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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쁨을 일으키는 주님의 승천(2) (눅 24:4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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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주해

본문 눅 24:44-53의 말씀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44-49와 50-53의 말씀이다. 44-49의 말씀은 부활과 승천사이에 그리스도가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의 압축된 내용인데, 그 시기가 부활절인지, 혹은 그 후의 어느 때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이 성에 머물어 있으라는 49절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주워진 것이 거의 확실하다. 50-53절은 승천 사실과 누가복음의 마무리를 찾고 있는 것이다.

< 44절 >

그리고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에이펜 데 프로스 아우토스] V/Eipen de. pro.j auvtou,j). 확실한 날짜나 시간은 분명히 할 수 없으나 43절과 44절의 다른 상황과 분위기를 연결하고 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한 이 나의 말들은 [후토이 호이 로고이]-/Outoi oi` lo,goi.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사건을 해석하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전에 제자들에게 여러 번 이 말씀을 하셨다(눅 9:22,44; 17:25; 18:31-33 참조).

너희와 함께 있을 때는[에피 온 쉰 휘민] e;ti w'n su.n u`mi/n). 십자가 죽음이전의 시기에 제자들과 만났을 때를 말하며, 본문에 가까이 있지만 26절의 엠마오 제자들에게 나타난 사건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엠마오사건은 그 제자에게 나타나셨지만, 예수님은 제자들 모두가 참석했을 때 말씀하신 경우가 여러 번 있는 것이다(18:31-33).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 위와 같이 구약성경을 3등분하여 명확히 기록된 것은 신약성경 중에서 오직 여기 뿐이다. 외경 집회서 서문에 우리는 구약성경을 3등분하여 기록한 것을 볼 수 있다. 서문 안에 3번이나 약간 다른 형식을 취하여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있는데, 이것을 통하여 우리는 보통 구약성서를 율법, 선지서, 성문서로 3분하는 것을 알 수 있다. 1)율법서와 예언서와 그 뒤를 이은 후대의 저서들. 2)율법서와 예언서와 우리 조상들이 남긴 다른 저서들. 3)율법서와 예언서와 그 외 다른 저서들. 그 외 우리는 신약성서를 통해서 율법과 선지자 (눅16:16, 마12:12) 모세와 선지자들 (눅 16:29,31,24:27).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롬 28:23)로 구분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가는 특히 성문서 중에서 시편을 말하고 있다. 유대 성경 구분에서 시편은 가장 잘 알려지고 영향력 있는 책이다. 더 나아가서 시편은 메시아에 관한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 수난에 관한 시편은 22,69편이고, 부활 시편은 2, 16,110편 등이다. 그래서 누가는 성문서 중에서 시편을 택하여 기록하고 있다.

< 45절 >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눅24:31말씀과 유사한 내용으로, 요 20:22의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를 참고하여 이해할 수 있다.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는 것은 성령의 선물이라고 누가는 강조하고 있다.

< 46절 >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3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날 것과는 기록된 내용([그라파스] grafaj)과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카이 에이펜 아우토스] kai. ei=pen auvtoi/j)의 관계를 알 수 있다. 그리스도가 기록된 내용을 최종적으로 선명하게 정리해서 다른 기회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내용을 누가는 적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호티] o[ti 의 의미를 원인을 나타내는 접속사로 볼 수 없고, 간접화법상의 의미를 가진 접속사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구약에 흐르는 예언이었다. 십자가의 고난은 구약의 모든 성경이 기대했던 것이며,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분이었다. 그 사건은 지상의 오직 한 장소에서만 일어났던 사건으로 그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환영이나 환각 Phantom or Hallu cination 이 아니었다. 그는 실제였으며, 죽으신 예수님은 다시 사신 그리스도였다. 기독교는 잘못된 인간 마음 상태의 꿈이 아니며, 열광 속에 보여지는 환상이 아니라 죽음을 대결하여 싸워 이기시고, 다시 사신 예수님께 근거하는 것이다.

< 47절 >

그의 이름으로 ([에피 토 오노마티 아우톤] evpi. tw/ ovno,mati auvtou). 그의 이름이 의미하는 모든 것을 근거해서 라는 뜻이며, 회개를 일으키는 메시아의 권능을 의미한다. [에피 토 오노마티] evpi. tw/ ovno,mati는 누가문서에 여러 번 사용된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눅 9:48, 21:8, 행4:17,18, 5:28,40,등 참조). [메타노이안 에이스 아페신 하마르티온] meta,noian eivj a;fesin a`martiw/n 의 [에이스] eivj(P75, B, Boh. Syr.)는 후대에서 [카이] kaiv(ACDNX등)로 쓰여지고 있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성서적 필연성이 수립되었고, 이제는 새로운 면이 첨가되어, 복음의 선교 역시 성서예언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고 예수님 자신이 해석하고 있다. 회개의 선언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어야 한다고 예언되었다는 것이 누가의 훌륭한 견해이다. 마태는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했고(마28:19), 누가는 예수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있으라 했다. 회개와 세례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으로, 마태는 회개의 외적 상징으로 회개를 말했다. 구원의 복음이 모든 족속에게 전파되고 만방이 하나님께 돌아오리라는 것은 이미 구약에 예언된 것이었다(시110:2, 사 2:1-9, 미 4:1등 참조). 누가는 확실한 부활의 목격자인 예루살렘 유대인들로부터 복음전파가 시작됨을 말함으로 역사가다운 그의 면모를 엿보게 한다.

< 48절 >

너희는 이것들의 증인들이다. 그러나 구원의 사실들을 증언할 사람들이 그 메세지를 성령의 권능을 입어 나가 전하게 된 때에만 성서가 성취될 수 있다. 처음부터 주님을 따랐고, 가르침을 받고 부활의 그리스도를 보고 믿게 된 제자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 거기서부터 이룩되는 죄사함의 은총과 영생을 전파할 책임이 있다고 예수님은 그들을 증인들로 임명하고 있다. 주님은 지금 그것을 일깨워 주고 계신 것이다.

< 49절 >

그리고 보라 내가 너희들에게 나의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보내리니 ([카이 [이두] 에고 아포스텔로 텐 에팡겔리안 투 파트로스 무 에피 휘마스] kai. ivdou. evgw. avposte,llw th.n evpaggeli,an tou/ patro,j mou evfV u`maj). [에고] evgw 가 앞에 있는 [휘메이스] u`mei/j 와 균형을 이루는 것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다. 즉 48절에서 나는 너희의 몫을 너희에게 말했고, 49절에서 나는 나의 몫을 말한다는 것이다. [이두] ivdou 는 여러 사본에 빠져있다 ( DL, Latt, Boh. 등). [아포스텔로] avposte,llw 는 미래적 현재형 동사로 확실하게 속히 보낼 것을 의미한다. [에팡겔리아] evpaggeli,a 는 흔히 성령과 함께 사용되며, 행 1:4-5에는 "너희가 나로부터 들은 약속"으로 묘사되고 있다. 성령을 주시리라는 약속은 구약 때부터 약속된 것이며(요엘 2:28-29), 신약에서도 세례요한이 말했고( 눅 3:16). 예수님 자신도 말씀하셨다(요14:16-17, 26, 등 참조) 그리고 이제 승천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이 언약을 다짐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위로부터 능력을 옷 입히울때까지 그 성에 머물러 있으라. 사도행전 1:4의 말씀과 전적으로 일치하는 것으로 제자들의 증언자로서 자격을 확실히 하기 위한 것이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사실을 경험한 체험자로서 그 위에 성령의 증인을 더 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신명기 19:15의 두 증인이어야만 증언이 효력이 있다는 말씀에 근거한 것으로 그리스도의 증거에 예루살렘에서 체험자인 제자들과 예루살렘에 임할 성령의 증인을 확보하자는 역사가로서 누가의 두 증인 신념에 기초한 것이다. 공관 복음서의 다른 기자들은 모두 복음서의 끝을 예수님의 대 지상명령에 두고, 복음 전파의 분부로 장식하고, 갈릴리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반해(마 28:19-20, 막 16:15-18) 누가는 오히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기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는 명령은 누가의 성령이라는 증인 확보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증거자로서 제자들의 자격과, 이들이 증거해야 할 복음의 중요성을 누가는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늘의 능력([뒤나미스] du,namij). 성령의 능력의 받지 못하고는 증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입히운다'([엔쉬세스테] evnsu,shsqe)는 옷 입는 것을 의미하며, 사도 바울의 표현과 같이(롬13:12) 성령의 권능을 상징하는 빛의 갑옷을 입는 것과 같은 표현인 것이다.

< 50절 >

그리고 그는 그들을 베다니까지 인도하시고. 공관복음서중 누가의 기록에만 나타나는 것으로 유일하게 승천의 장소를 구체적으로 밝혀 주고 있다. 즉 주님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감람산(행1:12)의 동쪽 기슭에 위치한 베다니 앞까지 제자들을 이끌고 가신 후 그 곳에서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승천하신 것이다.

그의 손을 들어 축복하셨다. 승천하시기 전 예수님은 제자들을 축복해 주셨다. 이제 복음전파의 사역을 감당하게 될 제자들을 위하여 주님은 하늘로부터 내릴 은혜를 받을 때까지 힘을 얻게 하고, 또 그들로 인하여 구원에 참여하게 될 모든 이들을 위하여 축도해주신 것이다.

< 51절 >

그들을 떠나가셨다 ([디에스테 아포 아우톤] die,sth avpV auvtw/n). [디에스테] die,sth 는 신약성서에 누가문서에만 나오는 독특한 동사이다 (눅22:59, 행 22:28). 이 동사의 의미는 다소간의 논란이 있을지라도 승천을 의미하는 것이다. [디에스테] die,sth 가 예수님의 부활 후의 현현시와같이 단순한 '떠나감'을 의미할 수도 있으나 누가는 이 동사를 사용함으로 사도행전의 승천사실을 의도적으로 강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최소한 이 동사는 마지막 떠남을 의미하는 것이다. 50절 말씀은 이 마지막 떠남에 대한 예비적인 설명이며, 52절과 53절은 그와 같은 마지막 떠남에 대한 결과적인 설명인 것이다. 괄호 안의 '하늘로 올라가셨다'([카이 아네페레토 에이스 톤 우라논] kai. avnefe,reto eivj to.n ouvrano,n)는 어느 사본 (D등)에는 없는 구절이나, 없는 구절이나, 이 문구가 없다고 해서 주님의 승천에 대한 기록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 구절이 생략되면 단순하게 '그들을 떠나 가셨다'로 된다.

주님이 축복하실 때 떠나가시고, 하늘로 올라가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나님의 보호아래 있기 전에는 떠나가시지 아니 하셨다. 누가는 이러한 떠남을 가끔 초자연적인 것으로 묘사하는 것을 본다 (눅1:38, 2:15, 9:33, 24:31, 행 10:7, 12:10 참조). 이것은 이방 사람이나 유대사람 가운데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주제이다. 누가는 '그가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 가셨다' 라는 표현을 함으로 예수님의 승천에 대한 전형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사본에 의해서 증거되는 것이며 행 1:2에서도 다시 반복되고 있다.

주님은 제자들을 축복하시면서 떠나가셨다. 이러한 축복의 행위는 대제사장의 모습이다. 대제사장으로서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을 떠나시기 전에 하나님의 보호 아래 두시는 것이다.(마28:20 참조.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누가복음이 제사장 사가의 사역으로 시작하는 것과 똑 같이, 끝마무리도 무리에게 제사장으로 사역하시는 예수님으로 결론짓고 있다.

< 52절 >

그들이 그를 경배한 후에 [카이 아우토이 프로스퀴네산테스 아우톤] kai. auvtoi. proskunh,santej auvto.n. D사본 등에는 기록되지 아니한 것으로 개역성경에는 괄호 안에 있다. 여기서 처음으로 누가는 예수를 예배의 ([프로스퀴네오] proskune,w)대상으로 언급하고 있다. 누가는 여기까지 이 용어를 보류해온 것이다 (눅4:7,

8. 막 5:6, 15:19, 마태는 자주 사용한다) 누가는 사람들이 부활이전에는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하지 아니한 것으로 이해한 것같다. 제자들은 이제 더 이상 부활에 대한 의심을 가지지 아니했다. 그들에게 있어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인간적인 스승이 아니었다. 이제 제자들은 승천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고 그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주의 왕이시며,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별히 여기서 경배한다([프로스퀴네오] proskune,w)는 말은 '예배한다'는 의미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예배했음을 의미한다.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실의에 빠져 슬픈 기색을 띠며(눅24:17) 두려워하던 제자들은 이제 큰 기쁨으로 가득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여기서도 누가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데 예수님의 탄생과 그의 승천이 기쁨을 안겨다주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왜 제자들이 그렇게 기뻐하고 감사한 것이 정당한가 우리는 단지 추측할 수밖에 없고, 추측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큰 기쁨의 원인은 1) 성령의 약속된 선물 때문일 수 있으며 2) 주님의 가르침과 축복 3) 예수님의 구원 사역의 승리의 보증으로 영광스럽게 아버지께 올라감 4) 주님의 승천으로 제자들의 믿음과 소망이 확고하게 됨 5) 주님이 하나님과 함께 하심으로 그의 약속성취의 보증이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 53절 >

그들은 모두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성전 안에 있었다. 본 누가복음을 끝맺는 구절이다. 그러나 본 절은 글을 끝맺는 느낌보다는 시작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것은 사도행전을 염두에 둔 누가의 의도가 반영된 까닭이다. 제자들은 더이상 두려움에 떨며 숨어 있지 아니하고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부활하여 승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심어준 놀라운 변화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5. 메세지

아, 지상에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만큼 큰 사건은 없는 것이다. 이것은 구약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주님의 권위와 신실성을 믿어 의심치 아니하게 한다. 부활하신 주님은 승천하셨다. 주님은 제자들을 떠나 승천하셨지만, 제자들을 축복하시고 성령의 권능으로 입히우기 전에는 떠나가시지 아니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과 깊은 배려를 깨달을 수 있다.
초대교회의 제자들이 주님의 사랑 가운데서 선택되어 엄선된 자들이라면 오늘날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모든 사역자와 성도도 주님의 깊은 은총 가운데서 선택된 자들이다. 승천을 목격하고 돌아온 제자들이 큰 기쁨 가운데서 그들 성전에서 찬송한 것 같이 오늘도 증인으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 위에 성전에서 함께 모여 기쁨의 찬송생활이 영위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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