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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말론적 삶의 태도 (계 14: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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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간에 종말론 논쟁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말세에 대해 서 사람들이 많이 논쟁하는 것도 말세의 증거 중에 하나라고 생각 됩니다. 그런데 말세에 대해 논쟁하는 사람들을 보면, 예수님이 언제 재림하시는가 하는 그 시각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알게 됩 니다. 예를 들면 1992년 10월에 예수님이 오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말세에 대해 논쟁하는 대부분의 사람들 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마음의 자세나 삶의 태도에 대해서 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과연 재림을 준비하는 태도보다 재림의 시각 자체가 더 중요한 것일까요?

공항에 가면 비행기의 이륙과 착륙을 통제하는 관제탑이 있습니다.

그 관제탑에서 일하는 기사는 비행기의 착륙 시간을 정확히 알고 있지만, 그 시간을 알고 있다는 것이 그의 삶에 큰 변화를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비행장 저 바깥에서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 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신부는 자기 신랑이 도착하는 정 확한 시간을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이제 곧 신랑이 도착하리라는 기대만으로도 큰 흥분과 감격을 안고 화장실을 정신없이 왔다갔다 하면서 얼굴을 매만지고 신랑 맞을 준비를 하게 될 것입니다. 비 행기의 정확한 착륙 시간을 알고 있는 관제탑 기사와 정확한 시간 은 모르지만 신랑이 곧 오리라는 기대를 갖고 기다리는 신부의 삶 의 자세는 너무 많이 다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것 자체도 의미 있지만, 주님을 어떤 자세로 기 다리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본문에는 이 역사의 최후의 위기를 앞두고 세 명의 천사가 등장합니다. 각각의 천사들이 종말 의 메시지를 선포하는데, 그 속에서 우리는 이 종말의 시대를 살 아가는 성도의 삶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 이제 각각의 메시지를 분석해 봅시다.

심판의 때가 임박했다. 이것이 첫번째 천사가 선포한 메시지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 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지금까지 역사에는 많은 위기가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취 급하고 있는 때는 그 많은 위기들 중에 하나가 아니라 결정적 위 기, 역사의 마지막 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있어 왔던 심판과는 다른 마지막 심판입니다.

 천사는 이 위기가 임박했음을 선포할 뿐만 아니라 이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암시해 줍니다. 6절을 보십시 오.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

천사가 공중을 날면서 메시지를 선포하는데, 영원한 복음을 가진 그런 이미지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천사가 직접 복음을 전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천사가 직접 복음을 전한 사례는 없습니다. 어떤 주경학자의 말처럼, 이 천사는 그 영원한 복음을 가지고 마지막 때에 그것을 전달할 자를 기다리고 있는 이미지일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 복음을 전해받을 사람은 누구입니까? 여러 나라, 족속, 방언, 백성에게 전할….

모든 나라와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나라와 족속은 그 의미가 서로 다릅니다. 사실 지금은 세계의 모든 나라에 복음 이 들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족속에게 다 복음이 전해진 것은 아닙니다. 한 나라 안에도 여러 개의 족속이 있습니다. 미국의 예를 생각해 보십시오. 또 중국이나 소련의 경 우도 여러 족속들이 섞여 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이런 족속들을 people group이라고 일컫습니다. 이들 중에 아직도 자기들 말로 된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은 족속들이 수천 족속입니 다. 그들에게까지 다 복음이 전해져야만 예수님이 오십니다.

모든 나라, 모든 족속, 모든 방언(language), 모든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지고 있는 천사. 어떤 주석을 읽 어보면, 여기의 영원한 복음을 특별히 말세에 전할 또다른 복음처 럼 설명하는 것을 종종 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은 성경 전체 의 계시와 부합되지 않습니다. 복음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서 영원한 복음이라고 말했을까요? 복음 자체의 효력이 시공(時空)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복음 은 과거에도 복음이고 지금도 복음이고 앞으로도 복음이고 말세에도 역시 같은 복음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복음입니다. 그리고 복음의 능력은 진실로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을 바꿉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세에 이 영원한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는 무 엇입니까? 7절에 그 목적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 리라.

지구촌의 모든 백성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 리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모든 백성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하기 위해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 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실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사람의 가장 중요한 존재 의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다른 모든 종류의 피조물과 전적으로 다른 한 가지 특성이 있는데, 그것은 예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실 때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배할 수 있는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영(靈)이신 하나님을 닮아 영으로 피조된 인간이기에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중요한 특성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예배를 배우지 못한 사람, 나를 지으신 나의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인간으로서의 존재 의의를 상실한 것입니다. 말세는 그들에게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들을 향한 심판의 때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속히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 지구촌의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받고 그들을 창조하신 영광의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기 위해서 말세에 등장한 이 첫번째 천사는 그 심판의 시기가 도래했음을 선포합니다. 그것이 첫번째 메시지입니다.

 바벨론이 무너졌다 두번째 천사가 등장해서 8절에서 그 메시지를 전합니다.

또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 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성경에서 바벨론은 항상 하나님을 거역한 세속성의 상징입니다. 문 자 그대로의 바빌로니아 왕국은 지구상에서 자취를 감췄지만, 하나 님을 반역하는 모든 세속성을 대표하는 바벨론의 원리는 지금도 우 리 가운데 살아 있습니다.

 바벨이란 이름이 제일 처음 등장하는 곳은 창세기 10장입니다.

여호와 앞에 특이한 사냥꾼인 니므롯이 바벨의 시조입니다. 이어지 는 장인 11장에는 그 유명한 바벨 탑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니므롯의 선동 때문에 바벨탑이 쌓아지지 않았나 생각합 니다. 이 바벨탑 사건이 보여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무엇입니 까?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진노하실 것에 대비해서 다시는 흩어 지지 말고 똘똘 뭉쳐서 이제부터 우리의 이름을 내자고 하면서 바 벨탑을 쌓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고 우리의 이름을 내자는 주장, 그것은 하나님을 반역한 인간 중심의 문화, 인본주의 문화 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을 거스리는 이러한 모든 사고 방식과 노력 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바벨론입니다. 말세가 가까울수록 이 바벨 의 원리가 점점 더 이 땅에 횡행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번째 천사는 큰 성 바벨론이 무너졌다고 말합니다.

무너졌다는 말을 두 번씩이나 쓴 것은 그 확실성을 강조하기 위해 서입니다. 복음서에서 보면 예수님이 어떤 말씀을 강조하시려 할때 진실로 진실로라는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그 표현은 아멘 아 멘이라는 말을 번역한 것으로서,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로 두 번 반복한 것입니다. 복음서를 읽다가 진실로 진실로라는 표현이 나오면 눈을 번쩍 뜨고 읽으십시오.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시는 것이니까요.

여하튼 바벨론이 분명히 무너졌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사건인데 과 거로 표현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성경에서는 앞으로 일어날 사건인 데 그 가능성이 너무도 확실할 때 「결과 동사」 혹은 「예언적 과거」라고 하는 과거 동사를 씁니다. 여기서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세속성이 기어이 무너질 것이기 때문에 과거 시제로 쓴 것입 니다.

 그런데 바벨론이 왜 무너집니까? 음행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겨 야 할 모든 나라, 모든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을 섬기게 만들었으니 그것이 음행입니다. 우리의 애정, 우리의 경배 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한 분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 하나님 에게서 다른 데로 관심을 옮겨가는 것이 바로 음행입니다. 음행으 로 세상을 지배하던 바빌로니아 왕국은 무너지고야 말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성경에서부터 계속 강조되는 성경의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그들이 모든 나라를 통해서 또 수많은 종류의 삶의 영역들을 통해서 계속 사람들의 마음을 충동질하겠지만 결국 그들은 무너지고 야 맙니다.

 예레미야서 51장 찾아보십시오. 바벨론에 대한 예언입니다. 6절 에 보면 바벨론 가운데서 도망하여 나와서 각기 생명을 구원하고 그의 죄악으로 인하여 끊침을 보지 말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보수( 報讐)의 때니 그에게 보복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바 벨론적인 삶의 원리를 따라 살던 사람들은 바벨론과 함께 멸망하지 않으려면 거기서 빨리 뛰쳐나와야 한다는 경고입니다. 반(反)바벨 론적으로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세상을 본받지 않는 삶의 원리입 니다.

그 다음 절인 7절을 보십시오.

바벨론은 여호와의 수중의 온 세계로 취케 하는 금 잔이라 열방 이 그 포도주를 마시고 인하여 미쳤도다.

바벨론은 바빌로니아에게만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라 모든 나라들에 게 바벨론의 독주를 마시고 미치게 합니다. 전세계가 하나님을 반 역하는 나라로 변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8절의 예언을 보십시오.

바벨론이 졸지에 넘어져 파멸되니 이로 인하여 울라 그 창상(創 傷)을 인하여 유향을 구하라 혹 나으리로다.

바벨론은 무너지지 않을 것같이 그 강성함을 자랑할 것이지만, 어 느 한 순간에 갑자기 파멸 속에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의 때입니다. 두번째 천사는 바벨론의 몰락을 선포하였습니다.

우리는 멸망할 세상과 함께 멸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께만 진정한 애정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말세를 사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축복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짐승의 표를 받았던 사람 들, 그들에게 임할 것은 하나님의 진노밖에 없습니다. 그 하나님 의 진노가 무엇입니까? 본문 10절을 보십시오.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 절에 나타납니다.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 하리라 하더라.

사람들이 적그리스도를 경배하고 세상을 따라서 살았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편하게 살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기다리고 있 었던 결국은 편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쉼을 얻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영원히 쉼을 얻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이겠습니까? 우리가 하루 종일 일하면서도 희망이 있는 것은 조금 있다가 집에 가서 쉴 수 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런데 밤낮으로 쉼을 얻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그 고통이 어떠하겠 습니까? 이 고통이 복음을 거절하고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마지막 형벌입니다.

 이들과는 반대로 복음을 따라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축복 을 약속하십니다. 그 축복의 대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십시오. 1 2,13절입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 을 지키는 자니라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킨 자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 그리고 자신의 신앙을 타협하지 않으려는 삶의 자세 때문에 죽 은 그리스도인들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이들이 받는 복의 내용이 13절 하반절에 나타납니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여기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과 거절한 사람의 축복과 형벌이 얼마나 대조적으로 나타나 있습니까? 복음을 거절한 사람들에게는 영원히 쉼이 없으나 신앙을 지킨 성도들에게는 마지막 보상으로 쉼이 주어 집니다. 저는 인생의 진정한 승리자는 마지막에 쉴 수 있는 자, 마지막에 유쾌하게 눈을 감을 수 있는 자,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 에 들어갈 수 있는 자라고 생각합니다.

 하루의 일을 다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쉬면 제대로 쉴 수 없습니 다. 또 마치긴 마쳤는데 부당한 방법으로 마쳤을 때도 편안히 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잘 보낸 하루가 편 안한 잠을 가져다 주고 잘 보낸 일생이 편안한 죽음을 가져다 준 다고 말했습니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습니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주 안에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를 믿는 믿음 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들, 윤리적 성실성과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성실성을 가지고 주님을 신뢰하며 살았던 사람들, 그들만이 주 안 에서 죽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진 정한 안식입니다.

안식에 대한 인간의 바램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어느 문화 권에나 보편적으로 존재했습니다. 누구나 다 진정한 쉼, 참된 쉼 을 누리고 싶은 열망을 갖고 있습니다. 희랍 사람들은 월요일날 쉬었고 페르시아 사람들은 화요일날 쉬었습니다. 수요일에는 앗시리 아 사람들이, 목요일에는 이집트 사람들이, 금요일에는 터키 사람 들이 쉬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토요일에 쉬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 도인들은 주일에 쉬었습니다. 이처럼 안식에 대한 인류의 열망이라 고 하는 것은 보편적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안식일도 있고 안식년도 있지만, 결국 이러한 것들은 영원한 안식에 대한 인간의 바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옛날 저 미국 남부에서 백인들에게 학대받고 시달리던 흑인 노예들 이 부르던 노래 중에 다음과 같은 가사가 있다고 합니다.

그 어느 날, 내일이 일요일이 되리라.

그 어느 날, 날마다 일요일이 되리라.

주일에는 쉴 수 있으니까 그 쉼에 대한 열망을 노래로 표현한 것 입니다. 영원한 안식에 대한 인간의 열망, 그러나 그 영원한 안 식 속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주님 안에서 살던 사람들입니다.

주님 안에서 산다는 말은 예배당만 왔다갔다 하면서 산다는 말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의 원리를 따라 성실하게 산다는 말입니다.

마지막에 쉴 수 있는 자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성실하게 살아가는 자세를 견지해야 합니다.

 이제 세 천사의 메시지를 정리해 봅시다. 첫번째 천사는 심판의 때가 가까왔으므로 부지런히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했고 , 두번째 천사는 바벨론의 몰락은 정해진 사실이므로 세상을 사랑 하지 말고 하나님만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세번째 천사 는 하나님의 진노와 축복의 약속을 전하면서 주 앞에 축복받는 자 되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라고 권고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말 세를 사는 성도들의 종말론적 삶의 태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 너무도 필요한 안식, 그러나 참된 안식을 사모한다면 오늘은 주님 말씀을 따라 정직하게 땀을 흘릴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최선을 다하며 살 때, 주께서 날 부르실 때 주님, 이제 제가 쉬려 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때 주님은 내가 너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리라고 말씀하실 것입 니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마지막 날의 그 멋진 영원한 안식을 위해서 말세라고 하는 이때에 더욱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 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우리가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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