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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의 변모1 (마 17:1-9)

첨부 1


I. 원문비평

성서의 원문은 많은 전승된 고대의 사본들로부터 원자료를 얻어 교회의 스승들에 의하여 오랜 세월을 통하여 토론하고 원칙을 찾아 교정본을 만들어 제정되고 또 비평을 통하여 어느 읽기가 원초적인 것인가를 가려서 비로소 권위있는 원문으로 작정된 것이므로 우리는 먼저 연구의 대상인 본문을 찾아내고서라야 주석과 신학적 뜻을 풀어낼 수 있다. 그래서 이같이 먼저 원문비평을 하는 것이다.

이 단화(斷話Pericope)는 원문비평의 문제가 매우 적으며 그 차이(差異)정도가 사소하고 결코 중대한 결과를 불러일으킬 만한 것이 없다. Nestle Aland 제26판에 의하여 문제되는 것 몇을 지적하겠다.

< 17:1 >

단락 초두의 접속사 kai뒤에 egeneto(…일이 있었다)가 삽입된 사본들이 있다. 대자사본 D,Θ등 몇 개의 사본이 이것들을 지지할 뿐이다.

'Iakobon앞에 ton이라는 정관사가 삽입된 사본들이 있다. 대문자사본 알렙,D,Θ그리고 몇개의 소자 사본이 이것을 지지한다.

그리고 "따로", "사사로이"를 의미하는 kai' idian대신 lian이라는 말이 나옵 사본이 있다. 대자사본 D 하나가 그것을 지지한다. lian이 붙으면 그 앞에 있는 높다는 말에 "매우"라는 말이 붙어서 "매우 높은 산"이라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D사본만의 착상에 지나지 않는다.

< 17:2 >

"빛 같이(os to pos)희다" 대신 "눈과 같이"(os xion)으로 읽는 사본과 역본들이 있다. 사본으로는 D,역본으로는 라틴,시리아,보해릭 역이 있다. 그러나 그들의 증거는 권위가 없다.

< 17:3 >

opthn대신 opghesan으로 변경된 사본들이 있다. C L W 등 몇 개의 대자사본과 몇몇 소자사본과 역본들이 그것을 지지하지만, opthe를 지지하는 P44 알렙 B D Θ 등의 권위를 능가하지 못한다. "예수와 함께 이야기했다"를 삭제한 사본들이 있다. 그렇게 한 사본 C D L 등은 그 구절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B W등보다 권위가 적은 것들이므로 삭제하지 않은 편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

< 17:4 >

베드로의 말 가운데 있는 "세 초막"(treis skenas)이란 말을 뺀 사본들이 있다. 그것을 지지하는 사본은 오직 B 사본뿐이어서 고려의 여지가 없다. "하나는 엘리야에게"(Ηlia mian)라는 구가 없는 사본이 B 와 Γ 두 개의 대자사본과 몇 개의 소자사본뿐이다. 권위있는 많은 사본들이 그 귀절을 가지고 있기에 그것을 원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17:8 >

변모 장면 마지막에 ei pe auton 'Iesson monon(예수 그분 혼자만)이라는 강력한 말이 나온다. 그러나 B의 제 2 교정본과 C (D) L등에는 auut대신에 ton이 나온다. 즉 "예수 자신"이라는 말에서 " 자신"이라는 말이 빠지고 단지 "그 예수"가 될 것이다. 그러나 auton을 지지하는 사본들은 더 권위가 있고 따라서 그것이 원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BΘ 와 700이라는 소자사본이 그것을 지지한다.

< 17:9 >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난 후"라는 표현에서 egerthe(일어난다)는 단순과거 수동 직설법 3인칭 단수 동사인데,그것을 지지하는 사본들은 B D 그리고 몇 개가 더 있다. 그런데 Χ C L Z 등에는 anaste(aanistemi의 단순과거 능동 직설법)로 나온다. 의미에는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원문비평학자들이 egerthe를 원본으로 보고 있다.

II. 마태복음 단화의 구성, 자료, 특징

예수 변모의 단화는 해석하기 어렵다. 그것은 구약성서의 유대교적 소재와 연관되었을 가능성과, 과거 회상의 사항들이 많다. 그러나 이들 전통을 완전히 해명해 줄 열쇠가 전통 안에 없다. 하나의 일정한 배경이나 하나의 기대에 적합하도록 된 설명을 이끌어 낼 수가 없고, 또 몇 개의 많은 것에 어울리는 개별 발언이 언제나 있다. 그래서 변모단화는 다의적(多意的)으로 말해졌다는 인상을 사람들이 가지게 된다. 그것의 발생 근원과 전승된 가장 오래된 역사는 어둠 속에 잠겨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마태가 그 이야기를 편집자적으로 취급하였다고 보던가 아니면 그의 복음서의 줄거리 본문에 첨가된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것을 통하여 새 강조점이 생겨나는데, 전승사적으로 앞서 주어진 해석 가능성을 반드시 포섭하게 된다는 경향을 가진다.

마태복음의 이 단화는 마가의 본문을 삭제나 부연을 하므로 형성되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첫 질문은 마태가 어떻게 마가의 본문을 다루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상세한 점에서 또 사건들의 순서에서 된 그것의 변경에 착안해야 한다.

마태는 마가의 순서를 바꾸어 엘리야를 언급하기 전에 모세를 언급한다(17:3). 이것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적어도 의미의 우선권이 마가에서처럼 엘리야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모세에 대한 언급을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마가는 다만 "예수의 겉옷"만이 눈부시게 되었고 지독히 희어졌다는 것(막1:3), 곧 땅위의 마전장이가 가히 표백할 수 없을 만큼 희어졌다는 것을 말한다. 마태는 덧붙이기를 "그리고 그의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났다"(17:2)고 한다. 이것은 출애굽기 34장 29-35절을 회상케 한다. 거기에는 히브리어로 "모세의 얼굴 꺼풀이, 하나님과 친히 대화했기 때문에, 빛났다"고 되어 있다

마태는 마소라 본문이나 LXX(70인역 성경)을 정확히 인용하는 것이 아니다. LXX는 "그의 얼굴의 꺼풀의 표면이 광채가 났다" (dedojastai e ofis tou xromatos tou prosopou autou , 출 34:29)라고 하여 더 정밀한 표현 또는 정신화를 시도했다. 그러니까 마태는 출 34:29을 축자적으로 재생한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왜 마태가 마음에 둔 그 구절을 인정하는데 "꺼풀"(xromatos)을 삭제했을까 아마 더 세련된 표현을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는 아마 "해와 같이"라는 어구를 견디어낼 수 없는 환상으로 이해하려는 것 같다. 마태복음 안에는 랍비의 글에서와 같이 현상의 주석적(pesher적), 하가다적 분장이 없는 것 같다. 그가 관심하는 유일한 사실은 예수의 얼굴에 율법의 중개자 모세의 영광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후대 랍비전통에서는 율법의 영광 자체와 다른 것이 아니다).

나타난 `구름'을 묘사하는데 마태는 마가, 누가와 같은 동사를 사용한다( episkiajein). 그러나 그는 의미있는 형용사를 첨가한다. 그 구름은 "빛난찬란한" 구름이다(nefele foteine epeskiasen autous). 그같이 그는 역설적으로 표현한다. 눈부신 빛이 덮는다고. 우리는 왜 그가 이 형용사를 첨가하는지를 찾아낼 수 있는가 그는 광야에서 장막을 가득 채우고 있던 셰키나(후광), 또는 종종 "중천의 해보다 더 강력한"빛의 깊이와 연관된 주의 임재를 그것으로 표현하려 했을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이야기는, 특히 마태의 단화로써, 많은 것을 가르친다. 첫째로 마가는 "이 사람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막9:35)라고 했고, 누가는 "이는 나의 택한 아들"(eklelegmenos)이라고 말한다. 마가와 누가는 주로 시편 2:7을 회고하는데, 마태는 여기서 예수의 세례 보고에서와 같이 시2:7와 사42:1을 결합시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로서 "보라,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나의 택한 자, 나의 심령은 그를 기뻐한다"를 상기시킨다. 마태는 "나는 그를 매우 기뻐한다"는 구절을 붙임으로써, 예수는 그의 율법을 자기 민족에게 가져가도록 운명지어진 사람으로 인식시키려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이 판단을 남에게 강요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를 기뻐한다"는 문구는 이사야 42장 1절의 직접 인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 단화 장면의 절정의 다른 요소들이 그것을 지지하는 것 같다. 둘째로, 하늘로서 울려나는 목소리의 마지막 발언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증언하고, 그를 순종하라는 명령이다. 마태에서의 이 증언의 방향은 예수를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의 지도자로 지시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게 한다. 마가복음은 9장30-32의 가르침의 내용을 명백히 인자의 수난으로 기술하며, 또 이것이 누가 9:43b-45에서도 같은 의미로 취급되고 있는데, 반면에 마태는 비록 그가 수난의 의미를 알면서도, 매우 부드럽게 또 간략하게 17장 22-23절에서 그것에 대한 그의 인증을 제시했을 뿐, 그것에서 그 전체의 특출함을 빼앗았다. 이 구절을 평행구들과 비교해 보면 그 사실을 의심없이 알게 된다.

마태복음17:22-23:"그들이 갈릴리에 모여 있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근심에 싸이게 되었습니다."

마가복음 9:30-32:"그들이 그 지방을 떠나 갈릴리로 갔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여행을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어하시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9:43b-45:"예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을 사람들이 모두 보고 놀라 감탄하고 있을 때에……"

이 공관대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마태에서는 마가에서와 같이 변모단화가 수난과 부활에 직결된다는 것을 단화의 마지막 결어에서 밝힌다. 마가는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는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한 후에 제자들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하는 토론이 뒤따르게 했다. 마태도 예수의 사망 예고를 수록했다. 그러나 마태는 제자들의 토론 이야기를 삭제하고 있다. 마태에게는 그 문제가 그다지 토론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변모단화가 부활하신 분의 제자들 앞에서의 나타나 보임과 이해에 큰 어려움이 없다고 본 것이라 말할 수 있다.

III. 변모 단화의 전통

우리는 우선 이 이야기의 해석에서 석의가들이 그 설화가 작성되기에 이른 근원을 찾으려 애쓴 몇 개의 지평을 산책하려 한다. 그 단화의 어떤 특징이 전통 가운데서 찾아져서 그러한 것이 해석의 모형을 형성했던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그러한 것이 순수한 형태로 잔존한 것이 아니라 많은 경우에 여러 개의 전통이 중첩되어 단화의 해석에 사용되었던 것을 우리는 안다. 다음에 그것들을 검토하겠다.

변모 이야기는 출애굽 전통을 상기시키며 특히 모세를 기억나게 한다. 모세가 아론, 나탑, 아비후와 함께 시내산으로 올라갔다. 시내산은 구름으로 덮여있다. 제7일에 하나님께서 그를 구름 사이에서 불렀다(출24:1, 9, 15f)하늘의 소리인 "그의 말을 들어라"는 명령도 예언자 모세를 회상하게 한다(신18:15).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올 때에 그의 얼굴이 빛나고(출34;29-35) 그도 일종의 변화를 경험하였다. 변모 이야기는 마태에게 있어서 예수를 새로운 모세로, 아마 종말시의 예언자로 제시하려는 의도로 제공되었는지 모른다.

출애굽 34장에서의 모세의 변모는 조금 다르다: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대화를 한 후에 나타난 일이다. 그리고 그 광채는 그후에 존속하였다. 그러나 예수의 변모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전에 일어났고 그리고 다만 스쳐 지나간다. 곧 사라진다. 구름은 시내산 장면을 지시하는 것뿐 아니고 그것을 넘어서 하나님의 임재를 표시하는 널리 퍼진 성서적 심벌이다. 구름이 시내산만을 덮은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광야 유랑에서 줄곧 그들과 동반했으며, 장막 위에 머물렀다(출40:34-38). 또 성전에 차있다(왕상8:10f). 간단히 말해서 우리의 이야기는 의심할 것 없이 시내산 전통을 회상시킨다. 그러나 그것을 이 전통에서만 배타적으로 이해할 것은 아니다. 마가의 단화는 하늘의 소리를 중심에 둔다. 마가가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는 말에 초점을 두지만, 예수는 윤리적 계명 같은 훈계를 베풀어 백성을 통솔하는 '모세적'교사로서가 아니라 고난받고 승리한 주로서의 예수를 그의 변모설화에서 제공한다. 마태는 엘리야를 모세와 나란히 세우고 또 그분 앞에 두면서, 구원사적인 맥락 안에서 구원사를 완성하시는, 영광스런 빛으로 변모하신 예수를 제시한다.

유대교의 전승에 의하면 구름이 모리아산 위에도,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아들'이삭을 제사 드렸을 때에 덮여있었다고(창22:2, 12, 16)한다. 그것 때문에 제2의 성서적 이야기로 내세워 그것을 우리의 장면으로 하여금 상기하게 한다. 특히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하늘의 소리는 이삭의 헌납을 연상하게 하는 것으로서 모세를 연상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리아산 이야기는 전체로서 예수의 변모 이야기와는 매우 다르다. 모리아산의 설화의 다른 특징들이 있지만 그것들이 변모설화와는 맞지 않는다.

변모 이야기는 즉위식을 상기케 한다. 신을 대리하는 왕이 하늘 위에 높임을 받아 하늘의 생명을 부여받고 하늘의 군세(軍勢)앞에서 사열하고, 주권을 위임받는다는 3단계의 절차를 가진 고대 에집트의 등극 의식이, 비록 다른 신약성서의 텍스트의 이해를 위해 참조되기는 하지만, 우리의 변모-이야기의 해석을 위해서는 중요하게 보이지 않는다. 만일 누가 이것을 우리의 본문에 적용한다면 곤경에 빠질 것이다. 예수의 변모 사실(2절)이 높임 받음과 천적 생명을 부여받은 것에 해당한 첫 단계로 본다고 하더라도 하늘의 인물 모세와 엘리야와의 사귐은 하늘 군세들 앞에 나서는 둘째 단계로 보기도 어렵고, 왕에게 주권을 위탁하는 것에 해당한 셋째 단계도 변모설화에서 찾아볼 수 없다.

만일 우리가 5절의 하나님의 음성 배후에 있는 시편 2:7을 상기한다면, 더 확실한 기반 위에 있게 된다. 그 목소리는 예루살렘의 왕들의 즉위의식에서 왔고, 신약성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론을 모범적으로 특징지어 준다. 로마서 1:3-4의 오래된 고백문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취임하시는 예수님의 즉위는 부활과 결부되어 있다(비. 행13:33f=시2:7). 부활은 동시에 예수의 높임 받으심이고 하나님의 영과 능력을 받는 것과 결합됨을 의미한다. 특히 5절의 하나님의 목소리는 이 배경 안에서 설명된다. 후대의 베드로 묵시서에 나오는 "변모"가 왜 예수의 승천과 결합되어 있는가를 이해할 것 같다. 마태복음의 결미 단화에서 그것이 분명하다. 하늘의 세계지배자 대신에 "예수만"(8절)이 거기 서 있고 제자들에게는 인자의 수난에 관한 것을 말한다. 산과 구름이란 동기는 이 관점에서 볼 때 허술한 관계밖에 없다. 엿새라는 요소와 초막의 동기는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변모설화는 많은 석의가들에게 초막절을 회상하도록 자극한다. 명백한 결합점은 skenai로서, 베드로가 하늘의 세 인물들을 위해서 건립해야 할 초막이다. 초막절은 속죄일 후 여섯째 날(비. 1절-레23:27, 34)에 시작한다. 이것이 단화 초두의 "엿새 후에"란 말을 설명해 주는 것 같다. 초막절과의 접촉점은 매우 박약하다. 특히 하늘에서 온 사람들을 위하여 초막을 짓겠다는 베드로의 제안을 승인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이 초막을 해석의 충분한 고리로 만들 수가 없다.

우리의 이야기는 유대교적 또는 그리스도교적 미래의 희망, 특히 장래의 부활의 몸으로서의 변화를 상기시키고 있다. 이 회상은 2-3절에 있어서 중요하다:종말론적 영광의 몸에서 이루어질 미래적 변모를 바울은 유대교 묵시사상처럼 말한다(고전15:51-2; 바룩묵시 49:2f;51;3,5, 9-12). 흰옷과 빛나는 얼굴은 의인들이 새 세계에서 가질 것이다(비, 단 12;3; 1 에녹 62:15-16; 4 Esr. 7:97 [해와 같은 얼굴]; 바룩묵시 51:3). 그런 연관은 특수한 것이 아니다:미래 희망과의 관련은 말3:23; 집회서48:10에 의해 이스라엘을 재건하기 위하여 들어오게 된 엘리야의 모습도 일깨워 준다. 사람은 때때로 모세의 재림을 요구한다. 대체로 재림하는 엘리야는 대부분의 경우 선구자이고, 그것에 대립하여 모세는 메시야의 유형이다; 둘이 순수 유대교 문서의 본문에는 결코 등장하지 않는다. 유대교적 기대에 의하면 시간의 마지막에 짊어질 그 두분의 과업과 기능에 대해서 우리의 이야기 가운데서 찾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우리의 단화에서는 그들은 단순히 하늘 세계의 대표자로서 등장하고 변모된 예수와 대화하는 것 뿐이다. 유대교에서는 두 분이 하늘에서 황홀경에 살고 미칠 듯이 기뻐하는 자로 묘사하는데, 그 점에서 예수의 변모 사건과 어느 정도 통한다. 간단히 말해서, 이 단화의 본문이 말하는 종말론적 미래 희망과 사귐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종말론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특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제자들은 엘리야의 출현을 통해서 유대교의 미래 희망에 대결하게 된다(10절).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보편적으로 '하늘'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우리는 변모단화에 대해서 전에 한 때 휩쓸었던 해석, 즉 재림을 앞당겨 경험한다는 해석을 다시 할 수 있게 된다.

종합:마태에 나타난 변모 이야기는 "다기능적(多機能的) 이야기로서, 많은 전통의 유형과의 연관이 허락된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은 시내산-신현현에서 취해진 특징(=a) 과 즉위 사상(=c)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즉위하셨고 새로운 시내산에서 계시되었다. 달리 묘사된 상관 가능성(=b, e)이 거기에 대립해 서고, 또는 일층 명료한 상으로 연관을 주장하는 것(=d)이 주변에 있다. 우리의 이야기는 매우 독자적인 것이며 그 양식이 독특한 양식의 그리스도론적 전설로 분류되는 것이며, 결코 다른 모티브나 표상을 전가함으로써 그 의미를 연역할 수 없다. 오랫동안 이 단화를 부활하신 분의 현현 장면이 수난 이전 행로에 삽입된 것이라고 보았지만, 그 설(說)은 매우 추상적 분류에서 오는 것이고, 본문 속에서 부활 후의 특징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태는 6-7절에 의하여 또 10-13절과의 긴밀한 결합으로써 그 이야기에게 다른 출구를 만들 수 있도록 변경하였다. 이것으로써 그것은 겟세마네의 장면에도 (특히 26:40,43-46) 유사성을 반사하고 있다.

IV. 사역

17:1 그리고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데리고 그들만으로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다.
17:2 그리고 그는 그들 앞에서 모습을 변화하셨다. 그의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났는데 그의 옷은 빛과 같이 희었다.
17:3 갑자기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함께 이야기하였다.
17:4 그것에 호응하여 베드로는 예수께 말하기를, 선생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만일 좋게 여기신다면, 내가 여기에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 하나에는 주님을, 또 하나에는 모세를, 또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17:5 베드로가 아직 말을 끝내지 않고 있을 때, 보라, 찬란한 구름이 그들을 덮더니 구름 속에서 "이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그를 나는 기뻐한다. 그의 말을 들어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17:6 제자들이 이 말을 듣고 매우 두려워하여 얼굴을 땅에 대었다.
17:7 예수께서 가까이 오셔서 손으로 그들을 어루만지시며 말씀하시기를,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아라"하셨다.
17:8 그러나 그들이 함께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타일러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기까지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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