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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축복 (마 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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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정의로운 삶 보다는 안락한 삶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집니다. 그리고 정의를 지키기 위한 투쟁 보다는 자신의 배부름에 더 많은 투쟁을 허락합니다. 그리고 정의를 위해 사는 사람들을 우리는 피곤하게 생각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정의롭지 않기 때문에 정의가 힘을 잃어 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고 삽니다. 그러다 상실된 정의로 인해 자신이 피해를 입게 되면 비로서 우리는 비극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너무 깨끗한 물에는 고기가 살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치 않습니다. 물고기가 살지 못하는 것은 물이 깨끗해서가 아니라 먹이가 없어서인 것입니다. 오히려 깨끗한 물은 우리에게 생명을 줍니다. 정의는 가치있는 것으로 존중되는 삶이 우리 현실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요구인 것입니다. 문제는 과연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정의에 대해 사모하며 댓가를 지불 하기를 즐거워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정한 복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지고 계셨는지 확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 질문이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는 “의”의 내용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주리고 목마른”이 의미하는 성격이며 끝으로 하나는 “배부를”것 이라는 축복의 성격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인생관을 다시한번 확인 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Ⅰ.성경에서 말하는 “의”의 성격 우리가 말하는 정의의 개념은 인간의 복지와 관계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상적인 용어로는 “상식”이라는 말이 가장 “정의로움”에 접근한 표현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정의”는 단순히 인간과 인간과의 삶의 법칙만을 가르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정의”는 하나님과 관계로 부터 시작되는데 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인이기에 인간으로부터 정의가 시작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정의”는 바로 하나님의 성품이며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당시에 헬라인들에게 이 정의의 일상적인 표현은 분배적 개념에서 사용되었던 언어 였습니다. 즉 마땅히 주어야 할 것을 할당한다는 개념이었습니다. 이것은 도덕적 성격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의미가 더욱 발전된 도덕성으로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 못한 것은 모두 불의로 정의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의”는 바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며 그리움이며 소망인 것입니다. 이 “의”에 대해 “주리고 목마른 자”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Ⅱ.“주리고 목마른 자”의 성격 주리다라는 ‘페이나오’라는 헬라어는 우리말로 “무엇인가를 탐욕스럽게 바라다”라는 뜻으로 번역이 됩니다.

그리고 목마르다는 ‘딥사오’라는 동사는 “영적 선에 대한 열렬한 갈구”의 비유적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말을 풀어 보면 충족되지 않은 현실로 인해 극단적인 절망에 빠져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다시말해 해결이 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는 말인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의”에 대한 이러한 욕구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시키지 못하는 안타까움으로 자신의 삶을 행복해 할 수 없는 강력한 갈증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말에는 익숙하지만 정의라는 말에는 별로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용서에 대해서는 의심없이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정의로움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의 인생에 가치관은 어떻습니까 진정으로 하나님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오히려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부담스러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까 우리는 이제 배부름의 축복에 대하여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Ⅲ.“배부름”의 축복 주리고 목마름은 현실적 표현이며 배부름의 축복은 미래적인 표현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배부름의 느낌은 배고픈자만이 누릴 수 있는 포만감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환상이나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이루어질 역사며 다가올 현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의 어떠한 유혹이나 핍박앞에 우리의 신앙을 양보하거나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신앙의 비밀이 있는 것이며 성숙의 현실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인생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이 과연 이 땅에서 언제까지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기에 확실한 답변을 할 수 있습니까 결코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어디까지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불확실한 현실에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하게 현실을 살아가는 이유는 신앙의 지식 때문일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 말씀의 믿음 때문인 것입니다. 여기서 언급된 “배부름”은 미래에 만족될 우리의 현실인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의 완성이기도 합니다. 이 사실을 믿는자는 지금 충족되지 못했다고 우리의 소망을 포기하는 어리석음으로 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현실은 “정의로움”이 상실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을 아주 쉽게 합니다.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야한다’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정의를 말하는 것이며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정의가 상실된 사랑은 이기며 허구입니다. 정의로움이 빠진 사랑은 감상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책임도 감격도 구체적인 희생의 기쁨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인됨의 가치는 말씀속에 순종하는 삶의 기쁨에 있다고 서슴없이 말합니다.

과연 옳은 말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삶속에 얼마나 이러한 현실이 나타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의 불신앙과 불순종에 대해 관대해서는 않될 것입니다. 우리마저 진정한 신앙이 상실된다면 이 세상은 더 이상 존재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모두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가 있으며 또 그 사실을 아는 믿음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매일 요구되는 세상과 믿음앞에 분명한 결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진정 하나님 말씀을 믿는 신앙이 있다면 더 이상의 방황보다 말씀앞에 순종하는 현실적인 신앙이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활속에 진정한 그리스도의 누림이 있기 위해서는 먼저 여러분에게 믿음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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