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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값진 은혜 (마 1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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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기독교에 만연되어있는 불행한 모습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읍니다.

첫째는 죽음의 안개처럼 우리를 뒤덮고 있는 변질된 신학 때문 입니다. 이 신학은믿음을 제자도에서,은혜를 순종에서 분리를 시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지않고 다만 구세주로서 영접하는것이 가능하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형상은 기독교가 번영을 할수록 더욱더 심각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환난과 핍박이 따르는 시기에 그리스도인이 되려는 사람들은 저 나사렛 사람의 십자가를 지기전에 제자도의 가치를 신중하게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설교자들은 거짖되이 안락한 생활을 약속하거나 마음껏 죄를 짖도록 내버려 둠으로서 청중울 기만하지 않읍니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평온하고 번영한 시기에는 제자도의 가치 따위는 그다지 소중하게 보이지 않으며 사람들은 참된 회심이 읨하는 근본적인 삶의 변화를 경험하지도 못한채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이러한 시기에 설교자들은 종종 중생을 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상관도 없이 단지 교인의 수만 증가를 시키기 위해서 십자가 없는 기독교,안일한 신앙으로 청중의 눈을 어둡게 만듭니다.

히틀러의 독제에 반대하다가 마침내 순교를 당한 독일에 루터목사 디터리히 본히퍼는 이런 잘못된 신학을 가리켜 값싼 은혜라고 비난을 했읍니다.

그는“ 값싼 은혜란회개없는 용서와 징계없는 성례와 고백없는 친교와 참회없는 결심을 가르치는 설교요 제자도도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성육신도 없는 은혜이다” 라고 말했읍니다.

값싼 은혜의 반대는 값진 은혜입니다.

값진 은혜는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아서 사람은 그 밭을 사기위해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판다.그것은 지극히 값진 진주와 같아서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은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그것을 산다, 그것은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왕 국에 참여하는 것으로서 사람이 그것을 바라보고 한없는 사모함으로 갈급해 한다. 즉 그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그물을 버리고 홀연히 바닷가를 떠나게 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이다. 참으로 값진 은혜는 추구하고 또 추구해야할 복음이요 간절히 바라야할 은사요,애타게 뚜드려야할 문인 것입니다. 이 은혜는 우리를 따라오도록 부르기에 값진 것이요, 우리로 예수 그리스도을 따르도록 부르기에 은혜인 것이다.

또 한명의 미국인 작가가 같은 상황을 슬프했읍니다. 그분은 시카고 교회의 목사이자 경건한 저술가인 토우즈 였으니다.

위대한 성경의 진리로서 인간을 소망없는 법률 주의와 무용한 자기의 노력으로부터 구출해낸 축복의 선포인 이신 칭의교리가 우리 시대에 와서 사단의 맹랑한 궤계에 사로잡혀 많은 이들로 인해 하난님을 아는 지식에서 인간을 영원히 분리시키려는 의도하에 외곡 되어왔다 기독교적회심을 점검하는 모든 과정들은 기계적이고 외형적으로 되어버렸다.

이제 믿음은 도덕적 생활에 대한 아무런 자기 성찰없이 그리고 아담의 원죄애대한 당혹가이 없이도 행사 될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는 영접자의 영혼속에 그분에 대한 아무런 사랑의 감정이 없이도 영접될수 있다.

비록 구원은 받지만,하나님을 향한 주림도 목마름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아마 그러한 상태대로 만족하고떳떳하도록 특별한 훈련이라도 받은것 같 이 치명적인 제자도의 결핍을 조장한 것은 그릇된 신학만이 아닙니다. 또 한가지 요인은“자기를 돌아보는 삶의 결핍입니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극도로 기계화된 환경속에 살고있읍니다. 생활은 너무 분주하고 대인 관계는 진실된 대화의 세계를 나누기에는 너무 사무적이 되어 버렸읍니다.심지어 교회에서 조차 우리는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점검 받기 보다는 이런저런 계획과 어떤 부서속에 관련되기를 권유받고 있읍니다.

우리가 교회 내에서뭔가 활동을 하고 있는한은 우리의 신앙 고백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전혀 묻는 사람이 없읍니다.

생각컨데 설교자들은 비록 교회 회원일찌라도 그들이 실제로는 구원받지 못한 상테일수도 있다는 점을 상기 시켜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사들은 그날에 예수께로부터 상급을 받기 위해서는 개인적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값진 희생을 치루며, 그리고 변함없이 그리스도를 쫒아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해야 합니다.

오늘날 이러한 가르침도 없는 까닭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10,20, 30년 전에 그리스도를 시인 했고 그 이후로 특별히 나뿐짖을 행한적이 없었다는 명분을 들어서 스스로 그리스도인임을 내 세우고 있읍니다.

사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저 은혜에서 떨어지고 영원히 멸망받을 위험에 처해 있느지도 모르는데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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