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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애통하는 자 (마 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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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애통하는 자

A. 누굴위한 애통이냐

지금 우리가 무엇을 위해 울며 불며 눈물 찍 콧물 찍 흘리며 주님 바지 가랑이 붙잡고 기도를 하고 있느냐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해서
예수를 좀더 잘 믿고 충성 봉사를 하게 해 달라고
선교의 사명을 받았으니 중국이나 티베트 중남미 어느 산간 오지에 가서 예수님 전하게 하여 달라고
다른 사람들 다 방언을 하는데 나만 못 하고 있으니 나도 방언좀 하게 해달라고 얼핏보면 우리가 지금 울고 있는 애통이 모두가 주님의 애통이고 예수님이 나와 함께 울어 줄 울음인 것 같지만 실상은 그것은 나의 애통이지 주님의 애통은 아닙니다. 이것은 종교적 애통이지 본문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애통은 아닙니다.
나의 애통을 가지고 종교의 애통을 가지고는 주님의 위로를 맛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목적과 수단과 성분이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고 싶은 것은 영양가가 풍부한 저 녘 식단인데 나는 쵸콜렛 먹고 싶단 말입니다. 주님은 저 녘을 먹여 재워서 위가 상하지 않게 하고 각종 영양소가 골고루 체내에 공급되어 정상적인 아이로 성장하기를 바라는데 나는 달콤하고 맛나는 쵸콜렛 입에 물고 만화를 보다가 잠이 들고 싶단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울고 있는 울음이 이 울음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그러면 나는 지금 심령이 가난하기 위해 애통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심령이 가난한 것이 복이 있다 라고 예수님이 가르쳐 줬기 때문입니다. 지금껏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동안 무슨 생각으로 정신을 팔아먹었기에 아직도 그 말귀를 못 알아먹었습니까 겉으로 보기에 신앙이 좋은 것 같고 신앙 지식이 풍부해서 어떤 신앙 상담을 해와도 성경적 해답을 해 줄 수 있어도 수천 수 만명의 교인이 아멘 할렐루야하고 외쳐도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생영(生靈)의 성장 없이 껍데기 운동만 하는 이 나를 보고 애통을 해야 한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언제까지 당근을 들고 우는 아이를 달래야 직성이 풀리시겠습니까

내 심령에 종교운동 교회 운동 사회 운동 가정 운동 성령대부흥 운동이 판을 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흔히들 이를 예수님의 향기라 하나 그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님)적 성장이 없고 , 천국이 확장될 자리가 없습니다. 꽉꽉차고 넘칩니다. 내 영혼아 이제는 편히 쉬고 먹자 라고 말하는 인간에게 천국이 들어 먹히지를 안습니다.

이렇게 우이독경, 마이동풍이라는 말이 새삼 실감이 납니다. 누군가에게 진리를 가르쳤더니 알아듣지 못해서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나 자신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본래 주고자 하는 목적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엉뚱한 것 붙잡고 씨름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느끼는 감정입니다.
우리는 나의 심령 깊숙이 박혀 있는 이질적 신앙 관을 보고서 애통을 해야하고 , 어서 빨리 버리지 못하고 타락한 옛 사람의 기존 성으로만 자라고 있는 현재의 나를 보고 애통해야 합니다.
울면서 씨를 부리는 자란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나를 두고 울어야 합니다. 내 영혼의 밭을 갈고 씨를 뿌려야지 내가 내밭에서 알곡을 생산해야지 나는 밭도 갈지도 않고 나는 씨도 뿌리지도 않고 남의 밭만 갈고 남의 밭에다 울면서 씨만 뿌리면 뭣하겠습니까 추수 때에 콩고물이라도 떨어질 것 같습니까 인간 세상의 정리라면 혹시 모르지만 천국의 구원은 성도 개인의 영적 성장이지 사역이 아닙니다.

2 . 하나님의 위로

하나님의 위로는 땅에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폭발적 은사가 일어 나는 것도 아니고 대한민국이 기독교 국가가 되어서 대통령이 청와대에 사는 것도 아니고 망하던 사업이 번창을 해서 대기업을 이루는 것도 아닙니다. 죽어 가던 사람이 약 봉지 버리고 기도원들어가면 살아서 나오는 것이 하나님의 위로가 아닙니다. 그것은 본질이 아니라 껍데기입니다.

A. 본질(本質)과 본성(本性)을 주는 것이 위로다.
사과라는 과일은 껍데기가 있고 알맹이가 있고 씨가 있고 다음으로 그 성분이 있습니다. 사과가 성분 적으로 비타민 A.B.C 그리고 섬유질이 있고 갖가지 영양소가 있듯이 우리의 신앙에도 외형과 행동 양식이 있고 신앙의 성분이 있습니다. 껍질만 사과고 성분 요소가 배라면 그것은 배이지 사과가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도 껍데기만 신앙이고 알맹이는 세상이라면 그는껍데기 일뿐 신앙인 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구원받았다, 받지 않았다의 차원이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나서 중생한 영이 성장을 하느냐 성장하는 진리를 먹고 있느냐 하는 면에서 하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먹으며 종교 활동 신앙 활동하며 예수님의 위로라고 여기고 있던 것들 중에서는 본질이 아닌 껍데기가 많습니다. 나는 돌보지 않고 내 영혼의 성화 구원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선교 100주년 운동하고 해외 선교사후원 운동하고 해외에 나가 죽도록 고생하며 전도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농어촌 지역에서 노인 어른들 붙들고 전도하며 가난하게 산들 본질과 본성을 외면한 채 내가 영적으로 어린 아이의 길을 답습하고 있는 다면 무슨 소용이냔 말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위로이냐 하면 아니란 말입니다.

B. 본질(本質)과 본성(本性)을 키우기 위해

하나님의 위로는 땅에 것이 아닌 하늘의 것을 가져다주고 하늘의 것을 키우고 하늘의 것을 확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 표현으로 성화 구원이라 하기도 하고 이룰 구원이라 하기도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나가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적 성품을 온전하게 소유하여 성분 적으로 예수의 신앙이 되는 것, 더 나가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이루었던 신앙 수준에 까지 도달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위로요 천국을 더 많이 소유하고 누리게 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도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지금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서론 부분에서 우리는 어느 무리에 속하여 있나를 따져 보자고 했습니다.
이제 한가지 묻고 싶습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가지지 못해 울고 있습니까 무엇에 소망과 목적을 두고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내가 원하는 것입니까

누구의 입장에서
누구의 시각에서
누구의 목적으로 애통하며 기도하고 있습니까 애통이라는 말은 아무데나 아무렇게나 붙이는 말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영원한 것을 갖지 못하고 헛된 것을 붙잡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우는 울음의 성질 그것을 놓고 애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난하지 못해서 천국의 사람이 되지못한 것이 애통할 일이지 머리에 재를뿌릴 일이지-+
+--+
 병 낫게 해 달라
 사업 잘 되게 해 달라
 종교적으로 경건하게 살 수 있게 해 달라
 교회가 부흥되게 해 달라
 +-+
 +-하는 것들은 본질이 아닙니다. 그것은 방편입니다. 본질이 아닙니다. 그런데 방편인 것을 가지고 본질 인양 착각을 하고 그것을 붙잡고 애통하고 있다면 하나님 입장에서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입장에서 안타까운 일만하는 이 나를 발견하고 애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소원 목적대로 살지 못하는 나를 보고 애통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본질적인 위로, 본성적인 위로, 그것은 천국의 사람이 되는 것이며 높은 진리의 봉우리로 올라가는 위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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