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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저 밖에서 평화의 함성이(2) (마 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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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소재(素材)와 주제(主題)

복음서나 사도행전처럼 역사적 사건을 내용으로 담고 있는 본문을 설교의 본문으로 선택하는 경우에는 성실하게 설교를 준비하려 하면 할 수록 예상 하지 못하는 수많은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본문에 기술되어 있는 액면(額 面) 그대로가 과거의 사실 그 자체라고 믿는 천진한 맹신주의에 빠져 있지 않은 한, 우리는 과거에 실제로 무엇이 어떻게 일어났느냐는 물음을 외면 할 수 없다. 그러나 본문에 기록된 것을 근거로 하여 과거의 사건을 정확 하게 재구성하려는 학문적 진지성에 정비례하여 더욱 더 깊이 회의주의에 빠지게 된다. 우리의 본문인 예루살렘 입성 사화(史話)를 보기로 하여 살 펴보자.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에 관한 보도는 네 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다. 만일 마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가 일어난 사건 그대로라고 주장하려는 사람은 나머지 세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사실에 부합되지 않은 것 으로 배격해야만 한다. 또 네 복음서의 기록을 조화시켜서 일어난 일을 재 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각 복음서의 보도에 잘못된 요소가 부 분적으로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예루살렘 입성 행진에 서 핵심 부분을 이루는 이른바 호산나 환호 시위 자체가 우리의 본문에 기 술되어 있는 그러한 대대적인 규모로 진행되었을 가능성에 대하여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팔레스틴에 주둔한 로마 군대의 수비대는 유대 사람들의 절기 행사가 있을 시기에는 시리아에 주둔해 있는 로마군으로부터 병력의 지원을 받으면서까지 비상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만일 예수를 따르는 무 리들이 올리브 산에서부터 예루살렘 성문에 이르기까지 1km나 되는 긴 길 을 행진하면서 예루살렘 주민의 귀에 직접 들리거나 그 소문이 즉각 퍼질 정도로 호산나 환호 시위를 벌였다면 로마의 수비대가 즉각으로 개입하지 않은 이유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 뿐만 아니라 예수의 재판 과 정에서 왜 이 사건이 그의 죄목으로 고발되지 아니했는지 의문스럽다. 그 래서 예루살렘 입성 사건은 실제로는 아주 미미한 규모로 별로 대수롭지 아니한 방식으로 일어났을 것이라고 보는 소극적 비판주의에 머물거나 원 시교회가 구약성서의 모티브(motive)를 이용하여 예수의 메시야적 지위를 선포하기 위하여 꾸며낸 사건으로 보는 극단적 회의주의로 넘어가게 된다.

 과거의 사건에 대한 회의주의는 성서 본문에서 신학적 사상에만 초점을 맞 추는 이른바 말씀중심주의(Logozentrismus)에로 급선회하게 된다. 본문에 기술되어 있는 사건은 실제의 역사적 사건이든지 허구적인 사건이든지 상 관없이 그것은 어떤 주제(主題)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된 소재(素材)에 불과하며 기자(記者)가 그것을 매개로 하여 전달하고자 하는 그 주제의 사 상을 해독해 내는 것이 주석가의 과제요 그것을 오늘의 청중에게 선포하는 것이 설교자의 임무라고 한다. 이러한 입장을 우리의 본문에 적용하면:

1. 예수는 온유하신 왕이시다.

 2. 예수는 다윗의 자손(=메시야)이시다.

 3. 예수는 젤롯당적인 무력(武力) 혁명을 거부하시는 평화의 왕이시다.

 4. 예수는 유대 민족의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무관심하셨으며 개인의 심령 속에 평화의 왕국을 건설하려 하셨다.

 5. 예수는 앞 일을 알아맞히는 능력을 발휘하심으로써 그의 신적인 존재를 입증하셨다.6. 예수에게 일어난 모든 사건은 구약에 예언된 종말적 구원사건의 성취이 다.

 7. 무리가 예수를 다윗의 자손으로 환호한 것은 예수가 바야흐로 예루살렘 에 입성하여 정치적 메시야로서 유대 민족을 로마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 고 유대 왕국을 재건하리라는 그릇된 기대 때문이었다.

 8. 예수의 명령에 무조건 순복하고 그가 하시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제자의 도리이다(나귀를 끌고 오라는 명령의 이행과 나귀를 끌고 가 는 데 방해하지 않은 것)

9.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바쳐서 예수께 경배해야 한다(겉 옷과 나뭇가지).

 이러한 메시지는 교훈적이며 모두에게 유익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것은 기독론적 교리에 입각하여 추출(抽出) 되었다. 흙탕물에서 뽑아낸 증류수 가 깨끗하기는 하지마는 식물에 필요한 수분이 되지 못한다. 흙탕물은 더 럽기는 하지만 식물에게 생명의 힘을 제공한다. 예수와 그를 둘러싼 민중 들의 실제적 삶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채 예수에 관한 기독론적 교리나 기독자들에 대한 윤리적 교훈을 아무리 아름답게 꾸며내더라도 그러한 것 은 땅에 뿌리를 박지 아니한 식물처럼 생명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예를 들 어 예수는 온유하신 왕이셨다는 메시지가 기독자에게는 온유함이 귀중한 윤리적 덕목이라는 것을 가르치려는 데 궁극적 목적이 있다고 보는 것은 이 메시지의 바탕이 되는 본문을 그것이 뿌리 박고 있었던 역사적 현실에 서 유리(遊離)시켜서 그것이 지닌 본래의 생명력을 제거하고 그리하여 개 인용 윤리 덕목을 조립하는 가공장(加工場)으로 넘겨주는 것과 다름이 없 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그 장엄한 순간에 겨우 나귀에 몸을 싣고 행진해야 할 정도로 초라한 행색으로 나타나신 그분의 실제적 삶의 행태와 그러한 분에게 그들의 삶의 궁극적 문제를 해결하실 분으로서 희망 을 걸고 전적으로 투신한 민중들의 장한 결단에 초점이 맞추어지지 아니한 설교는 기껏해야 사상 강연이나 도덕 훈화가 될 뿐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개인과 역사를 새롭게 변혁시키는 힘이다. 그런데 그러한 계시는 하늘로부 터 인간이 조립한 가치 체계의 그물망을 중계 장치로 해서 인간에게 전달 되는 것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와 그분을 따르는 민중들이 벌인 인간 해방 운동을 통하여 역사 속에 나타났다. 설교는 나사렛 예수의 삶과 활동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하는 행위이다.

 Ⅴ. 본문의 현장에서 설교의 현장으로

21세기를 눈 앞에 두고 세계는 점점 더 치열한 무한경쟁 시대로 돌입하고 있다. 동구 및 러시아의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된 이후에 자유경쟁을 삶의 원칙으로 삼는 자본주의의 가치관이 유일한 생존 방법으로 강요되고 있다.

요즈음 각계에서 크게 유행되는 국제화니 세계화니 하는 구호는 인류가 국 가.민족적 폐쇄성에서 벗어나서 다변적인 국제 교류를 통해서 전세계적인 차원의 인류 공동체 가족으로 결속하겠다는 숭고한 목적보다는 경쟁 관계 를 전 세계적 범위로 확대시키겠다는 선언의 겉포장이다. "이제 세계에서 일등이 아니면 살아 남을 수 없다. 이등도 필요 없다"는 어느 대기업의 운 영 철학은 이 경쟁의 치열함을 잘 드러내준다. 경쟁에는 승자와 패자가 있 다. 승자에게는 영광이 돌아가지만 패자가 차지할 몫은 굴욕과 죽음뿐이다.

19세기에는 적자생존이라는 생물학상의 진화론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국제 간의 약육강식이 정당화되고 강대국에 의한 식민지 침탈이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은 채 자행되었다. 20세기에는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 사 이의 역학 관계로 인하여 무력을 이용한 식민지 지배 방식에는 제동이 걸 리게 되었다. 이제 21세기는 세계화라는 기치 아래 또다시 국제간의 약육 강식의 길을 터놓으려 한다. 공존이니 공생이니 협력이니 하는 낱말들은 박물관의 옛 사전에서만 찾아볼 수 있을 뿐 삶의 현장에서는 무자비한 먹 이사슬의 법칙이 작용할 것이다. 이러한 흐름에 편승해서 교육계에서도 고 교입시의 부활이니 우열반 편성이니 대학별 고사의 강화니 하는 조처들이 나오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 안에서는 없는가 한국의 교회는 세계적 인 초대형 교회를 교회의 이상형으로 꿈꾼다. 교인의 숫자와 헌금 액수로 목회의 성공 여부를 가늠한다. 예수는 온유하신 분으로서 가난하고 힘이 없고 생존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의 편에 서셔서 그들의 해방을 위하여 일하시는 분이라고 하는 성서의 증언은 자기들 의 교회 운영 방침에 맞지 않기 때문에 인본주의 신학, 자유주의 신학, 정치신학, 해방신학, 또는 민 중신학의 그릇된 성서 해석이라는 딱지를 붙여서 쓰레기 통에 폐기한다.

교회 밖에서도 교회 안에서도 자본주의의 법칙이 철저하게 지배한다. 경쟁 에 이기기 위해서는 교회는 강자의 편에 서야 한다. 예수는 강자여야 한다.

새끼 나귀, 십자가, 가시 면류관은 그들의 예수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다. 그들은 예수에게 승리의 면류관을 씌워 드리고 영광의 보좌에 앉힌다.

그리함으로써 그들은 이 세상에서 강자, 부자, 권력자, 승리자의 대열에 속할 당당한 권리를 획득한 것으로 자부한다. 약자, 가난한 자, 무권자, 패배자가 설 자리는 교회 안에 없다. 땀내 나는 겉옷을 안장 삼아 빈약한 새끼 나귀를 타시고 강자와 지배자들의 아성인 예루살렘을 향하여 진격하 시는 예수와 이러한 분을 메시야 왕으로 환호하는 시위 행진을 벌인 민중 들의 삶의 단면을 반영하는 예루살렘 입성 사화에 비추어 볼 때에 오늘날 우리의 교회상은 올바른가

예수는 예루살렘 입성 행진 때에 나귀를 타셨다. 나귀를 타셨기 때문에 예수는 온유하신 분이었는가, 온유하신 분이기 때문에 나귀를 타셨는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사람은 예수 시대 이전에도, 그 당시 에도, 그 이후에도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왜 그들 가운데 어느 한 사 람도 스가랴 9장 9절에 예언된 온유하신 왕으로 추대하는 무리가 없었는가 혹시 이들의 온유함이 예수의 온유함과 비교하여 열등했기 때문인가 예수 의 메시야 되심은 가령 어떤 수도승이 수련을 통하여 어떤 완성된 인격적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그런 경우와 전혀 다르다. 예수는 민중 속에서 민중 과 더불어 민중을 구원하기 위하여 활동하셨다. 예수는 나귀 등 위에서 자 기의 온유함을 실증해 보이심으로써 성품적 기준에서 메시야 되심의 합격 선에 도달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는 자기의 활동 무대 위에서 단독 배역을 담당한 배우가 아니었다. 마치 실체와 그림자의 관계처럼 예수와 민중은 분리할 수 없이 동일한 역사적 현상의 두 다른 측면이었다. 갈릴리에서부 터 벳바게까지 예수를 따라온 무리들은 예수를 통하여 맛본 진정한 삶의 체험에 근거하여 예수의 전 인격에 신뢰를 두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가 벳바게에서 늠름한 군마를 타고 개선 장군의 모습으로 위풍당당하게 나타 나신 대신에 볼품없는 나귀 새끼를 타고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나셨음에 도 불구하고 호산나 환호성을 지르면서 종말적 구원을 가져오실 분으로 예 수를 추대했던 것이다. 이 본문이 오늘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그 때 그 자리의 그 무리들의 그 용기 있는 위대한 신앙을 배우라는 것이다.

어떤 주석가들은 무리가 호산나를 외치면서 예수를 환호한 것은 그가 예루 살렘에서 정치적 왕으로 등극하시리라는 잘못된 기대 때문이었다고 주장하 면서 무리가 벌인 시위 행위의 의미를 평가절하 한다. 예수의 이 영광의 행진이 수난과 죽음의 길로 이어지리라는 것을 내다본 사람이 무리들 가운 데 하나도 없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무리가 그 일을 미리 내다보고서 이 자리에서 환호성 대신에 장송가를 불렀어야 옳았단 말이냐 그럴 수 없다.

그들은 그 때 그 자리에서 꼭해야 할 일을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했을 따 름이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 다" 하고 말씀하시면서 예수께서는 이들의 행위를 옹호해 주셨다.

 온유하신 임금의 등극 행사는 저 예루살렘 성 밖에서 저 멸시받는 이름 없 는 변두리 인생들 가운데서 조촐하지만 삶의 희열이 넘쳐흐르는 방식으로 거행되었다. 거기에는 군마도 병거도 군기(軍旗)도 시종(侍從)도 시녀도 없었다. 푸른 나뭇가지들과 땀에 젖은 겉옷들의 물결, 알몸으로 환호성을 지르는 민중의 함성, 이것이 평화의 왕 등극식을 장식하는 품목의 전부였 다. 오늘도 참된 평화의 왕과 평화 공동체는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탄생한다는 놀라운 사실에 우리는 우리의 눈과 귀와 마음을 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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