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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마 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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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의 상황은 어떠한 때에 발생하고 또한 배부름이 성취되는 복있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을 살펴보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상황이 전개됨이 당연한 것은 지금까지의 삶이 열심있는 신앙 생활과 뿐만 아니라 양식으로도 어떻든 조금도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배부름의 상태를 지속해 왔었다고 하는 것이다. 무엇으로 바로 멸망의 양식, 죽음의 양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어느날 배부름의 양식이던 남편(롬7:1-10
절 참조)이 죽어 버리는 상황을 경험하게 되는 모습, 아니 그것을 상상해 보실 수 있겠는가
이제까지는 자기 의(義)에 배불렀고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전혀 없었으나 약속하신 날()이 가까와 옴에 따라 자신을 배부르게 하던 그 양식이 떨어져 가기 시작한다. 그것 때문에 살았고 그것 때문에 순교를 각오했었던 것이 한순간 무너져 내리게 되는때 이제는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며, 어디에 가서 무엇으로 주린 배를 채울 수 있다는 말인가 하는 상황 말이다.
이것은 사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기근이요, 그러기에 말세에 되어질 복있는자들의 고통스런 전주곡이다. 구약의 아모스 선지는 8:11에서 예언하기를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식량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 라는 말씀이 있다. 그 날에는 궁전의 노래가 애곡으로 변하는 날이며 모든 즐거움이 애통으로 바뀌는 날이요 어쩌면 천국()이 순식간에 지옥으로 바뀌는 날이기도 하다.
오죽하면 이러한 곤고의 날이 욥에게 이르렀을 때에 자기의 생일을 저주 하였겠는가 그의 고통스러운 고백을 한번 들어 보자.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욥이 말을 내어 가로되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 그 날이 캄캄하였었더라면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었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유방이 나로 빨게 하였던가 그렇지 아니 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 나의 두려워 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 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평강도 없고 안위도 없고 안식도 없고 고난만 임하였구나 (욥기 3장)
욥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이 분쇄되고 욥의 발바닥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악창이 난 후 3장에서의 그의 탄식 소리이다.
누가 이러한 상황을 복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니 아무리 그것을 복이라고 말한들 그게 무슨 복이 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만은 고집스럽게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말하고 있다. 동방의 의인 욥에게 있어서는 하루 아침에 즐거움이 애통이 되었고 배부름이 주림이 되었으며 노래가 통곡으로 바뀌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갰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는 기사가 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 있어서도 역시 시대의 분별력이 없는 것은 동일한 것이며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참 모습인줄 오해 하는 것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이전의 양식이 이제는 먹을 수 있는 양식이 되지 않는다. 열심히 야곱의 우물물을 길어다가 갈한 목을 적신다 해도 그것은 다시 목마를 뿐이며 오히려 그것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생수를 거절하는 모습임을 알게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양식도 음료도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열심히 자기 의를 쌓는 것이 열심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임을 깨닫게 될 때 더 이상 월삭과 안식일과 절기를 지키라는 말씀은 그에게 기쁨의 양식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제부터 이다. 그 양식으로 부터로 주려 있고 그렇다고 새로운 양식으로 배부르지도 않은 상황 말이다. 그러므로 실제로 양식이 없어서 주림이 아니라, 즉 그 양식은 참으로 양식이 될 수 없다는 것이요 그러기에 문제는 말씀이 없어서 기갈이요, 주림이라는 것이다.그러기에 의(th;n dikaiosunhvn)에 주리고 목마른 자인 것이다. 자기 의에 대한 무익함의 깨달음뿐만 아니라 그와 동시에 실제적인 주림의 상황이 전개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말씀을 만날 것인가 하고 동에서 서로 찾아 다니는 상황, 그러나 그렇게 찾아 다니는 그가 마침내는 곤고하여 지쳐서 쓰러질 때 그리고 두손이 놓아질 때에 배부름이 주어질 것이요, 때문에 복이 있는 자인 것이다.

다메섹 사건을 경험한 바울에게 있어서 로마서 7장의 상황은 실존적 경험임과 동시에 그것은 바울에게서 뿐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들에게 있어서도 동일하게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로마서 7: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대 사도 바울이 이런 고백을 하였다는 것을 독자 여러분들은 이해를 하실 수 있겠는가 그냥 로마서 7장은 어떤 상황이고 8장은 어떤 상황인 것을 이미 많이 배웠고 이해하고 우리도 너무 많이 들어서 알고 있는 것인데 무얼 그렇게 호들갑을 떠느냐 라고 말한다면 할 말이 없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지식이 8장의 즐거움만 자랑하지 8장 앞에 7장이 있다는 상황과 7장의 싸움속에서 비로소 지식으로가 아닌 삶으로 개인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해방의 비밀이 드러나고 성취된다는 것은 간과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성경의 약속이 성취되어 가는 과정이요 그것은 바울의 증거일 뿐만 아니라 성경의 증거요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 줄기차게 나타나고 있는 웅변적 멧세지인 것이다.
결국은 그리고 마침내는 개인에게 임하고 드러날 것이기 때문에 즉 배부르게 될 것이기 때문에 복이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신앙 생활이란 어떤 새로운 깨달음만도 아니고 성경의 지식 축적도 아니며 언약하신 약속들이 성취되어 가고 말씀이 이루어져 가는 개개인의 삶인 것이다. 아무리 새롭고 신비한 말씀을 깨닫고 알았다 해도 그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으며 무슨 영향력이 있겠는가 잠시 잠간 마음을 사로잡는 것 외에는! 때문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고전 13:2) 하는 것 아니겠는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상태, 이것이 곧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 하리라라는 말씀대로 생명의 떡이신 주님에게로 가고 있는 길목이요, 과정이라는 것이다. 바로 생명의 떡이신 주의 임하심이 임박한 상황에서 나타나는 세상끝의 징조로서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일어나는 상황이며(마 24:3-1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4)라는 상태요 또한 자기의 난 날을 저주하는 곤고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선진들이 그러한 상황에서도 결국은 약속대로 더 좋은 부활과 생명을 얻은 발자취를 기록하고 있고 오늘 본문에서도 복이 있나니(oJti aujtoi; corta-sqhvsontai 호티 아우토이 코르타스데손타이, 동사 직설법, 미래, 수동태,) 그들이 배부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약속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소망을 잃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일을 시작하신 산 소망되신 그리스도께서 결국은 새생명의 싹을 키워내시지 않겠는가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벧전 2:21-

실제로 우리의 본이 되시는 예수께서도 마 4장 금식하신 후에 주리셨고(peinavw) 요 19:28에 보면 이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곧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으로 소위 架上七言 중에 한 말씀이 목마르다(diyavw) 라고 하는 말씀이셨다.
그의 생애 가운데 나타난 이러한 주림과 목마름의 의미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뒤로 하고라도 분명한 것은 맏아들되시는 예수 자신에게서도 분명히 그러한 주림과 목마름이 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의(th;n dikaiosuvvnhn)에 주리고 목마름이 복이 있는 것은 분명 한데, 아직까지도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고 하는 것을 단순히 하나님의 의 혹은 그리스도 또는 말씀을 간절히 필요로하고 찾고 구하는 상태 정도로만 이해를 해야 하는가 그말이 틀린 말은 아니로되 그러나 틀린 말일수 있다는 것은 그러한 이해속에서는 하나님의 의가 정작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막연하게 맹목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찾고 구하는 그래서 허공을 치게 하는 곳으로 치닫게 되는 혼돈의 연속일 수 밖에 없다는 까닭에서 이다. 그것은 말은 맞되 내용만 새로이 갖추었을 뿐 또 다시 옛 양식을 더듬어 찾는 결과요 실패하고 절망 할 수 밖에 없는 이제까지 몸부림쳐오던 죽어야할 자기를 부추기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낱 하나님의 의에 대한 육신적 염려에 불과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모든 상황들은 이론이나 지식 또는 해석으로 설명 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성취되어지는 상황속에서 비로소 이해되어질 수밖에 없다는 표현을 또 다시 할 수 밖에 없다. 다만 오늘 본문도 하나님 나라가 저희 것이기 위한 임박한 징조로 나타나는 한 현상이요 결국 앞에서 나타나고 있는 복들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하는 사실이다.
여러분들의 평안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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