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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화평케 하는 일 (눅 19:4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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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25년 전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평화를 사랑하고 정의를 갈망하던 대학생들의 무참한 죽음에 애도를 표했습니다.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면서 자유당 정권의 부패와 독재에 종말을 요구하면서 전국 각지에 있는 수만명의 학생들이 번져 오르는 저항에 참여했습니다.

4.19 아침의 거대한 플래카드는 다음과 같이 외치고 있습니다.

민주 위한 학생 데모 총칼로 막지 말라!
협잡과 부정 선거를 규탄한다!
데모가 利敵이냐, 暴政이 利敵이다!
시민들이여, 정의를 찾자!

한국의 젊은이는 그들 조국의 양심을 대변해서 용감하게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날이 끝나기도 전에 무장 경찰의 폭력은 타락한 독재 정권을 보호하면서 잔인하게도 수많은 사상자를 만들었습니다. 조선일보에 의하면 그날 저녁까지 115명이 살해되고 730명이 다쳤다고 합니다. 결국 李政權은 타도되었습니다. 그것은 독재와 부패와 잔혹성을 넘어선 정의와 용기와 자유의 개선을 의미하는 위대한 승리였습니다. 그러나 평화에의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1980년 5월 17일 광주에 갔던 우리 학교 학생의 한 사람은 그 이후 그를 계속 악몽에 시달리게 만든 무참한 광경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삼천명의 전투 경찰이 그곳에 투입되었습니다. 평화적으로 저항하는 자들을 고립시키기 위해 모든 길은 차단되었고, 그들이 피신하지 못하도록 최루탄 가스가 사람들의 무리 속에 뿌려졌습니다. 서울로부터 삼천 명의 공수 부대원이 투하되었습니다 이들은 총검으로 눈에 띄는 사람을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마약 중독제를 먹은 자처럼 무자비한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곧 거리는 피로 물들고 죽은 시체는 군대 트럭에 실렸습니다. 공수 부대원들은 시민의 집 대문과 울타리를 부수고 집안으로 그들을 추적했습니다. 몇몇 여학생이 그들에게 끌려나가 그들 총검에 의해 희생되었습니다. 한 여학생을 죽이고 있는 공수 부대원에게 저항하던 70세의 노파도 거리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한 나라의 명백한 지지 위에 잔혹한 살생이 계속 되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하루입니까! 확실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잊고 계셨습니다.

기원전 63년 로마의 군인이 팔레스타인을 양도받았습니다. 헤로드 대왕은 국토의 많은 부분을 소작인에 의해 경영되는 개인 소유지로 바꾸었으며, 그것은 매우 압제적인 조정이었습니다. 결국 서기 기원 6년에 팔레스타인은 로마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으나. 사람들을 위해 향상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빌라도(Pilate)라는 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괴벽하고 잔혹하며 무자비한 인간이었습니다. 그의 행정은 부패, 폭력, 강도, 잔혹성, 착취와 재판 없는 처형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미움받던 세리들은 백성을 강탈하는 로마 관리와 결탁을 했습니다. 그 얼마나 무서운 비극의 날입니까! 확실히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잊고 계셨습니다.

3주 전에 우리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관해 읽었습니다. 그것은 임시적 축전의 한 순간이었습니다. 유대인은 오랫동안 그들의 메시야(Mecciah)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유대인은 억압적인 외세의 지배를 끝내 줄 누군가를 기다렸습니다. 종교적 유대인 열심 당원은 그들이 로마에 대항하여 대중적 반란을 일으킨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새 시대로 돌입하는 것을 중재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무신론자를 없애는 것이 하나의 종교적 의무였습니다.
물론 유대인이 무장 반란을 원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두개인과 대제사장 귀족은 로마 압제자들과 결탁하기를 원했습니다. 아네스(Annas)라는 유력한 귀족은 로마 재정가에게 크나 큰 뇌물을 바쳤습니다. 온건한 바리새인 역시 반란을 반대했습니다. 엣세네파(Essenes) 즉, 신비주의자들은 그 모든 것에서 도피하기를 원했습니다. 한적한 은신처인 동굴로 피신해서 주의 날을 기다리길 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실제로 취하셨던 행동의 과정은 위의 모든 집단을 만족시키지 못했습니다. 매우 분명하게 그 분은 현상(Status Qus)을 거부하셨습니다. 그 분은 확실히 어용 선지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전쟁과 폭력의 길 또한 확고히 거부하셨습니다. 그 분의 비폭력의 선택은 그의(聖務)의 모든 점에서 분명했습니다. 사탄이 그 분에게 모든 정치적, 군사적 힘을 주겠다고 유혹했을 때 그 분은 그 열심 당원적 선택을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유히 그의 친구와 원수를 위해 무제한의 사랑과 죽음을 선택하셨습니다.
바쁜 3년의 성무기간 동안 예수님께서는 약한 자, 가난한 자, 병든 자, 그리고 고통받는 자와 함께 하시며, 자신을 자각적으로 고통받는 종의 직(Role of Suffering Servant)과 동일시하셨습니다. 그것은 구속을 실행하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성취하려는 죄지은 자와 인간의 요구와의 신중한 동일화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가려는 모든 사람에게 있어 그리스도의 구속적 고통 안에 나누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동시대 유대인은, 오늘날 대부분의 우리보다 더욱 고통받는 종 메시아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가까이 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고통 당하시길 원하며, 우리는 고통당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내주시기를 원하며 그로 인해 우리 자신은 편안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가 `값싼 은총' 이라고 하는 바를 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회의 무력한 자들이 사는 뒷골목의 더러움과 멀리 떨어져서 부자 계급의 평탄한 거리를 누비며 거대한 맨숀 주택에 사는 삶을 원하지 않습니까 고백과 속죄와 용서와 봉사와 십자가를 요구하지 않는 종교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값싼 것일 뿐 아니라 속임수이기도 합니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Tutu 주교는 "고통을 외면한 교회는 교회의 속성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을 빠뜨리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한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제자에의 직분은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하나님 자신과 같은 교회는 결코 중립적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자와 압박 당하는 자와 소외당한 자들 편에 서 있어야만 하는 교회인 것입니다.

역경과 고통과의 예수님의 동일성이 그의 삶 전체에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만난 사람에 대한 인간의 존엄성의 구원에 그의 관심을 나타내심에 있어서 그 분은 놀라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식처럼 악을 복수로 갚으려고 오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분은 열심 당원, 세리, 바리세인, 혹은 죄인임을 막론하고 은총으로 죄인을 의롭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우리는 이것에 대한 엄청난 통찰력을 볼 수 있습니다.
간음의 현장에서 잡혀 굴욕을 당하며 돌에 의해 처형을 당할 처지에 직면해 있는 죄많은 한 여자가 나옵니다. 그녀의 고소자들에게 이야기를 마친 후 예수님께서는 그녀를 보시고 물으십니다.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없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짖지 말라."
이 얼마나 강함과 애정어린 유연함의 아름다운 혼합입니까! 아무도 돌을 던지지 않았습니다. 처음 그녀를 죄인이라 비난하던 목격자는 그들 스스로의 양심을 바라 보며 그들도 그들 스스로의 죄에 대한 목격자임을 발견했습니다. 개인의 죄는 큰 사회적 죄의 뿌리입니다. 다른 사람을 비난 하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이며, 우리 스스로의 양심을 살펴보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구조적 부정의와 제도화된 폭력, 사회적 죄를 비난하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입니까! 확실히 이런 죄는 어는 곳에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죄의 뿌리는 어디에 잇습니까 우리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부르심은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가면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저 자신이 저의 창조주와 이웃과 사회에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동아시아에서 오랫동안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자주 한국인과의 관계에서 거만함과 문화적 무감각과 터무니 없는 우행에 현저한 능력을 보였음을 고백해야만 합니다. 기독교적 사람의 윤리는 그 사회의 다른 구성원의 거부, 소외, 혹은 굴욕으로 이끄는 행위에 대해 아무런 자리를 주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존엄성을 경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 행렬은 끝이 났습니다. 그것은 축제로 끝이 난 것도 아니며, 최루탄을 뿌리는 전투 경찰에 의해 해체된 것도 아닙니다. 대신에 예수께서 나가셔서 비통하게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 분의 친구조차도 평화의 열쇠로서의 그 분의 종의 직분, 고통, 십자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1985년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회에 평화를 위한 일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는 개인적 구속을 위한 지속된 관심을 갖도록 부름을 받았으며, 우리 사회의 봉사를 위한 전체적 인간의 변형을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소금과 빛과 변화의 대행자로서 복잡한 사회 속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자, 약한 자, 힘 없는 자를 위해 정의에 대한 하나님의 압도적 공약에 일체감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론 사이더(Ron Sider)는 그의 저서 <그리스도와 폭력>에서 이 문제에 대해 강력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으뜸되는 힘과 권력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관자되심을 알리는 것은, 정부에게 그들이 주권자가 아님을 알리는 것이다. 그들이 그것을 인정하든 하지 않든, 그들이 지구상에서 정의를 행하고 평화를 구하고, 평화를 널리 선포하도록 그들을 부르신 부활하신 주님께 그들이 종속되어 있음을 알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한 자의 편에 서 계시며, 역사 속에서 부자를 낮추시고 가난한 자를 높이시며, 일을 하고 계심을 그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이곳에 있는 우리 모두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도 지금 밖에 나가서 사람을 죽일 것을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우리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살인에 기여를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경제적 구조는 수백만 명의 인명을 파괴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의 노예 제도가 확실히 그러했습니다. 합법적 구조와 악법은 인간성을 왜곡하고 침해하고 파괴합니다. 유신 체체가 그것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오늘날 중남미에서는 고통과 인간적 비극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풍족함은 미국을 더욱 부하게 하고, 라틴 아메리카인을 더욱 가난하고 굶주리게 만드는 부정의한 경제 구조에 부분적으로 의존하고 있습니다. 중남미의 경작지의 반이 설탕, 커피, 바나나와 같은 수출 작물을 재배하여 미국과 다른 부유한 나라에 팔도록 이용되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 중 60%가 5살이 되기도 전에 영양 실조로 죽는 중남미의 민중을 위한 음식을 경작하는데 이 땅은 사용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美國人은 그 땅의 대가를 지불할 수 있고 굶어 죽어 가는 어린 아이의 부모는 돈을 지불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땅은 커피, 바나나, 설탕의 지배에 계속적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생활방식을 채용하고, 경제적 구조를 지지하며 이런 구조를 보호하는 정치가를 선출하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살인데 동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의 매스 미디어는 남아프리카에서의 폭력과 죽음에 주의를 집중시켰습니다. 제도화된 인종차별주의가 정의와 평화의 문제에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인종차별주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충실에 장애를 일으키고 그것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인과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며 모든 형태의 인종차별주의에 반대하도록, 이런 부정의의 죄악스러운 제도에 대항하여 싸우는 자들을 지지하도록 복음의 이단적인 곡해로써 어떤 신학적 정당화나 인종차별주의를 고발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이 대학 사회는 화평케 하는 일에 무한히 기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곳은 노동자, 농민, 여자, 젊은이 등 모든 사람의 말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는 사회이어야만 합니다. 독재 권력에 대항하여 민주의 편에 서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 모든 사람을 참여하도록 권면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젊은이들이 사람을 받고 존중받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교회는 학생이나 청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합니다. 한국 청년이 사회 문제를 대하는 태도가 매우 진지합니다. 이것은 어떤 형태로든지 국가 발전에 참여할 수 있는 길로 이어져야 합니다. 국내 청년들의 문제를 봄에 있어, 정치 사회 구조의 문제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며, 오늘날 청년들이 왜 좌절하고 있는가, 왜 저항하고 있는가 문제를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교회는 청년에게 초점을 맞추어 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전쟁에 반대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믿어야만 하며 적극적으로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군비 경쟁을 증강시키고 있는 세계의 주요 강대국은 우리를 파괴의 길로 끌어 내리고 있습니다. 오늘날 군비 확장 경쟁은 우리를 안전한 세계로 이끌어 가지 못합니다. 그것은 정의롭게 자유를 탐구함에 있어 장애가 됩니다. 그것은 국가와 생명의 피를 말리고 기근, 문맹, 질병 같은 중요한 문제를 극복하는 데 사용해야 할 귀중한 자원을 소모시켜 버립니다.

교회는 군국주의에 의해 우리 사회가 지배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군사 정권은 민주적 발전을 손상시키고, 부패시키고, 기본적 인권의 침해에 놓여 있는 제 3세계에 막대한 고통을 주고 있음을 인식해야 됩니다. 고통 당하는 자를 돕고, 약한 자들에게 힘을 주고, 가난한 자와 억압받는 자를 옹호해 주고, 소리를 빼앗긴 자의 영감에 소리를 주고, 화평케 하고 일치를 도모하는 장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함께 우리의 우선 문제를 살펴 보고, 모든 일을 위해 참된 평화와 정의를 위한 탐구에 그것을 일치시키며 우리의 삶을 재인식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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