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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 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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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한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할 때의 이 온유의 덕목은 信, 不信을 막론하고 모든 종교인 도덕가들에게 있어서 빼어 놓을 수 없는 아름다운 덕목 중의 하 나이다. 상식인들에게 있어서도 교만은 보아주기가 마땅치 않고 겸손한 사람 의 인품은 단연 돋보이게 마련이며,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모사꾼은 싫은 법 이요, 순박하고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거침이 되지 않는 부 드럽고 온유한 사람이 환영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더욱이 앞 다투어 자 기를 P.R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시대에서 그런 사람은 우리들에게 신선한 맛 을 제공해 주는 것도 사실이며, 그래서 모든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온유는 특 별히 빼어 놓을 수 없이 요구되는 덕목이기도 하다.

그러한 까닭에서인지는 몰라도 설교에서 온유의 덕목이 단골 메뉴로 등장해도 실증이 나는 법이라곤 없으며 그것은 아무리 강조한다 해도 부족할 뿐만 아 니라 또한 아무리 온유한 사람이라 해도 자기 내면을 진솔하게 들여다 보면 나는 참으로 온유한 사람이다 라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기 도 하다.

이 온유도 역시 목청이 센 설교가들에 의해 소리 높여 외쳐지고 있고 그에 화 답하는 아멘 소리는 강당이 떠나갈듯 하지만 공허한 메아리()로 남아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이며, 아니 온유 겸손하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온유는 커녕 도리어 온유의 옷은 입고 있으면서도 그 속에 웅크리고 있는 자신의 실상이 그것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사람임을 발견하고 고민해 보신 적은 없으신가. 아 니 우리는 언제까지나 성경을 움켜잡고 이러한 말씀들을 도덕적 덕목으로 붙 잡고 있고 강조하고 있어야 되며, 더구나 자신의 삶에 적용시키려고 몸부림치 고 있어야 하느냐는 말이다. 그렇게 하고 있으면서도 화살이 빗나가고 있지 않고 정방향으로 날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시는가 그래서 당신은 온유의 삶이 이루어졌으며 그 까닭에 땅을 기업으로 받는 복이 임하였는가

우리는 여기서 오늘 본문을 대할 때에 단순히 율법적 도덕적 차원에서 온유 하라 라고 강조해서는 안됨이 당연하고 그럴 수 없는 것이라면 성경차원의 온유, 즉 법적 개념으로 온유를 보려고 하지 말고 성경적 개념의(진리적) 온 유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오늘 본문은 주님의 산상보훈의 팔복 중에서 세번째 나오는 복임을 생각 해 볼 때 어쩌면 이 이상도 이 이하도 없는 복음의 핵심에 대한 어떤 측면에 서의 정곡을 말씀하고 계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각각 개개인의 삶 의 정황에 따라 적절하게 적용해야 할 도덕적 덕목의 차원으로 격하(거짖 증 거)될 말씀이 아니고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 말씀임을 인식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 다시 속고 속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그만 큼 우리가 죄로 가리워져 있고 흑암속에 있기 때문에 비추임의 역사가 차단되 었다고 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지금 어떤 분위기와 말씀의 흐름 가운데서 이 말씀이 계속되고 있는지를 상기해 보아야 한다. 지금까지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가 난한 자(oiJ ptwcoi; tw'/` pneuvmati)와 애통하는 자(oiJ penqou'nte")에 이 어서 지금 oiJ praei'"가 나오고 있다. 성경은 전체적인 흐름을 간과해서는 그 의미의 어떠함을 놓치기 쉽게 되어 있다. 거듭 말씀 드리거니와 Text 와 context의 관계는 성경 해석학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정작 성 경독자들이 본문을 대할적에는 이 단순한 한가지의 사실을 가볍게 여기는 우 를 범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또한 주의깊게 살펴 보아야 할 것은 oti 이하이다. 즉 온유한 자들은 복이 있는데, 그들이(aujtoi 그들이), klhronomhvsousin(크레로노메수신, V IFA--ZP 동사 직설법 미래,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th;n gh'n(땅을)이라는 말씀인데 결국 동사 klhronomevw가 5장 4절에서처럼 미래시제로 나타나고 있 다는 사실과 또한 그것은 4절에서 애통하는 것이 복일 수 있는 것은 애통 자 체가 아니고 그 후에 위로를 받을 것임이기 때문에 복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온유한 자도 땅을 기업으로 장차 받을 것이기 때문에 복이 있음이요 그것은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한다면 복이 될 수 없다는 것이라고도 말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시제가 가져다 주는 중요성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물론 6, 7, 8, 9절도 마찬가지이지만, 우선 시제와 관련해서는 후에 또 살펴 보도록 하고 praei'"(프라에이스, 온유함)가 무엇인지를 탐구해 보도록 하자 .

 신약성경에서는 형용사 pra/u" 에서 명사형인 pra/uth"가 파생되어 나타나 고 있고,이와 함께 pra'/o", pra/ovth" 등이 쓰이고 있다. 또한 온유와 함께 등장하는 개념이 겸손(tapeinofrosuvnh, 타페이노프로수네), 혹은 tapeinov "(타페이노스, 겸손한) 이다. 마태복음 11:29에서 보면 나는 마음이 온유하 고 겸손하니 (prau" eijmi kai; tapeino;" th' karsiva/, 직역해 본다면 나 는 마음에 온유와 겸손이 있다)에서 prau"와 tapeino;"가 마음의(th' karsi va/, 테 카르디아) 어떠한 상태로서 나란히 나오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특히 tapeino frosuvnh는 tapeinovw(낮추다)와 fravw(제어, 억제, 재갈을 달 다)의 합성어로서 tapeinovw가 사용되고 있는 성경구절은 마 18:4, 23:12, 빌 2:8 등을 볼 수 있고 또한 빌립보서 4:12에서 바울이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할 때의 비천이 tapeinovw를 쓰고 있다. 에베소서 4장 2절에도 너희 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하고 오래 참음 으로 서로 용납하고 하면서 겸손과 온유가 동시에 나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겸손과 온유가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겠으 나 유사한 뉘앙스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리라고 보여진다.

tapeinovw에서 유래한 tap-eivnwsi"는 비천한 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누가복음 1:48 마리아의 찬양 중에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 보셨음이라 에서 비천함 빌 3: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 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에서 낮은 으로 번역되어 있고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 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약 4:26)라는 표현도 성경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빌립보서 2:8절의 경우를 살펴보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에서 낮추시고가 tapeinovw 동사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온유와 동시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겸손은 사람과의 관련(윤리적 관점 )에서 보다는 하나님과의 관련속에서 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특히 빌립보서 2:8절의 경우를 보면 예수님에게서의 십자가 사건과 연결하여 표현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신 주님께서 또한 온유의 표본이심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마 11:29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리라 라는 말씀 바로 앞에 있는 25절의 이 것을 지헤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라는 말씀을 생각해 본다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은 지혜 롭고 슬기있는 자들의 지혜와 슬기()라면 온유와 겸손은 어린 아이들의 상태 이고 결국 아버지의 모든 것을 나타내심이니 아마도 쉼과 안식이 주어지는 상 황일 것이다. 누구에게 무엇이 숨겨져 있고 왜 수고와 무거운 짐이며 또 누구 에게는 어떠하길래 그것을 나타내시며 아버지를 알 수 있게 하셨을까 그러 고 보면 또한 온유와 겸손은 당연히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는가

온유에 대한 구약적 이해를 살펴 보자. 히브리어로는 형용사 wn:[:(아나브, 온유한, 겸손한)와 명사형으로는 hw:n:[ ;(아나-바, 온유함, 겸손함)와 hw:n['(안바)이며 민 12:3에서 모세의 온유함 할 때에 쓰고있으며 LXX에서 는 이를 prau"로 번역하고 있다. 명사형은 형용사에서 유래되었고 wn:[(아나 브)는 hn:[;(아-나 고난당하다, 곤란을 당하다, 괴로워하다, 상하다, 욕보이 다, 낮추시다, 굽히다, 곤고케하다, 환난을 받다, 겸비케 하다)에서 유래되었 다. 주로 hn:[(아나)는 고난의 의미를 깊이 내포하고 있다. 실제로 wn:[(아나 브)는 가난한 자(욥 24:4, 시 9:12, 18, 10:12, 사 61:1)로 번역된 곳이 있는 가 하면 시 34:2에는 곤고한 자, 사 32:7에는 가련한 자로 번역되어 있다. 시 9:12절은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저희를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 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는도다 에서 가난한 자(난하주 겸비한 자)로 번역되 어 있고 곧 부르짖음이 일어나고 있는 어떤 상태의 묘사로 나타나고 있다. 구 약성경에서는 wn:[(겸손한, 온유한)와 iynI[(아-니, 가난한)가 hn:[(아-나)라 는 동일한 단어에서 파생되었음도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시편 37:11에도 오늘 본문과 유사한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 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는 말씀이 있듯이 온유는 그 결과로 땅을 기업으로 받는 어떠한 것임에 분명하다. 앞서 살펴본대로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신 다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은 무엇이며 땅을 기업으로 받겠다고 하는 것은 무엇 인가 아니 신앙인의 소망은 무엇이며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꿈에도 소원은 무엇이며 그들에게 언약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인가 또한 그것에 대한 신약적 이해는 어떠한 것인가 하나님 나라의 도래, 새 하늘과 새 땅 , 하나님 나라의 실체이신 그리스도의 임하심, 마태복음 13장의 비유에 나타 난 땅, 그리고 그 땅에 뿌려지는 씨 등,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 며, 그것과 온유와는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가 그와 관련하여 도대체 성도들의 기업으로받을 것은(klhronomevw)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마 19:29절은 영생을 상속하리라 하셨고, 마 25:34 예비된 나라, 고전 6: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임을 선 언하고 있으며 히 1:4는 아름다운 이름을, 계시록 21:7, 이기는 자는 이것들 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라는 말씀들을 본다면 이러한 어떤 것을 제외해 놓고 다른 무엇을 기업으로 받기 를 바란다면 그는 분명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는 자일 것이다.

바로 그러한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라는 말씀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 온유(prau") 이다. 그것은 이미 살펴 본 바대로 신약에서는 낮아짐의 (tapeinovw) 상태이며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자기를 낮추셔서 죽기까지 복종하 시어 마침내 십자가에 죽으심이니 곧 온유는 십자가요, 눅 1:48대로 계집종의 비천함이니 하나님께서 돌아보지 않으실 수 없는 상태요, 그것은 결국 구약 적 이해에서도 동일한 것임을 우리는 살펴볼 수 있었다.

다시 한번 물음을 던져 본다면 무엇이 온유이며 그 반대의 경우인 하나님께서 물리치시는 교만은 무엇인가 말 그대로 온유가 온유이며 교만이 교만이다 . 온유는 5장 4절의 애통하는 자, 곧 곤고한 자와 동일한 것이며 그러한 상황 속에서만 인간은 비로소 겸비케 될 수 있으며 자기 의라고 하는 하나님께 향 하여 높아진 것(교만)으로 부터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곧 지혜롭고 슬기로 운 자에게는 감추실 수 밖에 없는 것도 하나님께 향하여 높아진 이것이 하나 님의 비밀을 겹겹히 싸놓고 있어서 드러내실 수 없음이요, 그러기에 이것이 깨어지는 것이 온유며 겸손일진대 그것은 고난이며 고통이요 애통이 아니겠는 가 바로 이러한 과정을 지나쳐서야 비로소 율법의 씨가 아닌 새 언약의 말 씀이 떨어져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얻어낼 수 있는 기름진 농토가 주어질 수 있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를 줄기차게 언약하시고 권고하심이 아니겠는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곳은 골짜기 에든지 산지에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들의 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너의 먹는 식물의 결핍함 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돌을 캘 것이라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로 네게 주셨음 을 인하여 그를 찬송하리라 (신 8:7-10) 온유함이란 단지 심성이 곱고 착하여 소위 성품이 유(柔)하여 상대방에게 험 악하게 하지 못하고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 주고 하는, 사람의 유약함을 표현 하는 것이 아님은 두말 할 나위가 없는 것이며 약 1:21에 그러므로 모든 더 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는 말씀들도 결국 성냄의 요소가 제거되고 자기가 죽어지면서 비로소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받을 수 있는 것이며 , 벧전 3: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속에 있 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 려움으로 하고 라는 말씀도 당연히 온유와 두려움으로 해야할 것은 속에 담 고 있는 것이 지식이 아니라면 자기의 의나 주장으로 곧 자기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아무리 좋은 보화()를 가지고 있다 할찌라도 온유가 아니라면 그것은 보화가 아니라 그에게 있어서는 한낮 지식의 앙상한 뼈다귀 를 나열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항상 거침이 될 뿐 이며 하나님 나라의 어떠함과는 영영 거리와 간격을 두고있는 모습일 것이다 .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에서 의 온유는 결과적 온유이기보다도 온유 를 이루는 과정적 이해가 더 적절한 것이라는 것은 oti 이하가 현실이 아닌 미래 시제로 나타나고 있음이기 때문이며 5장 4절과 동일하게 땅을 기업으로 받은 상태는 아마도 5장 3절의 천국이 저희것인 상태의 도래로 보아도 무방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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