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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살아계신 주님(1) (계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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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역사 속에서 가장 기억될 만한 로마 황제가 있다면 도미티 안 황제일 것입니다. 도미티안 황제는 티투스 황제의 동생입니다.

티투스 황제는 A.D. 70년에 팔레스타인에 도착해서 예루살렘 을 정복한 유명한 황제로서, 뛰어난 잔략가였고 대단히 지혜롭고 명석한 정치가였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짓밟기도 했지만 결코 잔인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티투스 황제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도미티안은 자기 형과 는 달리 대단히 잔인했습니다. 사담 후세인보다 더 잔인한 황제였 을지도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대단히 반기독교적인(anti ­Christian) 사람입니다. 바로 이 도미티안 황제로부터 시작해서 본격적인 황제 숭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로마 시 민들은 로마의 황제를 가리켜서 우리 주(主), 우리 하나님 이라는 명칭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로마 시민은 아니더라 도 로마의 통치가 미치는 영역에 거주하는 자는 누구나 씨이저는 나의 주님이십니다라고 서로 인사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기록하고 또 받았던 1세기의 그리 스도인들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상대방이 가이사는 나의 주님이십니다라고 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아닙니다. 나의 주님 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 고백 때문에 1 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이 순교의 제물로 희생당한 것입니다. 물론 그 리스도인들 중에는 자신의 신앙을 버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의 그리스도인들은 구차하게 육신의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순교의 제물로 자기의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가 어디 있었다고 생각합니까? 저는 그들이 살아 계신 주님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편지를 기록한 사도 요한은 30대 초반에 예수님을 마지막으로 보았습니다. 그가 이 편지를 기록할 당시에는 그때 이후로 50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을 때인데, 그때에도 요한을 위시한 모든 제 자들의 주님을 향한 충성심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후로 제자들에게는 신앙의 위기가 있었습 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이 땅에서 뭔가를 이루어 보려고 꿈꾸던 많은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 후에 깊은 실망을 하고 신앙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제자들이 다 시 예루살렘에 모여들어서 그 주님을 증거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마지막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지금도 살아 계신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이 제 자들로 하여금 말할 수 없는 박해와 역경과 환난 속에서 목숨을 던질지언정 자기들의 사랑의 주님을 배반하지 않고 신앙의 길로 달 려가게 했던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습니다. 이 편지를 기록했던 사 도 요한도 살아 계신 주님을 증거하다가 붙잡혀서 밧모 섬으로 귀 양을 왔던 것입니다.

 9절에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 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라고 했습니다. 밧모라는 섬은 지금의 터키에 부속 된 섬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지도자들과 에베소 근처 의 항구 도시 밀레도에서 마지막 작별을 했는데, 그 밀레도라는 섬 건너편에 밧모라는 작은 섬이 지금도 있습니다. 밀레도에서 서 쪽으로 약 48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자그마한 바위 섬입니다.

 물론 사도 요한이 이 섬에서 꼼짝 못하게 묶여 있지는 않았을 것 입니다. 그는 무인도와 같은 이 섬에서 살아 계신 주님과 영적으 로 교통하며 하루하루를 보냈을 것입니다. 그 날도 죽음을 이기시 고 부활한 거룩한 주님께 기도하다가 혹은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다 가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요한은 하나님의 위대한 메시지를 받았 을 것입니다. 그 메시지의 초점은 한마디로 주님은 지금도 살아 계신다입니다.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아마도 18절 말씀일 것입니다.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陰府)의 열쇠를 가졌노니.

그분은 살아 계신 주님입니다. 그분은 세세토록 살아 계시며 지금 도 물론 살아 계십니다. 고통받고 박해받는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 에게 살아 계신 주님이 소망의 주님이었던 것처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고통과 전쟁과 역경과 말할 수 없는 혼란의 세상 한 복판에서도 그분은 여전히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분은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살아 계셔서 무엇을 하십니까? 크게 세 가지로 생각 해 볼 수 있습니다.

 살아 계셔서 교회를 다스리시는 주님 1장 11-16절에 이 메시지가 나와 있습니다. 먼저 11절을 보십시오.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 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 기로.

이 일곱 교회가 다시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소아시아에 이 일곱 교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 교회들보다 훨씬 큰 교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곱 교회를 뽑은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아마도 이 들 교회가 모든 시대, 모든 장소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들의 형편 을 대표한다고 주님이 판단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께서 모든 시대의 교회를 대표할 수 있었던 일곱 교회를 선택해서 사도 요한 에게 이 편지를 보내게 하셨습니다. 주님 자신이 바로 이 교회를 다스리시며 심판하시고 주관하시는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12절에는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라고 되어 있습니다. 일곱 금 촛대는 유태인들이 『메노라』라고 부르는 것인데, 가운데 가 지가 있고 양 옆으로 세 개씩의 가지가 있어서 모두 일곱 개의 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은 촛대만 본 것이 아니라 촛대 사 이로 다니시는 인자 같은 이(13절)를 보았습니다.

이 촛대는 무엇의 상징입니까? 요한계시록 1장 마지막 절에서 촛 대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 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使者)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계 1:20).

 왜 하필이면 교회가 일곱 금 촛대로 싱징되었을까요? 촛대는 빛을 발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주님이 자신의 몸 된 교회에 대해서 가 지시는 가장 커다란 기대라는 것은 새삼스럽게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교회는 빛을 드러내야 합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메시 지가 이 세상 속에 나타날 수 있도록 교회 가운데 임재하시고 역 사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몸 된 교회가 교회로서의 책임과 소명 을 감당하지 못할 때, 주님은 친히 그 교회를 심판하셔서 새롭게 하십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교회가 죄악 가운데 있을 때, 스스 로 그 교회를 심판할 수밖에 없었던 주님의 그 안타까움은 2장과 3장의 메시지를 읽으면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주님에 의해서 끊임없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 서두에서 보았습니다. 과거에는 마르틴 루터와 칼빈 같은 사람을 통한 위대한 종교개혁이 있었습니다. 루터는 예언자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인데, 자기가 뛰어들었던 종교개혁만으로 교회가 새로워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루터는 교회는 계속해서 개혁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교회는 언제나 타락하거 나 오염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몸 된 교회 가 계속 깨끗함을 입음으로써 빛을 드러낼 수 있는, 주님이 쓰시 는 투명한 도구가 될 수 있도록 지속적인 교회의 개혁을 명하십니 다.

 주님은 세상의 빛을 드러내야 할 하나님의 중요한 도구로 세움받은 그 교회를 주장하시고, 그 교회 속에 임재하시며, 그 교회를 다스리시는 분으로 요한계시록의 벽두에 나타나십니다. 교회를 다스 리시는 살아 계신 주님이 어떤 모습을 하고 계신지 13-16절을 보십시오.

촛대 사이에 인자(人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 슴에 금 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 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죄우에 날선 검(劍)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발에 끌리는 옷 주님이 사도 요한을 통해서 이 메시지를 선포하실 때, 물론 우리 가 전혀 몰랐던 사실을 계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메 시지를 받아도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면 그것은 계시가 아닙니다.

계시라는 말 자체가 뚜껑을 열고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다면, 그것은 계시가 아 닙니다. 그러므로 1세기의 성도들이 처음 이 계시를 받았을 때, 그들은 여기에 나오는 표현들에 익숙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여러 가지 이미지들은 이미 구약에서 사용 된 것들이 많습니다. 이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발에 끌리는 옷이라고 하면 쉽게 제사장의 옷을 생각할 수 있습니 다. 예수님은 제사장, 특별히 대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십니다.

대제사장의 책임은 사람들의 문제와 죄와 고통과 염려를 대신 짊어 지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해결자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분 은 지금도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문제를 가지고 나아오면 모든 것을 책임지십니다. 주님은 교회의 사역을 통하여 세상의 짐과 성도들의 짐을 해결하시고 역사 속에 진정한 소망으로 등장하십니다.

 가슴의 금 띠 사실 제사장은 금 띠를 띠지 않았습니다. 이 금 띠는 왕이 띠고 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사장이실 뿐만 아니라 왕이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제사장 사역을 통해서 사람들의 문제를 담당하시고 역사 속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분은 지금도 그런 방법으 로 역사 속에 관여하시고 하나님의 경륜을 펼쳐 가십니다. 그분은 아직도 왕이십니다. 그분은 제사장이고 왕이십니다.

 흰 양털 같고 눈 같은 머리 이 상징의 의미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소극적으로 이것은 예수님의 무죄성(無罪性)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는 그분 의 거룩성을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불꽃 같은 눈 그분은 나를 꿰뚫어보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그분 앞에서는 아무 것도 숨길 수가 없습니다. 그분은 참으로 공 의로우시고 참으로 전지(全知)하십니다. 그분의 이러한 이미지를 불꽃 같은 눈이라는 표현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풀무에 단련한 주석 같은 발 우리들이 사용하는 말 가운데 발로 밟아 버려라는 표현이 있는 데, 그것은 정복자 혹은 승리자의 이미지를 연상하게 합니다. 이 발이라는 단어는 로마 당시의 문화적인 표현으로도 자주 사용 되고 있었습니다. 사단을 그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는 표 현이 성경에도 나오는데, 그것은 정복자의 이미지, 승리자의 이미 지입니다. 주님은 진정한 정복자요, 진정한 승리자입니다. 더군다 나 그 발이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과 같다는 것은 그만큼 견고 한 승리자의 발을 가지고 계신 그분이 진정한 역사의 승리자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이 메시지를 받을 당시의 세상에서는 네로가 승리자였 고 도미티안이 승리자였습니다. 박해와 고난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 들은 패배자차럼 보였습니다. 이때 주님은 승리자의 이미지로 등장 하십니다. 네로가 승리자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역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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