타나있다. 즉 "지킨다"는 동사뿐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동사가 두 개 나타나 있다. 하나는 "야영을 한다"(akpaulountes )는 동사요 다른 하나는 "보초를 선다", "야경을 한다"(thulassontes)는 동사다. 즉 목자들이 노숙을 하면서 자기들의 양을 위하여 불침번을 서고 있었다는 말이다. 여기서 "지킨다"는 동사는 양을 목적어로 하는 것이 아니고 thulakais를 목적어(cognate object)로 하고 있어서 양을 위하여 "quard를 선다",혹은 "불침번을 선다"는 뜻이다.

< 9절 >

"주의 천사"(aggeols kupiou)는 an angel 즉 "한 천사"로서 1:26에 나온 가브리엘은 아닌 어떤 천사인 것 같다. 우리 말의 "천사"(天使)는 하늘 천(天) 자가 붙어 있어서 의례 하늘을 나는 날개 돋은 존재를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aggelos(angel)는 하늘이라는 개념이 반드시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유형 또는 무형의 존재로서 하나님의 부림을 받는 자를 일컫는 것이다. 예컨대 구약성경의 말라기라는 선지자는 사람이면서 my angel이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는가

< 10절 >

"보라"(idou)를 표준새번역에서는 빼었는데,천사의 전언(傳言)이 설득력과 박력이 있는 것으로 들리기 위해서는 그것이 번역되어 나타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한 후에 그 이유를 제시하는 마당에 "자,보시오!"하면서 내용을 진술한 것이 아닌가

< 11절 >

원문에서는 oti(for, because)라는 접속사를 가지고, 10절에서 말한 "큰 기쁨"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11절과 연결시킨다. 즉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 곧 그리스도 주님이 나셨기 때문이다"라고 그 "큰 기쁨"의 이유를 밝힌다.

< 12절 >

개역 성경에는 "너희가 가서"라는 말이 있는데 원문에는 없는 것을 첨가한 것이다.

< 14절 >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 중에"는 en anthropois eudokias의 번역인 바, 사본에는 eudokia라는 주격이 나옴으로 번역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즉 후자의 경우에는 KJV에서처럼 good will toward men(사람들에게 총애가 있을찌어다)이라는 뜻이 될 것이다. 그러나 원문비평을 통하여 전자가 원본이라는 것을 안 이상 달리 해석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속격 명사로 나온 eudokias를 그냥 명사로 처리해서는 해석이 곤란하기 때문에 동사로 풀어서 쓸 수밖에 없다. 명사로 쓴다면 among men of good will이 될 것이다. 그것은 의미가 모호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라고 풀어야만 했다.

< 15절 >

"하늘로 올라가니"의 apelthon은 상하관계로 움직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떠나가 버렸다는 뜻이기 때문에 "하늘로 사라진 후에"라고 해야 더 정확할 것 같다. "서로 말하되"(elaloun pros allelous)의 elaloun은 미완료 직설법으로서 반복 또는 계속의 동작을 의미한다. 천사의 놀라운 전언(傳言)을 들은 목자들은 서로 할 말이 많았을 것이다. "가서"(dielthoeen)는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목적지를 향하여 한눈팔지 않고 곧장 간다는 말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글 개역에는 de라는 불변사를 "이제"라는 말로 살렸다. 표준새번역은 그것을 무시해버렸다. "가자"라는 권고의 말을 독촉하는 "자, 어서" 정도의 의미를 나타내는 말일 것이다. "이루어진 일"보다는 표준새번역의 "일어난 그 일"이 원어의 뜻에(to rema touto to gegovos)가깝다.

< 16절 >

"찾아서"(aneuran)는 수소문하여 마침내 찾아낸 것을 가리킨다.

< 19절 >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suneterei...sumballousa en te kardia)의 주동사는 미완료 직설법이요 분사는 현재 시상으로서,둘 다 계속적인 동작을 의미한다.

Ⅲ. 문학적편집사적 고찰

이 토막은 누가의 특수자료(L/S) 중의 하나로서 누가만이 취급한 이야기이다. 누가복음의 약 25%(약 520절)가 그의 특수자료에 속하는 것으로서 세례 요한과 예수의 탄생 기사,비유,그리고 예수의 부활 사화들이 거기에 속한다. 누가는 그의 서론(1:1-4)에서 밝힌 대로, 많은 사람이 이미 예수에 대한 글을 썼지만 자기는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폈고"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 하에 그의 복음을 썼다는 것이다. 그때 이미 마가복음이 널리 읽혀졌을 것이고 소위 Q라는 예수 어록등 구전 자료와 성문 자료들이 있었지만 누가가 오랫동안 수집한 자료와 그 나름으로 기도하며 생각하며 깨달은 바하고는 거리가 있어서 새롭게 복음을 쓰기로 결정한 것 같다.

누가는 바울을 수행하면서 바울에게서 많은 것을 듣고 배웠을 것이다. 예수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많은 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를 구주로 믿는 진실한 신도라면 예수를 좀 더 자세히,철저히 알고자 하는 마음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누가에게 있어서 바울 사도의 가이사랴 감금(監禁)시기 2년간은 매우 유용한 기회였을 것이다. 예수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을 것이니까. 누가복음의 특수자료는 아마도 대개가 그 기회에 수집된 것들일 것이다.

누가가 누가복음-사도행전이라는 대작(大作)을 쓰기로 마음먹은 것은 물론 하나님의 감동이 있었기 때문이겠지만 그 나름의 결단과 각성과 사명감을 가지고 했을 것이다. 교회의 거성으로 알려졌던 사도 베드로가 순교한 것도, 그리고 그가 존경하고 따르던 바울이 떠나간지도 이미 오랬다. A.D.70년에 유대전쟁은 로마제국의 승리로 끝나버림으로써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은 허탈에 빠져있었을 것이다. 예수 재림을 그토록 고대하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회의가 일 수 밖에 없는 때였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도대체 예수가 누구인가 예수를 어떻게 믿어야 하는 것인가 등등의 질문에 대해서 대답을 줄만한 재료가 충분치 않았다. 그 당시 유포되던 구전이나 문서들로써는 신자들의 흔들리는 마음에 만족을 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선교의 사명을 누구보다도 열렬히 가지고 있는 누가로서 복음이 효과적으로 땅끝까지 빨리 전파되어 만민이 구원의 혜택을 입도록 하는 방도가 무엇일까를 생각했을 것이다. 누가 자신도 이미 늙었고,이제 그가 그 목적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오래 동안 수집해온 자료들을 잘 엮어서 세계를 위한 복음을 쓰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1) 그는 우선 그때까지의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느끼는 대로, 복음에 대하여 로마인들이 가지는 거부감 내지는 반감을 제거하여 복음이 보다 활발하게 전파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복음의 무해성(無害性),나아가서는 유익성을 보여주려고 생각한 것 같다.

(2) 그는 기독교 복음이 유대인의 것이나 어떤 제한된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세계 만민의 것이고 예수는 만민의 구주이심을 보여 주려고 한 것이다. 하나님의 구속사는 구약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신약시대를 거쳐 역사의 마지막까지 연속된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하고 있다.

(3) 구주이신 예수는 헬라인들의 이원론적 사고대로 영혼의 구주만 되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 구주요 온 역사의 구주이심을 보여주려고 노력하였다. 인간 개개인은 물론 인간사회의 모든 부조리와 구조악으로부터의 구원을 목적하고 오신 예수를 소개하려고 노력하였다. 예수는 인간 육체의 모든 질병을 치유하고 병으로부터 구출하시는 분이셨다. 빈부의 차이,민족의 차이,성의 차이,직업의 차이,계급의 차이 등으로부터 오는 모든 해와 악으로부터 인간을 구출하려 오신 예수를 소개하려고 시도했다.

(4) 복음의 사건은 하나님의 능력과 솔선적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며,성자 예수의 내림과 사역,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성취하시는 우주적 사건임을 보여주고 있다. 즉 구속의 사건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사건이며 사람은 그의 은총에 보답하기 위하여 기도로 응답하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그가 위탁하신 선행과 선교에 정진해야 할 것을 종용하고 있다.

누가는 대략 이상과 같은 사상적 맥락에서 (1) 1:1-4의 서론으로 시작하고,1:5-2:52에서 세례 요한과 예수의 탄생 기사를 취급하고 나서 3:1-9:50에서 예수의 갈릴리 사역을 서술한다. (2) 둘째 단원은 9:51-19:27인 바 그것은 예수가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여행 기간에 하신 일과 말씀을 취급하였다. (3)끝으로 19:28-24:53은 예수의 예루살렘 사역을 다루었다.

2:8-20에서 누가는 다른 복음이 소개하지 않는 특수한 자료를 가지고 구주이신 예수의 출생을 그 나름의 의도와 목적에 부합하도록 위치를 설정하고 묘사한다. (1)예수는 틀림없는 역사적 인물이었고,영지주의자들이나 이방 신비종교들이 말하는 가현적 존재가 아님을 보이려고 생생하게 탄생의 날 광경을 묘사한다. (2) 그러면서도 예수의 탄생은 시공(時空)계의 사건만이 아니고 초월적 존재 즉 하나님의 역사 개입의 사건임을 보여 주고 있다. 주의 천사의 나타남과 그의 선포의 내용과 지시,그리고 그 지시의 사실적 증명을 통해서 그 탄생의 초자연성을 말하려고 했다. (3) 천사의 말을 통해서 예수의 구원의 보편성을 말하고 특히 소외된 계층에게 실제로 구주로 찾아 오셨음을 나타내려고 했다. 누가복음에는 특히 압박 받는 자들과 소외된 자들에 대한 예수의 관심과 주목이 두드러지게 취급되어 있는데 (1:46-55 ; 3:10-14 ; 4:16-21 ; 14:12-14 ; 21), 이 토막에서는 그 시대에 멸시받고 소외된 목동들을 누구보다도 먼저 찾아와 복음을 들려 준 하나님의 천사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이 토막은 아마도 누가가 예수 탄생의 날 현장에서 천사의 고지(告知)를 직접들은 사람들을 찾아가서 취재한 내용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게도 생생하고 역력하게 현장을 묘사한 것으로 보아 수십년간 구전으로 떠돈 이야기로 보기는 어렵다. 누가의 풍부한 문학적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그래도 사실을 여실히 전해 들은 사람의 표현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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