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잃은자를찾으시는 예수님 (눅 19:1-10)

첨부 1


본문에는 공동체에서 소외된 한 죄인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있다.

니고데모와 사마리아의 여인 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자주 상고하는 이야기 중의 하나가 삭개오의 이야기이다.

주님이 삭개오에게 하신 일을 오늘 우리에게도 하시기를 원하신다.

삭개오는 여리고에 사는 세관장으로 물질적으로는 부러울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웃으로 부터 손가락질 받고 외면당하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이것이 그가 가진 돈의 무게 보다 더 그를 누르는 불행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뵙고자 하였다.

그가 예수를 뵙고자 한 노력은 우리 모두에게 좋은 본보기가 된다.

그는 어른이고, 세무서장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뵙고자 뽕나무에 올라갔다.

이것은 그의 예수를 뵙고자 하는 마음이 단순한 충동이나 호기심 에서가 아닌 그의 열망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 준다.

우리 가운데 체면 때문에 온전한 회개를 하지 못하고,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은 없는가 그렇다면 삭개오를 배워야 한다.

예수님이 뽕나무 위의 그를 쳐다 보시고는 삭개오야 내려오라고 하셨을 때, 그는 나무에서 급히 내려와 주님을 영접하였다.

아마도 나무에서 쭈르르 미끄러져 내려왔을 것이다.

삭개오는 주님을 뵙고자 나무위에 올라갔지만 예수님이 자기를 아시리라고는 예견하지 못했다.

그는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만난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예기치 못한 상황과 시간에 찾아올 수 있다.

그분의 자비는 우리에게 신속히 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체해서는 안된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사랑에 가득찬 부르심이었다.

그는 진정으로 외로운 사람에게 그의 필요가 무엇인가를 잘 아시는 분으로 진정한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치유해 주시는 분 이시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찾아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찾아오셨을 뿐 아니라 <내가 오늘 네집에 유하여야 하겠 다>고 말씀 하신다.

예수님은 그와 더불어 잔치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그의 잔치에 부르시고자 예수님을 보내셨다.

본문에는 삭개오가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었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9]>는 모든 세상사람이 기다리는 주님의 음성이다.

주님께서 오늘 나를 부르실때에 머뭇거리겠는가 우리는 주님이 나를 부르시는 음성에 진정으로 회개하고,그와 더불어 즐거워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에 달려가 맞을 준비가 되어있는가

오늘의 말씀은 가장 사악한 죄인이라도 주님 앞에 나오면 값없이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우리는 탐욕적인 세리가 그리스도인으로 변하는 것을 본 것이다.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1:18)> 병원에서는 치료할 수 없다고 포기하는 환자가 있을지라도 우리 주님은 치유치 못하는 경우가 없으시다.

어떤 죄인이라도 예수 앞에 나오면 고침을 받는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구원받는 계기가 얼마나 작은것에서 비롯되는지를 배우게 된다.

삭개오는 예수가 어떤 사람인가하여 보고자 하였으나,키가 작아 볼 수 없었다.

그의 호기심이 그의 마음의 동기가 되었다.

우리 역시 작은 것이 동기가 되어 주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은 것도 멸시해서는 안된다.

영혼에 관한 것은 무엇이든지 하찮게 여겨서는 안된다.

성령께서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방법은 신비하고, 놀라운 것이다.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보는 주님은 죄인들을 향하여 연민의 마음 을 가지신 것을 보게 된다.

그는 구하지도 않았는데, 죄인의 집에 손님이 되기를 자청 하신다.

그는 구하지도 않았는데, 세리의 마음에 성령의 은혜를 주시고, 그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다.

무엇보다도 이 사실을 볼 때 구원은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라, 은혜로 인한 것임을 다시 깨닫게 된다.

구원받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없는 삭개오를 찾아와 구원하신 주님 이 우리 또한 그러한 은혜를 주셨다.

우리가 이러한 교훈들을 모든 사람들에게 확신있게 선언하여야 하는 것이다.

 회개한 죄인들은 항상 회개한 증거를 나타낸다.

삭개오는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라고 했다.

그 말에는 현실성이 있다.

그리고 삭개오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

그는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그가 누구를 섬기고 있는지를 속히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 역시 삭개오 처럼 예전에 나를 둘러싼 죄악들을 송두리 째 뿌리 뽑아 버리고, 모든 사람이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알 수 있도록 행동해야 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구원받았다면 삭개오와 같은 자기부정이 가혹한 요구라고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 말씀을 듣는 여러분이여! 한 죄인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자비와 은혜를 생각하면서,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뿐 아니라, 우리의 신앙고백 을 삶을 통하여 나타내도록 힘쓰자.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시116:12) 라는 시편기자의 과제가 오늘 우리의 과제인 것을 알고 주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힘써 노력하자.

.new lukf 16청지기 사명을 가진 그리스도인

본문/눅16:1-13

청지기는 그의 소유가 아닌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자이다.

그의 주인의 재산의 이익을 남기기 위한 일에 관련이 되어 있기 때문에, 주인의 재산과 특별한 관계가 있다.

그러나 청지기는 자신이 그 재산의 소유주라는 생각을 가질 수 없고, 오직 관리자라는 생각만 하기 때문에, 그 재산의 주인이 그 재산에 대하여 갖게되는 관계와도 구별된다.

재산에 대한 그의 임무는 주인의 의지여하에 따라 언제 달라질지도 모른다.

청지기에게는 무엇 보다도 신뢰심이 요구된다.

신뢰심이란 재산의 주인인 재산관리를 맡기는 사람이 그 청지기를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인간의 생활이란 넓은 의미에서 청지기의 생활이다.

우리는 인간으로서도, 그리스도인으로서도 청지기이다.

재산을 소유한 모든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청지기일 따름이며, 언젠가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산관리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실 것이다.

우리가 청지기라는 사실은 재산 뿐 아니라 지식,사색,상상,취미와 같은 마음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모든 정신적 달란트 역시 우리의 소유가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는 다만 청지기이며 보관자일 뿐이다.

결국 신앙도 우리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소유이다.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는 주시지 않으시고, 오직 우리에게만 맡겨주신 이 보화는 우리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불의한 청지기를 하나님께서 칭찬하신 까닭은 장래를 대비했기 때문이다.

신앙인의 지혜 보다 나은 세상의 지혜가 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목표를 가지고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본다.

그들이 개인적인 발전의 지혜를 빨리 알아차리고 이를 깨닫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께서 그와 친근해지고자 하실 때에 이를 재빨리 깨달아야 한다.

세상사람들이 자기에게 도움이 되지않을것 같은 사람들과 사귀지 않는 것 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사람들과 부주의하게 타협해서는 안될 것이다. 199

1.10.2

8.Hur .new lukf 13자라나는 하늘나라

본문/눅13:18-22

하늘나라는 마치 땅속에 심기워진 씨앗과 같은 것이다.

그 씨앗은 본래 부터 땅속에 있던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하여 심기워진 것이다.

그 나무의 가지는 여럿이지만 줄기는 하나이며,뿌리와 가지와 잎과 열매등이 모두 하나의 생명체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 나무는 온갖 종류의 새들이 와서 지저귈 수 있는 즐거운 휴식처가 된다.

이러한 한그루의 나무와 마찬가지로 하늘나라 역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서로 다른 모든 사람들이 모두 한마음과 한뜻이 될 수 있는나라이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오직 하나인 나라이다.

이 하나님 나라에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간직하고 있다.

겨자씨나 누룩의 효모는 매우 작은 것이다.

그러나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고,누룩이 부풀어서 큰빵을 만들듯, 이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죄인들의 마음속에서 누룩이나 겨자씨처럼 부풀고 점차 커져가는 것이다.

이 작용은 멈추지 않는다.

이 작용은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이다.

가루속에 누룩이 있는 한 부풀어 오르고, 나무가 살아있는 한 그 씨앗은 큰 나무로 자라게 되는 것이다.

하늘나라의 누룩은 왕성한 침투력을 가지고 있다.

이와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 속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골고루 스며들게 해야 한다.

빵을 만드는 누룩은 밀가루반죽 덩어리 전부가 한결같이 골고루 부풀게 되었을 때에 굽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의 마음 가운데 숨겨진 누룩과 같이 점차 부풀어간다.

그 복음은 본래 우리의 본성에 속해 있던 것이 아니다.

마치 누룩이 밀가루반죽 속에 있던 것이 아닌것 처럼......

복음은 개개인의 심령속에서 누룩과 같이 번져가지만, 사회속에서 도 번져 나간다.

누룩은 오직 밀가루만을 위한 것이다.

그것이 밖에 있을 때 ,땅에 있을 때는 부패해 쓰레기가 될 뿐이다.

하나님께서 밀가루를 위해 누룩을 주셨듯이, 우리의 영혼을 위해 당신의 은혜를 주신다.

이 은혜는 알지 못하는 가운데 커져서 마침내 그 실체를 알게 되는 것이다.

.new lukf 22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

본문/눅22:39-46

예수님께서 경건한 습관을 좇아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셨다.

복음을 전하고 기적을 행하신 후에 물러나 조용한 곳을 찾아 기도하신 것은 예수님의 습관이었다.

예수님께서 인간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께 대한 순종 때문에 그렇게 기도 하신 것이다.

겟세마네 동산은 그가 늘 찾던 장소 중의 하나였으나,마지막 그 동산에 오르셨을 때 일어난 사건을 생각하면 그가 이전에 어느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극심한 고통을 겪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임박한 십자가에서의 고통과 수치 때문에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와같은 고통과 슬픔을 겪게 하신 것이었다.

바로 그 때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로 부터 진노의 잔을 받으셔야 했던 것이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겪었던 영혼의 고통은, 십자가 상에서 겪었던 육신의 고통보다 훨씬 큰 것이었다.

예수님의 고통은 문자 그대로 투쟁이었다.

악의 권세와의 투쟁은 인간 예수로서는 정말 어마어마하고 힘겨운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고통을 온전히 인간으로서 감내하신 것이다.

겟세마네의 기도를 통하여,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담당하는 고통이 어떤 것인가를 깨달으셨다.

그 고통은 예수님이 당해야 할 돌풍의 그림자였으며, 그가 겪어야만 했던 끔찍한 고통의 서곡이었다.

그러나 그와같은 피나는 기도를 통하여 예수님은 위로와 힘을 얻으셨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예수님은 참된 인간성을 지니신 분이었다.

예수님의 사랑은 정말 비길데가 없다.

예수님의 대속은 완전한 것이다.

그와같은 고통을 통한 예수님의 대속의 보혈을 거절한 자에게 불가피한 심판이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그가 채찍 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사53:10>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