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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만민을 위한 구세주 (눅 0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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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간의 대강절 기간을 보내면 성탄절 전야를 맞게 된다. 온 세상을 구원하신 구주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전야의 예배 설교에 가장 아름다운 성경본문은 누가복음 2장이다. 물론 예수의 나심에 관한 성경 말씀이 마태복음에도 있고 요한 복음에도 있다. 그리고 그 본문들도 누가복음의 본문에 못지 않게 중요한 뜻을 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누가복음의 기록과 같이 아름답고 깊은 뜻이 담기고 풍부한 자료에 의한 소식을 전해주는 기록이 없을 줄로 안다. 누가복음의 기록의 아름다움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서 들어오던 전원의 아름다운 풍경은 잊지 못할 것이다. 들에서 목자들이 양을 치고 있는 풍경이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그 전원의 풍경에만 그치지 않는다. 영적인 아름다움이 더욱 더 큰 매력이다. 민족이나 국가나 신분이나 계층의 차이를 넘어선 인류 전체의 구원에 대한 마음가짐이 누가의 본문의 아름다움이다.

탄생에 관한 누가의 본문은(2:1-14) 세속사를 겸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께서 태어나신 그 시대의 상황에 관한 한 누구보다도 풍부한 역사적인 자료를 제공해준다. 그 때는 로마가 최강의 나라로 지중해 일대를 지배자로 군림하던 시대였다. 로마는 군사적으로나 재정으로나 권력으로나 세계 최강의 나라였고 그렇게 부강한 나라로 이끌어 올린 최대의 공로자는 카이사 아구스트(아우구스트)였다. 누가는 예수께서 탄생하시던 때가 바로 그 황제의 때였다는 것을 알려준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그때 유대를 지배하고 있었던 왕이 헤롯이었다고 한다(마 2:1 이하). 그러나 누가복음은 유대의 작은 나라를 통치하고 있던 헤롯보다도 전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의 황제 아우그스트에게 시선을 돌리고 있다. 마태는 헤롯의 이야기에 관심을 두고 있다 (마2:16 이하). 누가는 그같은 헤롯에 대해 큰 관심을 갖지 않는다.

아우그스트황제는 어떤 사람인가 몇 가지의 중요한 점을 알 필요가 있다. 당시 세속의 눈으로 볼 때 아우그스트 황제는 만민의 구세주로까지 칭송을 받았던 황제였다. 아우그스트를 가리켜 모든 인류를 전쟁으로부터 구원한 구세주(소테르)라는 칭호를 붙인 것이다. 뿌리에서 발견된 한 비석문 가운데에는 그의 출생을 기념하는 비문이 있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어 아우그스트 황제를 세상에 보내주시고 인류의 행복을 위한 모든 선하심을 그에게 베풀어주셨습니다. … 또한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을 위하여 한 구주를 보내시어 모든 전쟁을 없게 하시고 평화를 이룩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카이사르는 기쁜 소식을 가져다 줄만한 모든 이에 뛰어나시는 분이십니다. … 우리 하나님의 태어나심이야말로 세상의 기쁜 소식의 시작입니다." 구세주 예수의 탄생을 기록하는 누가복음의 입장으로서는 용납되지 않는 표현이다. 오로지 예수만이 유일하신 구세주시다. 다른 아무도 만민을 구원하는 구세주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가 오시기 전까지의 낡은 세상의 세속적 판단으로는 오로지 세계의 최대 강대국인 로마의 모든 권한을 장악하고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지배하고 최초의 황제가 된 아우그스트 황제를 구세주로 착각한 것이다.

아우그스트는 로마의 이름 있는 정치가의 아들로 기원 전 63년에 태어났다. 비록 서민출신의 아버지였으나 어머니는 로마를 지배하는 율리우스 가이사르의 질녀이었다. 당시의 로마는 귀족들의 암투로 나라가 어지러웠다. 아우그스트의 능력을 인정한 가이사르는 아우그스트를 아들로 입양하여 상속자가 되게 할 것을 유언하였다. 가이사르가 암살되었을 때는 아우그스트는 입양되어 가이사르의 상속자가 되었다. 친부의 이름인 옥타비우스와 자신의 이름 아우그스트, 그리고 가이사르의 이름 율리우스를 합친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가이사르를 암살한 세력을 지지하는 장군들이 있었다. 자기를 지지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안토니를 가이사르의 후계자로 삼으려는 사람이 있었다. 그렇지만 아우그스트는 기원전 43-2년에 가이사르의 암살자인 부르터스와 카시우스의 두 장군을 없이하였다. 안토니를 포함하여 삼두 정치를 하였으나 기원전 31년에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격파하여 이태리 전역과 작은 여러 지역들의 충성을 받아내어 완전한 패권을 장악하였다. 정치적인 수완을 통하여 자신의 위치를 안전케 하는 일에 성공한 사람이다. 기원전 27년에 이르러서는 원로원으로 하여금 자신을 최고의 영예에 합당한 자라고 하는 아우그스트의 칭호를 부여하게 하였다. 그 때부터 공화정의 명목을 유지하면서도 나라의 원수 곧 제 일인자가 되어 정체의 모든 권한을 수중에 넣었다. 이십팔 군단으로 군단의 수를 확장하여 파르디아에 이르기까지 원정에 나섰고 그리스와 지중해 모든 영역을 비롯하여 북으로는 영국에 이르고 동으로는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는 모든 지역의 평화를 보장하는데 힘썼으며 그밖에도 이렇다 할 만한 선정을 남겼다. 하류층의 빈곤을 없애기 위해서 지방의 토지 개혁을 시도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토지를 주기도 하며 로마시에 식량이 어려울 때는 식량의 무상 배급도 함으로써 민간을 보호하는 일도 하였고 또한 대규모의 건축사업으로 이른바 대리석의 로마를 건설하였다.

아우그스트황제는 로마의 다른 여러 황제들과 구별되며 로마제국의 모든 영역에서 그를 하나님으로 또한 구세주로 그리고 평화의 왕으로 찬양을 받았던 사람이다. 세상 사람들은 아우구스트황제가 세상에 나타난 것을 마치 세상의 구세주가 나타난 것으로 찬양하였다. 그가 나타남으로 인해서 새로운 세상이 오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그런 판단은 분명히 재래의 낡은 세상의 가치 판단에 의한 것이다. 그와 같은 사고방식으로는 결코 새로운 세상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는 구세주 예수의 태어나심이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라고 확신했다. 예수는 새로운 시대를 인류에게 가져다주신 새로운 구세주이시다.

누가는 세례요한이 예수당시에 얼마나 이름을 떨쳤고 훌륭한 사람으로 존경을 받고 있었는지에 대하여서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요한은 새 시대에 속한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요한은 예언자들의 시대에 속하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예언자의 시대는 세례요한으로 마감하였고 예수의 오심으로 새시대가 시작된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처음부터 누가는 세례요한의 출현과 예수의 출현을 대조하였다(눅 1-2장). 낡은 시대와 새로운 시대로 대조한 것이다. 세례요한은 예언자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세례요한은 "여인이 낳은 사람 중에 가장 큰 인물이었지만(눅 7:28) 예수의 오심으로 하나님나라의 기쁜 소식이 전파되었다고 한다 (눅 16:16). 예수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실현된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미미한 자라도 세례요한 보다 더 크다(눅7:28)는 말씀으로 예수와 세례요한을 대조하였다.

복음서를 기록할 때 결코 누가는 예수를 아우그스트 황제와 비교해 보려고 하는 의도는 없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누가복음을 읽는 우리로서는 구주 예수를 아우그스트황제와 비교하게 된다. 아우그스트황제는 스스로 자신이 만든 구세주였으며 예수는 하나님이 세우신 구주시다. 아우그스트는 낡은 시대의 의미의 구주였으며 예수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이루신 구세주이시다. 그 밖에도 모든 점에 있어서 큰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아우그스트는 땅위에서 가장 큰 나라의 왕의 권좌에 앉아서 힘으로 다스리며 자신의 위치를 굳히고 모든 나라 사람들이 그를 하나님으로 섬기게 한 로마의 왕이었다면 예수는 베들레헴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셨고 (눅 23:38 참) 섬김을 받으려 오기보다는 섬기는 자로 오신 왕이시다 (눅 22:27-29). 누가는 사상이나 행동이 사람에게서 난 것과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을 구별한다(행 5:38-39). 아우그스트가 하나님과 구주로 추대를 받은 왕이었고 사람이 만든 하나님이었다면 예수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세워주신 구주시라는 점이 근본적인 대조일 것이다.

호구조사에 관하여서 역사적으로 정확한 정보를 얻어내거나 또는 크리스마스의 정확한 근거로 예수의 생일을 누가의 기록을 토대로 하여 찾아낸다는 것은 무용한 일이다. 무용할 뿐만 아니라 누가복음의 기록의 목적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누가는 그 때를 정확하게 말하지 않는다. 헬라어원문의 "그 때에"라는 표현은 막연한 시간을 가리킨다. 누가는 역사적 자료를 모으고 참고하는 일에 누구보다도 성실하였던 것은 사실이다(눅 1:1-4). 호구조사가 아우그스트황제 때에 있었던 것도 확실한 사실이다. 또한 호구조사의 숨은 의도는 남의 나라인 로마가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서였다고 판단되어 유대인들에게는 크나 큰 충격이 되었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기록에 의하면 아우그스트는 세번에 걸쳐서 로마 시민을 확인하는 호구 조사를 하였다고 한다. "로마 천하"를 모두 하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또한 그 때가 누가가 보도하는 대로 예수의 탄생하시던 해였는지도 알 수 없다. 또는 구레뇨가 수리아의 총독으로 있었던 때가 그 때였는지에 대해서도 분명치 않다.

유대가 수리아에 합방이 되고 로마사람 구레뇨가 수리아의 총독이 되어 유대인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하였던 때는 기원 6년경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그 때가 예수께서 나시던 해의 헤롯대왕의 생존시는 아니었을 것이다. 요세퍼스에 의하면 구레뇨는 유대의 분봉왕이었다가 유배된 아켈라우스의 재산을 몰수하고 유대인으로부터 처음으로 세금을 걷어들였던 사람이다. 그 때 갈릴리의 유다라는 사람이 나타나 사람들을 선동하며 반기를 들은 일이 있다. 로마에게 세금을 바친다면 결국 로마의 노예가 되어버리고 만다는 것이었다(요세퍼스, 유대인의 고대사 17권

1.
1.,전쟁사 2권

8.
1.,7권

8.1). 세금 징수는 유대인들에게는 크나 큰 충격이었다. 이 사실이 기억에서 쉽게 사라졌으리라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더구나 요세퍼스의 기록에 따르면 구례뇨는 능력 있는 정치가다. 위세를 보이는 로마의 지배자로 군림하였던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아우그스트와 함께 지배자의 이름으로 인상적으로 기억되는 것이 역사적으로 사실이 된다. 아우그스트나 구레뇨는 그 시대의 세속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다 같이 영웅이다. 좋은 세상을 약속해 주는 구세주로까지 보였을지 모른다. 사실 요아자르라는 당시의 대제사장은 세금을 내라는 구레뇨의 정책에 찬성하도록 사람들을 타일렀다. 그러나 누가의 눈으로는 구레뇨나 아우구스트의 위세는 낡은 세대의 권좌를 대표한 사람들에 불과하다.

역사적 사실 여부만이 관심이 될 수 없다. 예수의 탄생일을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확인하는 것이 누가 복음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다. 오늘날 우리가 크리스마스를 12월 25일로 지키게 된 것은 4 세기경에 비롯된 것이다. 그날이 하늘의 천체들의 탄생일로 지켜오던 이교도들의 축제일이다.그것을 따른 것이다. 3세기경에 일부 교회에서는 1월 6일을 성탄절로 지켰다. 1월 6일을 축하한 까닭은 일직부터 교회는 그날을 예수께서 세례 받으시던 날로서 에피파니절로 지키기도 하고 또는 아담이 창조된 날이 제 6일이었기 때문에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의 탄생도 역시 그날이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정한 것이다. 5세기에 이르러서는 서방교회들도 12월 25일을 성탄일로 지키게 되었고 후에 동부교회도 이를 따랐다. 이교도들은 오래 전부터 그날을 하늘의 천체들의 탄생일로 지켰고 로마세계에서는 그날을 태양의 탄신일로 일찍부터 지켜왔으며 겨울 태양의 새로 태어나는 지점으로 지켜왔는데 크리스챤들은 세상의 빛이신 예수의 탄신일로 그날을 지키게 된 것이다.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키는 일의 기원은 역사적 예수의 실지의 생일과 무관했고 누가의 본문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본문에 따르면 예수께서 나셨을 때는 밤중에 양떼들이 빈들에 있을 수 있는 기후였다고 하는데 그 때는 4월부터 11월 사이였을 것이다. 누가복음의 메시지는 역사적인 사실의 세부적인 보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 이상의 신학적인 의미를 가진 하나님의 구속사에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다. 누가복음의 본문은 하나님의 역사에 초점을 두었다. 아우그스트나 구레뇨와 같은 로마의 지배자들을 통하여서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지지 않는다. 새로운 시대는 로마에서 시작된 것도 아니고 가이사르 아우그스트가 불러드리지도 않았다. 아우그스트의 호구조사령에 의한 구레뇨의 억척스런 세무행정이 유대인들에게는 구원이 아니라 커다란 멍에와 죽음이었다. 이제 그들이 대표하는 낡은 세대의 역사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을 위하여 그들과 다른 참 구세주를 하나님은 보내신 것이다. 역사적 사실보다도 바로 그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누가의 본문의 중점인 것이다.

호적등록 자체가 구원사의 사건이 아니다. 아우그스트황제의 칙령이 내려 호구조사가 있었다는 것과 호구조사는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에 처음으로 하게 된 것이라는 기록은 다만 역사적 사실을 알려주려는 목적만을 가진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숨겨져있다. 하나님께서는 로마의 황제를 도구로 삼아서도 구세주가 태어나시는 일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케 하신다는 것이 드러난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아우구스트 황제를 통하지 않으시더라도 그가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나 아우그스트를 통하여서도 하나님은 자기가 하시려는 일을 하시기도 하신다. 누가는 하나님의 구원사를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호적의 칙령을 통해서 모든 사람이 저마다 자기 동네로 갔고" 요셉은 갈릴리 나사렛 동네로부터 유대에 있는 베들레헴이라는 다윗의 동네로 올라갔으며 예수는 그 곳에서 태어나시게 된 것이다 (2:3-4). 누가는 구세주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게 되신 것을 설명한 것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세상의 구세주를 보내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사의 시작이 이루어진 것을 설명한 것이다. 요셉의 고향은 갈릴리다. 마태는 요셉의 고향이 갈릴리가 아니었던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갈릴리 나사렛으로는 다만 피난을 가서 살았을 뿐이다(마2:22-23). 그러나 누가는 요셉이 처음부터 갈릴리로부터 온 사람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눅 1:26. 그런 까닭에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게 된 것이 특별히 하나님의 경륜에 의한 것이었음을 보이려 했던 것이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제 세상이 구세주로 알았던 로마의 아우그스트황제와 참된 구세주 예수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잘 드러내 보여주는 첫번째의 증언이다. 예수는 갈릴리에서 태어나시지 않으셨다. 갈릴리에서는 예언자도 나지 않는 곳이라고 한다(요 7:41). 참된 이스라엘의 왕은 다윗의 후손에서 나신다고 믿어왔으며 요셉은 다윗의 후손이었고 예수는 요셉의 아들로 태어나셨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마을이다. (삼상 16:1, 미가 5:2) 그러나 베들레헴은 작은 마을이다. 로마의 황제와 대조를 이룬다. 작은 마을가운데서도 초라한 곳에서 태어나신 것이다. 부모의 신분도 그러하였다. 그들은 여관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방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관 (카탈레마)는 오늘의 화려한 호텔을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 당시의 카탈레마는 가난한 사람들이 들러가는 초라한 곳이다. 거기에도 방이 없었던 것이다. 화려하지 않고 가난하게 태어나신 것을 나타낸다.

"첫 아들"로 예수는 태어나셨다. 다윗의 왕위의 상속자임을 뜻한다. (대하 21:3) 요셉과 마리아에게는 다른 자녀들도 있었기 때문이다(눅 8:19). 태어나신 예수는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다. 지극히 소박한 출생이다. 다시 한번 황제들의 화려한 출생과 대조된다. 1장 32절에서는 예수의 출생 예정에 대한 천사의 높은 찬사가 기록돼 있다. 아기는 위대한 분이 되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시겠다고 한다. 그와 같은 높으신 분의 탄생은 2장에서는 너무나 소박하다. 다시 한번 아우그스트황제와 대조를 이룬다. 강보에 쌓였다는 말도 그렇다. 지혜서에는 솔로몬의 말을 전하고 있다. "나도 태어나서는 남이 마시는 같은 공기를 마셨으며 모든 사람이 사는 땅에 떨어졌고 모든 갓난 아기와 마찬가지로 ....기저귀에 싸여서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났다. 왕이라고 해서 유별나게 인생을 시작하지는 않는다"(지혜서 7:3-4) 강보에 싸였다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생활조건으로 태어나신 것을 가리킨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구세주가 되시기 위해서 평민의 생활조건으로 태어나신 것이다.

요셉과 마리아의 관계는 누가에게는 담담하다. 누가의 본문에는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한 사이라는 것을 밝혀 말한다(2:5, 1:27) 누가는 그들이 함께 여행을 하는 일을 조금도 거북하게 여기지 않는다. 당시의 풍습으로는 결혼하지 않은 남녀가 함께 여행을 하거나 함께 여관에 투숙을 하는 일을 그대로 보아 넘기지 않았을 것이다. 누가는 요셉과 마리아의 법적인 결혼 관계에 관해서 별다른 이의나 거리낌을 보이지 않는다. 라틴이나 시리아 역본의 사본에는 약혼한 아내라고도 되어 있기도 하다. 누가는 더 크고 중요한 일에 그의 관심이 끌려 있다.

예수는 이제 누구를 구원하려 오신 구세주이신가 그의 오심의 소식은 누구에게 기쁜 소식이 될 것인가 누가의 기사의 초점은 여기에 있다. 우리 주님은 아우그스트황제와는 다르신 분이시다. 아우구스트 황제는 로마의 특정인들에게만 구세주가 되었었다.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이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목자들과 같은 평민들의 구세주였으며 "만민"을 위한 구세주로 오신 것이다. 주의 천사는 먼저 목자들을 찾아갔다. 뜻밖의 일이다. 그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목자들은 밤중에도 야근을 해야만 했던 어려운 서민들이다. 아마도 평생을 그렇게 살아야만 했던 팔자를 타고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새벽녘까지도 밤을 지새는 야근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기쁨이 되신 구세주로 주님은 오신 것이다. 누가의 광경은 마태와 다르다. 마태의 경우에는 학식이 있는 박사들에게 소식이 전달되었다. 그것도 어려운 천문학의 지식을 통해서다. 그들은 황금을 가진 부자들이다. 그러나 누가는 다르다. 먹고살기 위해 그날 그날을 일해야만 하던 평범한 목자들에게 나타난다. 그들에게 "주의 천사가" 나타났다. 누가의 기록가운데는 천사가 나타나는 기사가 종종 나온다. 기쁜 소식이나 오묘한 깨달음을 알려주는 경우이다(눅 21:34, 24:4, 행 12:7, 23:11). 천사들은 중요한 진리를 전하는 역할을 한다. 예수의 탄생에 관해서도 천사는 오묘한 진리를 전한 것이 틀림없다. "만민에게 미칠 큰 기쁜 소식이라는 말이다. 세속사회에서는 아우그스트황제 같은 사람을 구주라고 믿는다. 궁전에 살며 권좌에 앉은 황제를 통해서 평화와 번영이 온다고 믿고 있다. 로마의 시인들과 웅변가들은 그렇게 황제에게 찬사를 보냈다. 누가의 본문에는 평화와 번영의 기쁜 소식은 빈 들이나 목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전해지고 그들의 구세주가 되시는 주님으로 오신 것으로 묘사되어있다. 이사야의 말씀을 실현하시는 구주가 나셨다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고 모든 사람들 곧 만민에게 기쁨을 안겨주는 구주시라는 것이다.

목자들이 양을 치던 "그 지방"은 베들레헴이다. 베들레헴은 목자들이 양을 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창 35:19-21삼상17:12 미 5:2-4). 베들레헴이라는 이름의 뜻에도 숨은 진리가 있어 보인다. 베들레헴은 식량의 집이라는 뜻이다. 주변이 황폐한 것에 비추어 볼 때 베들레헴은 그런 대로 비옥한 땅이기도 했다. 육신의 양식의 여유를 뜻하는 비교적 평화로운 곳이다. 이 곳에서 태어나신 예수도 육신의 조건들을 외면하는 금욕주의자가 아니시다. 주님의 기도에도 일용할 양식을 구하셨다. 주님은 가난한 사람들의 물질의 궁핍으로부터의 해방과 육신의 부자유로부터의 구원을 위해 힘쓰신 구주이시기도 하다. 바로 그런 형편에 처해있는 목자들을 위하는 구세주가 오셨다는 소식이 목자들을 놀라게 한 것이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는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포함돼 있었다. 밖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도 그들 가운데 속하는 사람들이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그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는 주님이 오신 것이다. 마리아의 찬가에 나타나 있다. "주께서 그의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의 권력을 낮추시고 낮은 사람들을 높이시고 주린 사람들을 빈 손으로 떠나보내셨도다(눅 1:51-53)."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자비를 말한 것이다. 누가의 기록의 아름다움은 전원의 풍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구원의 손길에 있는 것이다. 구원은 만민에게 미치는 구원이다. 만민(판티 토 라오)은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을 우선적으로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어려움에 시달리며 로마의 황제 밑에서 위축돼 있던 이스라엘도 위한 것이라면 그와 같은 형편에 놓여있는 모든 민족과 전 인류를 위한 기쁜 소식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한 구주가 나셨다는 기쁨의 소식이다.

"구주"(소테르)가 본시 구약에서는 하나님께 부여한 칭호였다(신32:15, 삼상 10:19, 대상 16:35 시24:5,27:1) 복음서중의 누가만이 예수에게도 이런 칭호를 붙인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지만 동시에 예수를 통하여서도 하시기 때문이다(눅 7:50 행 4:12 등등). 천사가 목자들에게 말했다."오늘 다윗의 동네에서 너희 구주가 나셨으니 그가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 예수는 하나님과 같은 구원의 일을 하시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시므로 그도 역시 하나님과 같이 구주의 칭호와 하나님께[ 부여되었던 "주님"의 칭호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것이다.

"너희는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게 될 것인데 이것이 저희에게 보여 주는 표징이다."라고 천사는 말한다. 표징이란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표적을 말한다. 하나님의 능력을 증명하는 기적을 가리켜서 표징이라 하였고 바리새 사람들은 그런 의미로서의 표징을 구했다고 한다. 목자들은 표징을 구하지 않았다. 기적을 바라지도 않았던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보여준 표징은 다른 모든 가난한 어머니들이 아기를 나았을 때처럼 그저 강보에 싸여서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게 된 그 광경이다. 누가가 전하는 구주의 표징은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가난한 자에게 오셔서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신 그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만민의 구주가 되신 것이다. 주님의 오심은 새로운 세상을 오게 하신 것이다. 곧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된 것이다. 아우구스트황제의 시대에서 혁명적인 변화를 보이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시대를 불러오신 것이다. 이것이 표적이오 기적이다. 예언자의 부르짖던 시대도 끝나게 하고 하나님 나라의 새 시대의 막을 올리신 것이다. 전도의 첫날에 읽으신 성경의 말씀대로 가난한 자들과 포로된 자들과 눈먼 자들과 눌린 자들에게 해방과 치유와 기쁜 소식을 가져다 준 새로운 시대의 막을 올리는 표적이다. 구원사의 새로운 시대가 동이 텄다는 것이다.

14절은 탄생기사의 절정을 이룬다. 갑자기 많은 천군이 나타나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많은 천군"이 공동번역에는 "수많은 하늘의 군대"로 되어 있다. 하늘의 군대는 구약성서의 표현이다. 야훼께서 온 하늘 군대를 좌우에 거느리시고 당신의 보좌에 앉으신 모습을 말한 것이다(왕상 22:19, 대하 18:18)." 해와 달과 하늘의 모든 별들"(렘 8:2)을 가리켜 말한 것 같다. 하늘의 별들이 하나님을 찬양한다. 시편에 이렇게 노래한다." 그의 군대들 모두 찬양하여라 해와 달아 찬양하고 반짝이는 별들아 모두 찬양하여라"(시 148:2-3). 공해와 오염이 없는 자연이 하나님을 찬양한다. 외경시대에 이르러 하늘의 천체는 천사와 연결된 것으로도 보았다(에녹 43). 찬양은 하늘의 별들만이 찬양할 것이 아니다. 파손된 자연은 주님의 영광에 먹칠을 한다. 유다서에는 길 잃은 별들 과 거친 바다에 대한 기록이 있다(유다서 13). 사람의 행실을 두고 한 말이다. 시편에 따르면 자연과 함께 모든 사람도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고 한다(시 149:2-3). 낮은 곳으로 오셔서 영광은 하나님께 돌리시는 구주가 나신 것이다. 새로운 나라를 가져오실 구주님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시는 주님이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의 올바른 해석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는 뜻이다. "땅에서는 주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도 역시 올바른 해석이 필요하다. 모든 사람들을 뜻한다. 모든 사람 모든 나라가 평화를 누리게 하시는 주님이시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하나님이 사랑하는 그의 백성 곧 성도들을 말한다. 모든 사람이 평화를 누리게 되는 새 시대는 모든 사람이 그의 기뻐하시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새로운, 희망의 시대를 말한 것이다. 모든 사람의 평화는 먼저 이루어지지 않는다.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 선행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평화는 뒤따라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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