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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용서와 치유 (막 0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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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하나님, 온 세상의 추악한 것들을 사랑하시사 은혜 받을 만한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셨음을 감사드립니다. 어둠 속에서 죄악으로 부패해 가던 저희를 사랑해 주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둘러선 자리에 참여시켜 주심을 생각할 때 감격할 뿐입니다. 사랑의 빛을 우리 마음 구석구석까지 비춰 주시고 욕심과 교만과 불 신앙의 어두움을 소멸하여 주옵소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마가복음의 중심 주제는 예수님이 누구이시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 복음서의 서두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됩니다. 이 주제는 마가복음서 전반에 걸쳐 반복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셨을 때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1:1)이라고 했었고 예수님이 가버나움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실 때에도 귀신들이 어떤 광인의 입을 통해 “나는 당신이 누구 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마1:24, 비교3:11)라고 소리질렀습니다.

(막1: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막3:11)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예수님을 가리켜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8:29)라고 고백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운명하심을 목도했던 로마의 한 백부 장은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15:39)라고 증언했습니다. 이같은 예수님의 신분은 주님의 지상 사역의 여러 사건들 속에서 예증되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우리들의 본문인 한 중풍병자의 치유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때때로 치유 자로 묘사하였습니다

(사57:18) 내가 그 길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 줄 것이라 그를 인도하며 그와 그의 슬퍼하는 자에게 위로를 다시 얻게 하리라 (사57:19) 입술의 열매를 짓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
(호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치유는 단순히 어떤 질병으로부터의 해방이나 신체적인 결함으로부터의 교정을 뜻하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치유를 받으면 신체적인 어떤 장애나 질병으로부터 온전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신유는 무엇보다도 구원 사역의 일환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도 치유가 구원의 문맥에서 종종 사용되었습니다.
(렘3:22)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 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심이나이다
(사19:22) 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실 것이라도 치시고는 고치실 것인 고로 그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 간구함을 들으시고 그를 고쳐 주시리라
(호14:4)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저에게서 떠났음이니라

1. 예수님의 사역의 본질
예수님의 주변에는 언제나 질병의 치유를 받으려고 쇄도하는 인파로 넘쳤습니다(막1:32,33 /2:2). 그러나 예수님의 일차적인 사역은 병자들의 치유가 아니고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1:14, 15, 21, 22, 38, 39). 그럼에도 무리들의 관심은 병 낫는 데에만 쏠렸습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의 거처에 계셨을 때에도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2:2)
예수님이 만약 이러한 군중들의 이기적이고 물질적인 요구의 압력에 눌렸다면

(요6:15)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요6:2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자신이 속죄 사역을 감당하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키 위해 오신 구속주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일에는 실패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道)를 말씀”(2절)했다고 먼저 지적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병이나 낫게 해주고 빵이나 나눠주는 단순한 이적사로 취급되는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주 관심사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고 인자가 누구인지를 알리는 데 쏠려 있었습니다.

2.예수님의 사죄권
예수님은 한 중풍 병자가 들것에 실려 지붕에서 내려지는 것을 보시고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5절)고 선포하셨습니다. 환자를 고치시기 이전에 이같은 선언을 하신 것은 매우 이례적입니다. 당시의 회중들에게는 우선 죄의 용서가 환자의 치유와 무관한 듯하고 한 사람의 랍비에게 죄의 사면권이 있다는 것이 쉽게 납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본문의 중풍 병자가 무슨 몹쓸 죄를 지었기 때문에 중풍이 든 것을 예수께서 아시고 죄의 용서를 선언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주안점은 중풍 병자와 그의 어떤 구체적인 죄 사이의 상관 관계를 규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근원적으로 본다면 모든 질병의 원초적인 원인은 인간의 타락으로 소급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느 개인의 질환이 반드시 그 환자의 직접적인 죄의 결과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요9:2)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요9: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본문에서도 중풍 병자가 어떤 개인적인 죄 때문에 병들었다는 시사가 없습니다. 비록 죄와 질병의 유관 성이 성경에서 암시되기도 했지만

(요5: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롬1:27)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성경의 주된 관심은 죄오 질병의 상관성 여부보다는 치유를 통해 대변되는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이런 뜻에서 구약은 치유를 자주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예증으로 삼았습니다.

(대하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시103:3)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예수님은 중풍 병자가 들것에 실려 지붕에서 내려졌을 때 이 진리를 가르칠 수 있는 기회로 잡으셨습니다. 그래서 죄의 용서를 먼저 선포하신 후 그 사실을 증명하는 치유가 뒤따르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치유 사역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이 인간의 죄악을 용서해 주신다는 구원의 복음을 증시하는 하나의 은혜로운 수단이었습니다. 그래서 참된 신유는 사역자들의 권세나 인기나 헌금을 짜내는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복음을 먼저 제시하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주님에 의해서 능력으로 임한다는 것을 질병의 치유나 축귀를 통해 드러내셨습니다.

죄 사함의 부여는 마침내 하나님 나라가 죄인들에게 도래했다는 사실을 뚜렷이 체험적으로 알리는 더없이 큰 은혜의 사역이었습니다.그러기에 구약의 선지자들은 그리스도가 오시면 죄의 용서를 받게 될 것이라고 거듭 강조하고, 이것을 메시야 시대의 한 두드러진 복으로 묘사했습니다.

(사33:24) 그 거민은 내가 병들었노라 하지 아니할 것이라 거기 거하는 백성이 사죄함을 받으리라
(사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 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미7:18)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미7:19)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미7:20) 주께서 옛적에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
(슥13:1)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한편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사죄 선언을 듣고 매우 언짢게 여겼습니다. (막2: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예수님은 자신에게 사죄권이 있다는 것을 증명키 위해 중풍 병자를 거뜬히 말씀으로 일으켜 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서기관들의 말대로 하나님을 모독했다면 하나님이 예수님에 의해 죄의 용서가 선포된 마당에서 중풍 병자를 결코 낫게 해주지 않으실 것이었습니다. 중풍 병자의 치유는 하나님이 죄를 용서하시며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10절)가 있음을 하나님 자신이 너무도 확실하게 증명한 사건이었습니다.

3.교훈
예수님은 우리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온전히 치유해 주시고, 지금도 죄인들을 하나님의 나라 속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중풍 병자의 죄를 용서하시고 죽은 송장과 다름없었던 자를 힘차게 걷게 하셨던 주님은 지금도 우리들의 가버나움에서 동일한 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치유와 용서의 복음이 하나님의 교회들을 통해 오늘날도 울리고 있습니다. 죄인이 용서받고 온전한 구원을 체험하는 길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중풍 병자가 어떻게 주님께로 나아 왔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들것에 실려 가지 않았습니까 왜 들것에 실렸겠습니까 자신이 스스로 걸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력으로 자기 몸을 가눌 수 없었기에 중풍 병자는 가장 무력한 모습으로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용서와 구원을 받는 길입니다.

중풍 병자는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뜯겨진 지붕의 구멍으로 내리워졌습니다. 그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무능하고 유약한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보였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여러 무리들의 시선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몸이 타인들의 손에 의해 지붕에서 방 안으로 달아 내려질 때에 놀라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수많은 관중들 앞에서 수치와 분노로 소리를 지르거나 치유를 거부하거나 주님께 항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5절)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왜 병부터 고치지 않느냐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바라고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그는 죽은 몸으로 주님께 나아갔습니다. 자신을 송장과 다름없이 여겼으므로 부끄럽거나 창피하게 여길 것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들것에 실려 가는 자의 실상입니다. 어차피 우리 인생들은 누구나 언젠가는 들것에 실려서 묘지로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 아직 호흡이 붙어 있을 때 들것에 누인 채로 예수께 나아가면 나는 그 들것을 내 손에 쥐고 걸어서 나갈 수 있습니다. 죽어서 주께 나가면 살아서 나온다는 것이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나의 자랑과 나의 능력과 나의 꿈과 나의 철학들을 내던지고 빈털터리가 되어 무력한 자아로 들것에 뉘어지면 내게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머무셨던 가버나움의 집에서 죄의 용서를 받은 자가 누구였습니까 들것에 누웠던 자가 아닙니까 “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된 가운데서 누가 주님의 치유를 받았습니까 들것에 누웠던 자가 아니었습니까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누가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눅5:25) 집으로 돌아갔습니까 들것에 누운 채 용서와 치유를 체험했던 중풍 병자가 아니었습니까 그렇다면 들것에 내 몸이 달아 내리 우는 것을 왜 두려워하고 부끄럽게 여기겠습니까 들것에 담긴 자처럼 자신의 속절없는 모습을 주님께 보이고 용서와 치유를 바라는 자만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체험케 됩니다. 여러분은 어떤 모습으로 주님께로 나아갑니까

또 하나의 교훈이 있습니다. 내 집에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 중풍 병자가 들어오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중풍 병자가 들어오면 내 지붕이 뜯기기 때문입니다. 만약 당신의 집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아마 이런 식으로 말할 것 같지 않습니까
“이봐요! 대문이 있는데 남의 집 지붕을 뚫고 들어오겠다니 이게 무슨 짓이오, 사람이 많으면 순서를 기다렸다가 올 것이지 멀쩡한 남의 집을 마구 뜯다니 이것이 무슨 행패요. 여기 아픈 사람이 한두 사람인 줄 아오 늦게 와서 엉뚱한 짓 말고 당장 지붕에서 내려오시오. 일체의 파손은 모두 변상해 내시오.”
여기서도 역시 집 주인의 침묵이 본문의 배면에 깔려 있습니다. 우리들도 때때로 이 집 주인처럼 복음을 위해 내 집에 손해가 생기면 생각이 달라지기 쉽습니다. 본문의 집주인이 들것이 하나 내려갈 정도의 큰 구멍이 지붕에 뚫렸음에도 불평을 했거나 중풍 병자의 친구들을 말렸다는 언급이 없는 것은 우리들의 인색한 마음을 향한 무언의 나무람인지 모릅니다. 주님을 내 집에 모시고 주님의 구원 사역에 내가 동참하면 때때로 내 지붕의 기왓장이 벗겨지고 방에 않은 손님들의 머리에 먼지가 떨어지며 가족들에게 동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주님은 죄인 하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내 집의 지붕이 뜯기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어느 편의 유익이 더 우선되어야 합니까 이미 예수님의 둘레에 앉아 있는 자들입니까 아니면 바깥에서 들어오지 못하고 애쓰는 중풍 병자입니까 예수님은 들것에 실려 내려오는 자에게 깊은 관심을 쏟으셨습니다. 주님의 눈에는 뜯겨지는 지붕은 보이지 않고 오직 사경 (死境)에 처한 가엾은 한 죄인의 모습만 크게 들어왔습니다. 뜯겨지는 우리들의 지붕과 들것에 달아 내려지는 중풍 병자를 우리는 어떤 시각으로 바라봅니까

끝으로 내가 내 집 지붕을 뜯고 내려지는 중풍 병자의 침입보다 주님의 복음 사역에 마음을 담아 두면 내 집에서 커다란 구원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중풍 병자의 치유는 환자 자신뿐만 아니라 집에 있던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케 하였습니다. 내 집에서 이런 종류의 찬양이 들려진다면 지붕이 다 날아간들 무슨 걱정이겠습니까
(막2: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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