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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계명연구 (출 2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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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 공동체 안에 반드시 지켜야할 어떠한 기준을 제시하는 것은 언제나 “약한 사람들에 대한 원칙적인 배려와 더불어 살아가는 관계의 원칙”을 세우기 위해서 이다. 이러한 원칙이 흐려지고 나면 경직된 법조항만 남게 되고 본래의 정신은 질식당하게 된다.

십계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안에서 “더불어 있는 공동체”를 발견해야 한다. 야훼의 질서가 정의롭게 살아있는 공동체, 누구도 빼앗지 않으며 아무도 거절당하지 않는 야훼의 해방공동체를 읽어야 한다..

십계명은 단순한 도덕률이나 건조하기 이를데 없는 기능적인 법조문도 아니다. 그 안에는 “관계”가 있다. 파라오의 폭압에서 벗어나 극적인 해방을 경험한 히브리 민중들의 눈물과 기쁨이 있고 그 안에서 경험한 평화가 있다. 십계명은 하나의 강고한 신앙고백이며 함께 일구어 가는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약속이고 희망이다.

  헤아림 십계명을 무겁고 경직된 법조문으로 보는 한 그 안에 담겨있는 풍부한 관계와 사건들을 발견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십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기계적이고 형식적인 차원에서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다. 그 정신을 따르는 것이고, 그 안에서 공동체적인 관계를 찾아내는 것이며, 그러한 공동체적인 사건을 다시금 일으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에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낸 하나님”과의 관계는 황폐하게 되어버린 가능성의 텃밭에서 “새로운 해방의 사람살이”를 일으키는 관계이다. 이 관계를 전제로 하여 “한결같이 살아가야 하는 것”이 바로 십계명의 내용이다. 이것은 해방의 기쁨을 기초하여 쌓아 가는 삶이고, 이렇게 만들어 가는 공동체적 사건이며, 공동체의 표현이다.

그래서 십계명에서 효력을 잃어버린 계율이 아니라 한결같이 살아있는 사람다움의 원칙을 볼 수 있어야 하고, 야훼 하나님과의 한결같은 관계 속에서 경험되는 해방의 기쁨을 읽어내야 한다.

  나눔 지금껏 십계명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를 서로 이야기해 봅시다.

 공동체 안에 어떠한 원칙이나 기준은 왜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에게 십계명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서로 이야기해 봅시다.

 ▣ 수요모임(십계명연구②) 199

4. 1

2. 14  본문읽기 / 출애급기 20:1-17, 신명 5:6-21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못한다.(출20:3,신명5:7)”  앎 지난 주에 십계명에는 “관계”가 있고, “더불어 있는 신뢰의 공동체”가 있음을 언급했다. 실로 십계명에는 아무도 거절되지 않는 해방공동체, 이 공동체의 눈물과 기쁨이 있고, 거듭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약속과 희망이 있다. 그들이 겪었던 절망의 깊이 만큼이나 절실하게 “관계가 살아있는 평등공동체”를 향해 방향을 잡고 있다. 그것은 타협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뼈저린 눈물과 아픔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까닭이다. “지켜야 하는 것”,그들의 역사 속에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약속”은 타협하거나 적당하게 섞어놓은 불투명함을 용납하지 않는다.

“약속”은 타협될 수 없는 다짐에 해당되며, 그것이 자신의 살아있음을 가치롭게 할 것이라는 확신 같은 것이 담겨있다. 약속이 관계로부터 오는 것이고 보면, 해방의 경험을 불러들이는 관계는 스스로를 지탱하는 근거에 해당된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우유부단”, 여기 저기를 목적의식없이 기웃거리는 “산만함”은 자신을 지켜줄 수 없다는 인식이 여기에 있다.

십계명의 첫번째 대목에서 이러한 적당한 타협이나 어떠한 산만함도 찾을 수 없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못한다.” 해방의 경험은 언제나 한결같아야 하고, “야훼 해방의 물흐름”은 유일한 전통이 되어야 한다. 종잡을 수 없는 “산만함”은 여기에서 거절된다.

  헤아림 “거절의 미학”을 읽는다. “그럴 수 없다”, “아니다”라는 말, 적당하게 타협하고 악수하는 시절에 종지부를 찍는 말이 절실해 진 것이다. 아니다라고 말 못하는 것은 미련이 남았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적당하게 발붙이고, 부스러기를 챙기고, 목적이라고는 그저 ‘나하나 잘 풀리는 것’ 정도로 생각하면서 해방의 경험을 줄곧 생생하게 자기 삶의 언어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야훼 해방의 물흐름에 한결같이 발담그고 “아니다”라고 거절하는 단호함이 필요한 시점이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못한다.” “오직 야훼!”선언은 하나의 싸움을 의미한다. 그들을 위협하는 정착되고 안정된 가나안의 새로운 풍요의 이념, “절실한 해방의 추구”를 단숨에 말아버리고 소멸시키고 말 “소유의 이념”을 상대로 싸워야 한다. 여기에는 긴장이 있다. 배타적인 싸움이 있다. 물처럼 강물처럼 흐르게 해야할 야훼의 해방이념은 어떠한 타협으로도 멈추게 할 수 없다는 강고한 다짐을 읽을 수 있다.

  나눔 우리에게는 타협할 수 없는 어떠한 해방전통이 있습니까 우리가 긴장을 유지하고 끝까지 지키려고 하는 해방전통은 지금 나에게 어떠한 의미를 주고 있습니까

▣ 수요모임(십계명연구③)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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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1

 본문읽기 / 출애급기 20:1-17, 신명 5:6-21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습을 본따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앎 사람들은 “불확실한 미래”를 견디지 못한다. 큼지막한 명패에 서둘러 답을 적어서 내다 걸고 안심한다. 그것이 모든 것을 지켜 줄 것이라고 믿으면서, 그것이 보장된 미래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애굽 파라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해방의 공간으로 썩 나섰을 때 그들의 모든 문제가 단번에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 앞에 놓여있는 것은 당장 해결해야하는 끼니와 예측할 수 없었던 도전과 위협이었다. 더불어 함께 경험하게될 진정한 해방의 경험은 아직 구비 구비 힘겨운 언덕을 더 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아직 해방현실은 ‘불확실한 미래’였던 것이다.

그들은 “해방자 야훼”를 더 깊이 알아야 하고 경험해야 한다. 그들은 좌절과 실패 속에서 야훼를 만나야 한다. 결국 어느 누구도 거절되지 않는 더불어 함께 살아갈 신명나는 해방사회를 만나기 위해서는 그들이 정체되어 있어서는 안된다. 고정되고 정지되어 있을 때, 흐르지 않을 때 더이상 해방현실을 갈망하거나 바램을 불러들이지 않게 된다. 해방사회는 정지되어 있는 사물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더불어 움직이고 만나고 함께 삶과 역사를 경험하면서 해방사건은 이루어져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헤아림 그들을 정지하게 만드는 어떠한 것도 거절되어야 한다. 체념하고 그렇게 머물게 하는 것들, 더는 나아가지 못하게 하거나 희망의 싹을 없애버리는 어떠한 것이라도 그들은 그들 곁에 두어서는 안된다.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습을 본따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그들을 붙들어 두는 것, 정체되어 머물게 하는 것, 희망의 걸음을 내딛고 용기를 내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그들에게 “우상”이다. 그것은 그들이 분명하게 파라오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는데도 “애굽의 환상” “애굽의 망령”에 사로잡혀 아직도 노예인 듯 마음과 정신이 애굽에 머물게 하는 것들이다.

“새술은 새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 그것은 그들을 머물게 하는 옛시대의 정신을 다시 꺼내들고 향수에 젖어서는 새 아침을 만날 수 없는 노릇이라는 말이다. 그들은 정지되어 틀에 박힌 얼굴을 반복하여 내보이며 더 이상 어떠한 새로움을 만들어 낼 수 없는 “우상” 속에서 야훼와 야훼의 정신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해두지 않으면 안된다.

“형상을 만들고 그것에 기대어 머물면서” 동시에 저 산너머에서 동터오는 해방의 새아침. 그 가슴벅찬 기쁨을 느끼거나 만날 수는 없다. “형상을 만들지 말고 섬기지 말라!” “머물지 말아라! 기웃거리지 말고 체념하거나 어떠한 망령에도 사로잡히지 말고 가라!”  나눔 우리의 발목을 잡고 나 자신을 정체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서 “아침을 기다리며 확신있게 움직이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까요 오늘도 우리에게 “머물지 말라!”는 당부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 나누어 봅시다.

 ▣ 수요모임(십계명연구④) 199

4. 1

2. 28

 본문읽기 / 출애급기 20:1-17, 신명 5:6-21 “너희는 너희 하나님의 이름 야훼를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야훼는 자기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죄없다고 하지 않는다.”

 앎 “새술은 새부대에 담아” 애굽의 환상이나 노예적 습성에 기대어 기웃거리거나 머물지 않고 해방현실을 향해 달음질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적당한 포장기술”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럴듯하게 포장했다고 해서 썩은 본질이 바뀌지는 않기 때문이다. 해방자 야훼의 이름으로 해방현실을 세우기 위해 나섰을 때, 이를 위하여 “비슷하기는 하지만 마음을 다하지 않거나” 혹은 “허풍스러운 만용”으로 그 내용을 채울 수는 없다. 야훼 이름은 자신의 상황 변화를 기준삼아 이렇게도 저렇게도 오려내기도 하고 풀칠하여 붙일 수 있는 공작재료가 아니다.

야훼의 이름은 “공공의 것”이다. 그것은 이를테면 해방의 기준이다. 해방사회의 기준이고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원칙 같은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될 수 없는 근거와 같은 말이다. 이것을 이기적인 용도에 의해 폐기처분하거나 변형시키거나 합리화하는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겠다.

야훼의 이름은 결코 “함부로” 좌우되는 이기적인 자기기준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를테면 자신의 상황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합리화하거나 그럴듯한 처세술을 만족시키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만약 이러한 시도를 하려한다면 그는 야훼 이름을 함부로 하는 것이다.

  헤아림 어떠한 사람이나 공동체이라도 야훼의 이름으로 “부도”를 내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야훼 앞에서 다짐을 하고 희망을 불러들이지만 그것은 단순한 의욕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야훼의 이름은 야훼와의 실질적인 관계를 바탕 삼고 있고, 이는 “신뢰”의 관계이다. 허위의식에 해당되는 만용이나 인위적인 자기판단이 아니라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될 수 없는 “세상끝날까지 함께 하는” 신뢰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해방현실을 말하는 것이다.

“내용 없는 명찰”은 허위의식에 해당되고 그 자체로 부끄러움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상황 속에서 야훼를 신앙하고 신뢰관계 속에서 희망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은 “기술적인 방법”에 달려있다기 보다는, 우리의 공동체의 삶과 관계 속에서 “함부로” 취급되지 않는 야훼의 이름, 곧 끝까지 포기되지 않는 신뢰의 끈에 달려있다. 야훼 이름은 우리 몸의 삶과 실천으로 드러나야 하고 그 거룩함을 증명해야 한다.

  나눔 당신에게서 야훼의 이름은 어떻게 취급되고 있습니까 인위적 자기 기준에 놓일 수 없는 야훼의 이름이 “공공의 것”이란 말의 의미를 새겨봅시다.

 ▣ 수요모임(십계명연구⑤) 19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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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읽기 / 출애굽기 20:1-17, 신명 5:6-21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엿새동안 네 모든 생업에 종사하고 이렛날은 너희 하나님 야훼 앞에서 쉬어라. 그 날 너희는 어떤 생업에도 종사하지 못한다.” “너희는 에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일을 생각하여라.(신명기5:15)

 앎 십계명에서 “쉼”에 대한 관심은 매우 사회적이다. “쉼”으로부터 소외되고 쉼을 자연스러운 생활의 자리에 가져올 수 없는 사람에게 쉼은 그저 노동을 일시적으로 그치는 단순한 조건, 즉 ‘일과 일 사이의 공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다운 사람살이”에 대한 갈망에 해당된다. 노동이 창조행위에 연결되어 있지 못할 때 노동이 시름이 되고 아픔이 되고 괴로움이 될 때 정작 사람은 노동 속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사람다움을 경험하지 못하게 된다.

사람의 노동이 “쉼”과 연결되지 못하거나 동료 인간에 의해서 쉼을 빼앗길 때, 즉 약한 사람의 노동이나 쉼이 정당하게 취급되지 않고 일방적인 제도나 사회적 관행에 걸림이 되어 쉼을 자유롭게 선택하지 못하게 될 때, “약한 사람들의 쉼은 마땅하게 인정되어야 한다”는 갈망이 생기는 것이다. “쉼에 대한 법규정”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너희는 에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일을 생각하여라.” 노동이 정당하게 취급되지 않았던 노예시절에 가졌던 “쉼에 대한 갈망”을 기억해야 하고, 새로운 해방 공동체 속에서 창조행위로서의 노동이 자리잡아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사람답게 사람이 관계를 맺고 자연스러운 쉼과 연결되는 것이 해방 공동체의 조건이고 모두를 살게 하는 사회적 원리이기 때문이다. 야훼의 노동질서는 “창조적인 움직임을 잉태하는 쉼”을 그 조건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헤아림 “안식일”은 그러므로 이러한 야훼의 노동질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두가 더불어 창조적인 쉼을 누리는 사회”, 그러한 “공동체”를 표현하고 연습하는 계기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종교적인 계율이 되고 율법이 되면 사실 “창조적인 쉼”이 사리지고 설 자리를 잃고 만다. 안식일은 “사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것도 약하고 쉽사리 모든 것을 빼앗길 위험이 많은 사람들,이들과 함께 만들어 가는 평등공동체를 향해 열려있는 것이다.

다시말해 “누가 무엇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도식이 아니라 “누구라도 쉼을 농락 당하거나 창조적인 쉼을 빼앗겨서는 안된다”라는 노동과 쉼의 원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안식일이 거룩하게 되는 것은 “모든 날”(종교화된 어느 한 날이 아니라)속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노동이 인정될 때, 그리고 이것과 연결된 쉼이 보장되는 현실을 만들어 갈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눔 우리 생활 속의 어느 지점에서 “창조적인 쉼”이 인정되지 않는지 말해봅시다.

오늘날 “안식일을 거룩하게 한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는 것일까요

▣ 수요모임(십계명연구⑥) 19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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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읽기 / 출애굽기 20:1-17, 신명 5:6-21 “너희는 부모를 공경하여라. 너희 하나님 야훼의 분부다. 그래야 너희는 오래 살 것이다.

너희 하나님 야훼께서 주시는 땅에서 잘 될 것이다.”(신명기5:16)

 앎 가정은 신뢰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최소한의 단위이며, 여기에서 사회적 신뢰에 대한 훈련이 이루어지고, 이것을 세우는 근거가 된다. 이러한 신뢰와 유대가 깨어질 때 그것은 곧바로 사회적 질서로 이어지게 된다. 이것은 “사회적 상식”이 지켜지는 것,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해서는 안될 “인간에 대한 끊임없는 애정과 신뢰”를 이끌어내는 열쇠와 같은 것이다.

세대간의 갈등과 부조화 속에서 사회적 공동체는 깨어지고 갈등을 겪게 된다. 세대간의 유대를 깊게 하고 간격을 좁히기 위한 “신뢰의 노력”은 “완성도 있는 성숙한 인간과 사회”를 만들어 가기 위한 연결고리에 해당된다. 건강한 사회는 건강한 사람들이 엮어내는 의지이고 자기표현이기 때문이다.

여러 세대가 모여살던 대가족 사회 속에서 특히 세대간의 긴장과 알력를 겪은 쓰라린 생활체험에서 이러한 절실함이 나타났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기력을 잃은 노인들의 경우에 쉽사리 심각한 고독과 비애를 느끼기 마련이다. 예나 지금이나 특히 노인들은 가정과 사회공동체에서 소외되고 의사소통의 기회를 빼앗길 뿐 아니라 귄리를 박탈당하기 쉽다. 이에 대한 인간적인 애정과 신뢰의 끈을 고집스럽게 찾아내고 지키는 문제는 단지 한 사람의 노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는 세대와 세대를 이어가는 무시간적인 신뢰와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당신들을 필요로 할 때면 당신들은 우리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라는 세대를 이어가는 신뢰의 고백은 실로 의미심장한 것이다.

  헤아림 오늘의 본문은 “세대간의 밀접한 상호 연관성”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킨다. 그 어떠한 세대도 그 앞의 세대가 없다면 생겨날 수 없다. 한 세대는 다음 세대를 위해 그 생활력을 키워주고 생활영역을 마련해 주며 건강한 정신적이고 사회적 유산을 물려줄 책임도 있다.

한 새대는 이전세대에 대한 빚을 지고 있다. 이 빚을 갚는 것은 물질적인 차원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건강한 또 하나의 세대를 세우기 위한 사회공동체적인 노력과 미래적 전망을 통해서 최소한의 것을 보상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것은 세대와 세대를 이어가며 사회적 전통을 만들어 내고 인간사의 풍성한 결실들을 사회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사회 속에서 이러한 신뢰의 끈이 깨어지고 사회적 신뢰를 이어갈 근거를 상실하고 있다는 생각이 앞선다. 원폭투하의 잿더미 속에서 살아남은 13세 소년이 타다 남은 숯꺼멍으로 “저주받을 부모들”이라고 쓰고 있다. “당신들은 이러한 파멸에서 우리를 지켜주려고 전혀 노력하지 않았어요. 그토록 우리를 하찮게 여기려면 당신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를 낳았나요!”라고 절규하고 있는 사회를 향해 치닫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가공할 환경파괴, 사회적 상식의 붕괴, 정의가 땅에 떨어지고 사회적 신뢰를 수렁으로 처박은 오늘의 현실을 향해 성서는 또하나의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나눔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에 대한 지금 당신의 느낌을 말해보세요.

오늘 당신은 사회적 신뢰를 세우기 위해 무엇을 노력하고 있습니까 세대와 세대를 이어주는 사회적 신뢰는 어떻게 공유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수요모임(십계명연구⑦)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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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읽기 / 출애굽기 20:1-17, 신명 5:6-21 “너희는 살인하지 못한다.”(출애굽기 20:13)

 앎 사람은 “관계”를 근거로 하여 삶과 사회를 엮어내고 있다. “사회적 관계”는 사람살이의 기본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고, 이것이 지켜지고 관계가 건강하게 존속되는 속에서 사람됨의 내용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살인금지”는 건강한 “사회적 신뢰관계”를 염두에 둔 요청이다. “사람됨”을 지켜내고 이를 더욱 건강하게 만들어가려는 노력은 “어떠한 이유에서도 사람이 사람에 대한 일방적인 관계를 거절하는 것”과 연결되는 것이다.

“살인”은 사람에 대한 “극단적인 일방성”에 해당된다. 신뢰관계를 파괴하며 사람됨을 인정하지 않는 “일방성”이다. 살인행위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 뿐 아니라 사람이 엮어내는 사회와 역사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온갖 죽임의 문화와 죽임의 행태를 포함한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 “살인에 대한 금지”는 단지 “죽임과 죽이지 않음”이라는 외적인 결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보다 적극적인 내용, 즉 “생명을 살리는 일”에 대한 전제가 분명하게 담겨있는 말이다. 그것은 생명이 죽음에 이르지 않도록 방관하지 않고 죽임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며 동료인간의 삶과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특히 “죽임”의 위협에 노출되어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는 이들, 이러한 약한 사람들의 “생명”은 죽임의 세력에 속수무책인 경우가 많다. 이 지점에서 “살인금지 규정”은 약한 생명에 대한 무관심이나 무책임을 향해 “생명 지킴”을 촉구하는 대목이다.

  헤아림 “타인의 생명을 존엄하게 여기는 것”은 자신의 삶을 존중하고 “자기존엄”을 인정하고 지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적극적인 살림행위”와 연결되는 것이다. 이는 누구도 일방적으로 착취되지 않고 일상적인 노동의 건강성이 지켜지는 것이고, “물리적인 약함과 강함의 도식”에 의해 사람이 재단되지 않는 것, 이른바 온갖 “죽임의 행태”를 근본적으로 넘어서는 “살림의 관계”를 염두에 두는 것이다.

“죽임을 넘어서는 살림”은 앞서 말한대로 단순한 “생물학적인 죽임”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심리적.사회적.민족적인 죽음을 포함하여 이를 넘어서고 이를 헤쳐 일어서는 살림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이는 뒷짐지고 방관하는 “사회적인 구경꾼”이 된 경우에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다해도 “죽임”과 무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가공할 환경파괴와 사회적 관계의 파괴, 일상화 되어버린 죽임의 문화에 대해 무감각해지면 질 수록 “나 홀로 선한 사람”이라는 말이 갖는 자기모순과 한계에 결국 도달하게 된다.

“살림”은 단순히 “죽임”이란 말의 양극단이거나 반대말이 아니다. 죽임에 저항하고 이를 넘어서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죽임의 도전을 수그러트리고, 죽임 상황을 변화시켜 “살림의 토양”이 되게 하는 적극적인 변혁을 포함하는 것이다. “죽임을 넘어서는 살림”이 어떤 특정한 사실에 대해 예의를 갖추는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일상화된 죽임의 현실을 넘어서는 생명이란 점을 분명히 해두지 않으면 안된다.

  나눔 우리가 만나는 “일상적 관계의 파괴와 신뢰관계의 붕괴”를 통해서 불러들이는 “죽임현실”과 “살인금지 규정”을 연결지어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삶과 신뢰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은 사람됨을 이어가며 이를 성숙하게 만들어 가는 “살림행위”이다. 우리의 “일상적인 살림행위”에 대해 말해봅시다.

 ▣ 수요모임(십계명연구⑧)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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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읽기 / 출애굽기 20:1-17, 신명 5:6-21 “너희는 간음하지 못한다.”(출애굽기 20:13)  앎 “간음”은 사람다움을 지탱하는 관계를 깨고 빼앗는 “모든 성의 착취와 폭력”을 일컫는 말이다. 이것은 사람과 사람을 잇는 “사회적 약속”을 파괴하는 죽임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뜻에서 이는 살인금지 규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살인행위가 “사람과 사람의 관계 뿐 아니라 사람이 엮어내는 사회와 역사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온갖 죽임의 문화와 죽임의 행태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간음은 “사회적.인간관계적 차원의 죽임”이라고 할 수 있다.

성(性)이 상호관계 속에서 존중되지 않고, “일방적”이거나 “사물화”되었을 때 사람을 전체의 시각으로 볼 수 없게 만든다. “사람을 사람되게 하는 사람됨의 전체”가 무너지는 자리는 바로 죽임의 행위가 일상화된 자리인 것이다. 여기에서 사람됨은 철저하게 부정되고 근거를 잃게 된다.

  헤아림 성서에서 인간의 “성”은 생명의 차원에서 언급하거나 궁극적으로 “야훼의 창조행위”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언제나 야훼의 영역으로 생각하였다. 그것은 거룩한 것이고 “결혼”이라는 야훼 앞에서의 약속 안에서 이를 수 있는 것으로 고백되었다.

그러나 성(性)이 인간의 이기적 욕망과 관련되어 착취되고 폭력적으로 접근되는 경우에 이러한 생명적이고 창조적인 연결성이 끊어지고 이것과 관련한 사회적인 약속은 철저히 파괴되고 만다. 앞서 말한대로 성의 영역은 사람됨에서 독립된 어떠한 수단일 수 없다. 그것은 사람의 전체 속에서 언급되지 않으면 안된다. 성(性)이 “수단”이 되는 자리에서 사람됨의 파괴와 상실을 경험하게된다.

이렇듯 사람을 전체의 눈으로 볼 수 없을 때, 성(性)이 거룩한 것으로 존중되거나 그것에서 “생명성”을 읽어들이지 못한다. 남성과 여성이 모두 더불어 만들어 내는 창조적인 삶과 역사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는 가운데 그 생명성이 되살아 날 수 있을 것이다.

생명은 “들숨과 날숨의 계속되는 긴장” 속에서 이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긴장이 끊어지는 것을 죽음이라고 한다. 생명을 이어가는 이러한 긴장을 자연스럽게 이어가야 하는 것처럼, “性의 생명성을 이어가는 긴장”은 이렇듯 진지하게 존중되고 지켜져야 한다. 성의 생명성을 이루는 긴장이 깨어지는 상황은 사람됨을 포기하거나 이를 모른 채 함으로써 스스로를 속이는 경우이다. 이러한 생명적 긴장을 지키는 노력이 공동체적 사람됨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나 눔 사람이 사람을 “전체의 시각”으로 보지 않고 일방적인 수단으로 취급할 때 어떠한 결과를 만나게 될까요 성을 수단으로 생각하는 오늘의 사회적 경향을 자신의 생각에 비추어 말해봅시다.

우리의 삶 속에서 “성의 생명성을 이어가는 긴장”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까요 성의 착취와 폭력이 만연한 사회에 성의 거룩과 생명을 회복하는 공동체적 노력에 대해서 말해봅시다.

 ▣ 수요모임(십계명연구⑨)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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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본문읽기 / 출애굽기 20:1-17, 신명 5:6-21 “너희는 도둑질하지 못한다.”(출애급기20:15)  앎 “도둑질하다”는 단어(동사)의 원어적인 뜻으로 보면, 동료인간의 자유를 박탈하여 자신을 위해 노예화하는 것, 즉 “인간을 도둑질하는 행위”를 뜻한다. 그것은 사람이 사람을 침해할 수 없다는, 어떠한 방식으로도 그 사람의 사람됨을 가로막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것은 상대의 소유물을 침해하는 것을 포함하여 사람 자체를 “사유화”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삶과 자유를 서로가 인정하고 지켜야 하는 것이며 이러한 자유는 그 사람에게 “생명”에 해당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에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참담한 경험에 근거하고 있다. 사람을 침해하고 자유를 빼앗는 경우 사람됨이 손상을 입고 인간관계 자체가 사라지고 만다. “관계”를 잃은 사람이란 생각할 수 없다. 그러한 경우 일방적으로 규정된 껍데기가 남아 있을 뿐이고 사람다움이 고스란히 깨어져 나간 상태가 된다. 땅의 사람들 “하비루”, 사람다움을 인정받지 못했던 에집트 노예들은 참담한 시절을 지나면서, 이제 새로운 땅에서는 더 이상 “사람다움을 그 누구도 침해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일구어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헤아림 이것은 또한 모든 종류의 잘못된 소유 및 소유행태를 포함하고 있다. 소유는 그 어떠한 것도-그것이 사람이든 물건이든 간에-소유하고 있는 인간 자신의 소유일 수 없다. 죽음을 넘어서는 소유는 사실상 아무것도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근원적인 의미에서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빌어 쓰고 있는 “대차물”일 뿐이다. 소유물은 그러므로 사유화할 수 없는 것이고 이것을 독점하거나 상대의 것을 빼앗거나 할 수 없는 신성한 것이다. 상대의 소유물은 곧 하나님의 것이다. 이것을 침범해서는 안된다.

사람은 사람다움을 상대로부터 엮어내고 더욱 풍성하게 한다. 서로가 상대의 삶과 자유를 인정하고 지켜주는 것은 곧 자신의 삶을 인정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사람은 상대를 통하여 자기 실체를 확인하고 폭을 넓혀 갈 뿐 아니라 삶을 이루어 간다. 여기에서 일방적인 어떠한 행위도 사람됨을 가로막는다.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역사를 실현해 가신다. 누구라도 제외됨 없이 사람됨의 바탕, 곧 “하나님의 형상이 깃든 존재”들이고, 이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침해받아서는 안된다. “도둑질”은 사람됨의 바탕을 침해하는 것이고, 삶을 파괴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손상시킨다. 모든 형태의 착취와 독점,탐욕과 이기심이 바로 이에 해당되며, 깨어지고 뒤틀려진 삶과 사람관계의 파괴적인 일방성이 바로 그것이다.

“너희는 도둑질하지 못한다.” 이것은 “너희는 서로의 사람됨을 침해하지 못한다”, “파괴적인 일방성을 너희 사이에 두지말아야 한다”는 말이고, “서로가 상대의 삶에서 자신의 삶을 확인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 눔 “너희는 도둑질하지 못한다”는 계명이 지금 당신에게 어떠한 생각을 갖게 합니까 우리도 모르는 동안에 범하기 쉬운 자유와 사람됨의 침해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서로의 사람됨과 삶의 자유를 인정하고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한다고 봅니까 이 사회를 향해 이 계명이 주는 메시지에 대해 이야기 해봅시다.

▣ 수요모임(십계명연구 열번째)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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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2

 본문읽기 / 출애굽기 20:1-17, 신명 5:6-21 “너희는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못한다.”(출애굽기20:16)  앎 아홉번째 계명의 “삶의 자리”는 사람에 대해 법적인 판결을 하는데 있었다. 법을 집행하는 현장에서 “증인”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그의 역할은 실제적인 진실을 찾는 것이면서, 동시에 사회공동체가 그에게 요구하는 성실성을 확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공동체 안에서 이웃의 삶에 다가서는 건강한 태도를 전제하고 있다. 그것은 어제와 오늘을 잇고 내일로 이어지는 공동체의 연결성과, 사람과 사람을 잇는 관계를 근거하여 “진실한 성실성이 어떠한 것인지”를 판단하는 과정을 말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개인의 이기적인 감정이나 자기중심적인 판단이나 “일의 앞뒤를 생각하지 않는 편협한 판단방식”을 거절한다.

아울러 거짓을 말하는 것도 그러하지만 “꼭해야 할 말을 하지 않는 것”도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고 상황을 무책임하게 이끌어 가는 것이다. 말을 해야 할 때와 하지 말해야 하는 때를 헤아려 알고, 입술에 올려야 하는 말과 그렇지 않은 말을 알아차리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무죄한 사람의 피나 고통”은 거짓 증언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성서는 말한다.(왕상21:13) 실로 진실한 마음가짐이란 단지 말이나 행동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것 이상의 깊은 삶의 자세를 뜻한다. 진실은 인간 상호간의 만남 속에서 숙성되는 과정에 해당된다. 그것은 결코 단 절되어 있는 감정이 아니다.

 헤아림 “이웃에게 불리한 말이 아니라 도움이 되는 증언”이란, 어떠한 정해진 상황에서 “우리의 이웃은 과연 누구인가”를 판단하는 것과 연관된다. 우리의 증언이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 말인가, 누구를 위한 말인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즉, “힘있는 사람이나 재력이 있는 사람들,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인가” “아무런 특권이 없는 사람들,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말인가”를 헤아려야 한다. “한 사람이 혹은 공동체가 ‘진실’이라는 명찰을 달고 ‘자기 중심적인 확신’속에서 내뱉은 독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아픔으로 몰아 넣고 시대를 병들게 했는지 모른다. 이러한 예는 얼마든지 있다. 작년에 新공안정국을 만들어 냈던 “박 홍씨의 주사파 발언”이나 일방적인 매스컴의 보도가 그 좋은 예이다.

사람들 서로가 “진실을 일으켜 세울 수 있도록 하는 진정한 신뢰의 풍토”, 이것은 여러 가지 원인을 가지고 있는 사건을, “마디 마디 끊어진 감정이나 단절된 결과만으로” 보려고 하지 않고 “관계와 관계를 이어주는 전체의 과정”으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눈을 가지지 않을 때 쉽사리 거짓증언으로 이웃과의 관계를 해치게 된다. 모든 증언은 실로 “이웃의 생명과 명예와 삶에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책임, 즉 이웃에 대한 존경과 책임을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 져야 하고, 인간 상호간의 신뢰를 이어가는 “사회적인 사랑”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마치 흑백그림을 그리듯이 어떠한 상황이나 사건에 대해서 경솔하게 잘잘못을 자기 식으로 가위질하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진실”의 가정 무서운 적은 직접적인 거짓말 속에 보다는 오히려 “성과” 혹은 “결과”만을 향한 눈 속에 있다. “성과 혹은 결과”에 눈이 멀어버린 경우에 진실을 말하거나 추구하는 힘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 속에는 사람의 관계가 자라잡지 못하고 냉정한 탐욕이나 이기심만이 자리하고 있다. 성과에 맞추어 매사를 판단해서는 안되며, 성과가 있는 것이, 양이 많은 것이, 비싼 것이, 많은 것을 가져다주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어떠한 경우에도 결과를 묻는 물음으로 진실을 묻는 물음을 억압해서는 안된다.

 나 눔 “거짓 증언을 못한다”는 계명이 지금 당신에게 어떠한 생각을 갖게 합니까 우리 삶에서 발견되는 “진실의 명찰을 달고 있는 자기확신”에 대해서 말해봅시다.

“진실을 일으켜 세울 수 있도록 하는 진정한 신뢰의 풍토”를 위해 우리가 해야하는 일이나 태도는 어떠한 것인지를 나누어 봅시다.

 ▣ 수요모임(십계명연구 열한번째) 199

5.

 3. 1

 본문읽기 / 출애굽기 20:1-17, 신명 5:6-21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못한다. 네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지 탐내지 못한다.”

 앎 “탐낸다”는 것은 “탐내는 감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으로부터 뻗어 나오는 “취하는 행동”도 포함하고 있다. 이는 실로 후속행동이 뒤따르는 “지향성을 지닌 감정”이다. “그릇된 소유충동의 행위(도둑질)”를 자극하는 탐심을 제어하고 이를 금하지 않고서는 이웃 사랑이 불가능해지며 공동체의 평화는 깨어지고 만다.

계약공동체의 평화와 평등사회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공동체가 지켜야 할 원칙은 “인간의 동등한 상호성”이다. 누구나 서로를 침해할 수 없고, 서로의 “집”을 침해할 수 없다. 여기에서 “집”은 매매가 가능한 물건이 아니라 “공동체를 실현해 가는 최소의 단위”를 뜻하고, 대대를 이어 사람됨을 이루어 가는 “기본적인 권리공간”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웃의 “집”에 대한 “탐심”은 이웃의 기본 권리와 기초공동체 실현의 일상적 과정에 심각한 문제를 가져오는 행위이다.

어떠한 권리에 있어서도 일상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문제가 된다. “권리의 일상성”을 침해하거나 파괴하는 것은 곧 “이웃의 인격적인 영역을 침해하고 삶을 실종시키는 것”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것은 심지어 “빚을 갚아야 하는 관계”의 테두리 안에서조차도 가난한 이웃의 일상적이고 인격적인 권리공간은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많은 경우에 빚을 갚지 못하는 가난한 이웃들의 일상적 권리를 부자들에 의해서 “합법적으로” 빼앗기거나 농락 당하기 쉽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다.

  헤아림 “탐심”은 다른 인간을 자기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욕망에 기초하고 있는 “약탈자의 기질”이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이 계명을 적용한다면 그것은 “경쟁력을 악용하는 행위” 쯤 될 것이다. 보잘것없는 수입으로 매년 오르는 전세금을 따라갈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집주인의 높은 집세 강요는 이러한 종류의 착취에 해당된다. 집을 헐고 건물을 지어 높은 수익을 올리려고 하는 집주인의 욕심은 가난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권리를 빼앗고 농락하는 것이다. “능률과 소비의 경쟁”을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시하여 사람들의 욕구를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고 또 자극하는 것은 사물의 가치를 우상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치기준 속에서 자연을 착취하고 회생 불가능한 상태로 파괴시키는 자연 약탈행위도 이에 해당된다.

이 사회 속에서 어떠한 “이윤을 얻는다는 것”이 힘없는 이웃으로 하여금 “생존권의 일부를 잃게 하는 빼앗음”을 근거하고 있는 현실을 향하여 이 계명은 말하고 있다. “너”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다만 영원히 만족시킬 수 없는 “내” 몫에 대한 주장만 알고 있는 약탈적인 시대상은 사람의 인격적인 공동체를 없애버린다.

  나 눔 이 계명을 읽고 지금 당신은 어떠한 생각을 하게됩니까 나는 사람의 “인격적 가치”를 중요시하고 있는가 아니면 실용적인 가치나 필요에 중요성을 두고 있습니까 오늘날 이 계명이 중요하게 생각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생활 속에서 목적달성을 위해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하는지 말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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