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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의 고난과 나의 고난 (마 06:3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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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과거에 비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있으며 자유롭게 신앙을 말하고 삽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데 많은 댓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읍니다. 신앙을 아무도 핍박하지 않으며 우리의 헌법은 오히려 종교의 자유를 보호 해 줍니다. 우리는 외부로 부터 직접적으로 고난을 당하지 않습니다. 주일날 교회를 나가 예배를 드리는 것에 대해 아무도 억압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원하면 언제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생활이 우리의 생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중국을 선교 했을 때 그곳은 우리의 사정과는 달랐습니다. 우리는 정부의 감시를 피해 성경을 가르쳤고 또 그들은 숨어서 말씀을 배웠습니다. 우리는 좀 더 효과적인 활동을 위해 설교를 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들은 설교를 해 달라고 눈물로 부탁을 했습니다. 결국 우리는 그들의 열망을 거절 할 수 없어 설교를 했고 우리는 덕택에 도망 다녀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곳은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면 우리는 얼마던지 골라가면서 신앙을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신앙을 나타내는 생활을 원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고난과 죽음이 있기에 부활의 기쁨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를 알고 계십니까 우리가 감당해야 할 고난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이른 새벽부터 잠자는 우리를 깨우며 예배를 드려 달라던 중국 그리스도인들의 갈증이 이 순간 기억 납니다. 예배를 끝나고 나면 또 다시 말씀을 들려 달라고 떼를 쓰던 중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오늘 기억 나는 이유는 아마도 그들의 현실이 너무도 우리와 대조적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고난이라는 것은 더 많은 것을 갖지 못한 아쉬움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기도의 순간을 통하여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예수와 신앙의 모델로서의 예수를 우리는 오늘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1. 인간예수
우리는 가끔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잘못 이해합니다. 완전하다는 의미를 슈퍼맨으로 오해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이었다는 것은 인간이 경험하는 연약함을 모두 경험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먹지 않으면 배고픔의 고통을 느낍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잠을 자지 않으면 우리는 피곤을 느낍니다. 주님도 그러셨습니다. 매를 맞으면 우리는 아픔을 느끼며 도망가고 싶어집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에 완전한 인간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를 짓지 않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 했다는 말인 것입니다. 주님은 인간의 연약함으로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분은 자신이 연약하기에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을 선택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그 사실을 확인 시켜 주는 사건인 것입니다. 주님은 이제 그 자신의 마지막 사역인 구속사를 완성 시키기 전에 심각한 고민에 빠집니다. 주님은 두려움과 외로움을 느낍니다. 그의 의지로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를 진다는 사실이 쉽게 받아 드려지지 않았습니다. 할 수 있다면 그는 그 상황으로 부터 도망가기를 원했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외로움으로 부터 벗어나고 싶은 열망에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갑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그리고도 주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십니다. 본문은 그 때의 예수님의 상태를 이렇게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고민하고 슬퍼하사” 주님은 이렇게 인간의 연약함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어 본 문은 이렇게 증언 합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여기까지의 내용을 볼 때 우리는 결코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당당하게 받아 드렸다고 말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본 문은 계속해서 예수님의 고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주님은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합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고통스러운 순간을 가져야만 했습니까 자신의 죄에 대한 댓가를 치루기 위해서였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의 고통의 시작은 죄인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시작된 고통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주님이 인간의 연약함의 유혹을 어떻게 극복 하셨는지 다음 본문을 통하여 찾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2.신앙으로서의 예수
주님은 자신의 연약함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그 자신의 고통의 순간을 잊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결코 주님은 자신의 현실을 외면하거나 도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있는 그대로 고통을 받아 드립니다. 그리고 이제 인간의 연약함을 포기하며 하나님을 부릅니다. 여기에 신앙의 모델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기도를 이어 갑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결코 주님은 자신의 연약함을 핑계로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 기도에서 주님은 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성경은 세 번째 기도에서도 두 번째의 기도와 동일한 내용의 기도를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다른 것이 있다면 그 분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감정과 욕망으로 거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포기인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포기할 수 있는 용기는 바로 사랑으로부터 가능한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 보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기에 자신의 고통을 허용할 수 있는 용기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만의 기쁨이었으며 주님만의 평안이었습니다. 이제 신앙으로 자신을 극복한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이제 우리는 오늘 본문에 대한 결론을 내려 봅시다. 주님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도 이 땅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과연 이 두 고난은 어떤 공통점이 있습니까 주님은 연약하기 때문에 고난을 고통으로 느끼셨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닌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닙니다. 우리가 말하는 고난은 우리의 욕심으로 당하는 고통일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고통을 고난이라는 말로 대신해서는 않될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에는 타인을 향한 사랑이 넘쳤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용서와 평안으로 십자가를 감당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의 은혜로 여기에 앉아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인생이 고통스럽다고 느껴진다면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말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한 아무런 인생에 고난이 없다면 우리는 주님의 고난에 대하여 아무런 감동도 갖지 못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습관적인 고난이 아닌, 행사적인 부활절이 아닌, 경험적인 고난과 감격적인 부활이 여러분의 개인의 인격속에 체험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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