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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응답받는 기도 (눅 18: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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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소중히 여깁니다. 만약 누군가가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무시하거나 반대하게 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분노하거나 상대에 대해 원수된 감정을 품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상태를 상처입었다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신앙을 통하여 새로운 정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나에게 감정적인 고통을 준 사람들에 대해 용서라는 감정에 눈을 뜨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용서의 마음이 자신의 마음에 자리를 잡을 때 스스로의 마음에 상처가 치유되는 경험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이런 경험을 가능하게 해 줍니다. 그리고 이런 그리스도의 사랑의 경험은 기도라는 구체적인 신앙의 행위를 통하여 자기화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기도의 능력을 말합니다. 그러나 기도의 능력을 경험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치 않은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기도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의 간증을 부러워 하는 정도로 기도를 체험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응답받기 원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응답받는 기도는 현실적으로 많치 않은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문제에 대해 성경적으로 접근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는 어떤 기도인가 그리고 이 말은 우리에게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인가 라는 질문으로 대신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두 사람의 기도가 소개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기도가 어디에 있는가를 말씀해 주십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비밀에 대해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바리새인의 기도(눅18:10-12)
우리는 바리새인이라는 단어앞에 분노와 혐오의 감정을 쉽게 갖습니다. 우리는 바리새인같은 신앙인이라고 말하면 칭찬이 아니라 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믿습니다. 과연 바리새인이 그렇게 신앙적으로 혐오스러운 사람들인지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감사와 헌신의 성격으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도덕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탁월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바리새인의 기도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평가였습니다. 어떤 이유로 주님은 바리새인의 기도를 그렇게 혹독하게 평가하셨는지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도덕적 생활을 원치 않으실까요 그래서 우리는 도덕적인 생활을 포기하며 살아야 할까요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는 결코 하나님이 도덕적인 삶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욱 도덕적이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의 기도에는 어떤 문제가 숨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비난받는 기도의 모형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바리새인들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도덕적으로 존경받는 사람들이었으며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지도자들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코 그들은 지금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처럼 혐오와 비난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는 바리새인의 신앙이 모델이 되지 못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가장 모범적인 모델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기도에 있어서 우리의 도덕성이 생각보다 그렇게 큰 조건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도덕적 완전성을 감사했습니다. 문제는 바리새인의 도덕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에 대한 차별의식이 하나님과의 본질적인 관계를 막아 버렸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잘못된 선민의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이 자신의 도덕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오만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 이유는 바로 순종은 겸손의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바리새인은 하나님에 대한 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의 순종은 인격적인 것이 아니라 종교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의 순종은 겸손이 아니라 특권적인 과시였으며 타인을 비판하는 권위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자세를 교만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런 자세의 기도에 익숙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물론 여러분은 바리새인과 같은 기도를 하지 않는다고 말할 것입니다. 저도 그러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때때로 이런 바리새인적인 의식에 사로잡힌 신앙인들을 보게 되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과의 기도생활은 종교적인 의식이 아니라 인격적인 교제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기도를 인격적인 성격에서 종교적인 성격으로 전락시켜 버린다면 그것은 바로 바리새인의 기도와 동일한 성격의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평가하기를 자신들의 삶이 하나님의 뜻과 가장 접근된 생활을 하고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하나님은 바리새인들의 삶이 하나님의 뜻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착각의 이유를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누구보다 도덕적이며 종교적인 기도 생활에 모범이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종교적인 기도생활을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기도의 특징은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혹시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하여 공개적으로 홍보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보다 덜 종교적인 사람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그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우리는 바리새인의 기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외면 당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세리의 기도를 파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2. 세리의 기도(눅18:13)
당당한 바리새인의 기도와 아주 대조적으로 기도하고 있는 한 사람을 우리는 본문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세리의 기도입니다. 세리는 로마 시대에 동족으로부터 세금을 받아 로마 정부에 바치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문헌에 의하면 세리들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징수하여 일부를 착복했던 것이 일반적인 생활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로보아 세리에 대한 일반적인 정서가 얼마나 분노적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세리와 같은 대우를 받는다면 그것은 분명한 수치였을 것입니다. 일반적인 도덕성으로 세리는 외면 당하는 것이 당연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세리의 기도가 응답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도덕성은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세리처럼 부도덕한 인간의 생활을 가지고 있을 때 더 신앙적인 경험을 갖게 된다면 우리가 도덕적인 생활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는 극단적인 가치관이 유혹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오해는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촛점은 도덕성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기도에 그 중요함이 있다는 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세리의 기도는 도덕적으로 본다면 스스로가 부도덕한 인간임을 자인하면서 그 죄된 고통을 토설하는 성격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세리의 기도에는 감사도 헌신도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죄를 인정하니 불쌍히 여겨 달라는 용서에 대한 절박한 그리고 애절한 내용만을 담고 있습니다. 본문은 바리새인과 세리가 누구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적용은 폭넓게 경험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세리의 기도의 특징은 철저한 자신의 인정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변명하지도 않았으며 타인과 비교하지도 않았습니다. 세리는 철저하게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에서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세리는 종교와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기도의 룰에 대해서도 깊은 지식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규칙적으로 기도하지도 않았습니다. 세리가 하나님을 찾는다는 그 자체가 당시에는 조롱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럴 자격조차 없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로 이해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등장한 세리는 그런데 아무런 관심도 없었습니다. 오직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불쌍히 여겨 주심만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가 형식에 종교로서 무게를 둔 기도라면 세리의 기도는 마음의 종교로서 무게를 두고 있다는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세리는 통회하는 장면을 보임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그 자체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두 사람의 기도에 대해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이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다시말해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바리새인의 기도에는 관계하지 않으시고 세리의 기도에만 관계를 하셨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기도의 비유를 통해 우리의 기도를 찾아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의 수단이 말씀과 기도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에 대한 공부와 기도를 쉬지 않는 열심을 갖습니다. 문제는 경험되는 말씀과 기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와 종교적인 관계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삼으셨다는 사실을 감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종교적 관계를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격적 관계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제사라는 형식을 빌리지 않고 기도라는 인격적인 방법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는 바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그리고 자녀로의 관계로 대화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올바른 기도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부터인 것입니다. 기도는 결코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것일 수는 없습니다. 기도는 나와 하나님의 경험의 수단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 스스로의 약속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종교적이고 욕망적인 왜곡된 기도의 생활에서 인격적이고 겸손한 기도의 생활로 회복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와 입장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우리에게 유익한 것으로 채워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이제 하나님과 나와 인격적 관계에 몰입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기도가 믿음의 기도인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면서도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기도의 내용이 바뀔 필요가 있다는 말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기도생활을 함으로 인해 여러분의 생활이 영육간에 풍성해 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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