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그리스도를 맞기 위한 준비 (마 24:36-44)

첨부 1


전 세계의 교회는 오늘부터 그리스도의 탄생을 앞두고 그의 오심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대강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대강절에 교회는 보라색천으로 강단을 장식하고 이 땅위에 만왕의 왕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엄숙한 마음으로 기다립니다.

대강절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를 맞는 우리의 편에서는 "메시야를 기다리는 대망의 기간"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므로 대강절에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혼인날짜를 잡아둔 신부가 정성을 다해 혼인을 준비하는 것같이 마음을 정결히 하고(회개), 자신을 돌아보며(기도) 끝까지 견디는 자세로(인내) 주님의 강림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오시는 그리스도의 편에서 보면 상당히 다른 측면이 나타납니다. 그것이 오늘 이 대강절에 우리에게 선포되는 성서의 메시지입니다.

오늘 말씀은 전반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시간에 불현듯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36절에 그 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43절에는 주께서 어느 날에 오실지를 알지 못며 마치 도둑이 언제 올지를 예측할 수 없듯이 주님이 오시는 것도 예측할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44절에는 다시 한번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인자가 올 것이다."라고 못박고 있습니다. 본문전체의 분위기는 주님의 오심을 우리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불현듯 찾아오시고 도적같이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께서 이처럼 도적같이, 불현듯 찾아오신다는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마치 경찰이 숨어서 함정단속하듯이 우리를 골탕먹이기 위해 예고없이 찾아오시는 것까요 아니면 정말 도적같이,찾아오는 것이 떳떳지 못하기 때문에 불시에 찾아오시는 걸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주님은 예고없이 불시에 찾아오신다고 했습니까 그 의미는 과연 무엇입니까

이 본문을 마태복음저자는 복음서의 내용이 아주 긴박하게 전개되는 맥락속에 싣고 있습니다. 이 본문이 들어있는 24장앞에는 이 세상에 무서운 재난이 닥친다는 이야기와 그 때가 인자가 올 징조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그 다음에 오늘 읽은 본문이 연결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오심이 그냥 여행삼아 오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대한 심판자로 오신다는 의미입니다. 특별히 이 세상의 재난에 대해 기록된 24:3-14에 보면 이 세상이 심판대앞에 설 세 가지 뚜렷한 징조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그 첫째는 그리스도라 지칭하는 거짖 진리가 성행할 것이고 둘째는 나라와 나라가, 민족과 민족이 서로 거슬르는 인간의 갈등이 심화될 것이고 셋째는 인간의 마음이 갈기 갈기 찢어져서 서로 해치는 그런 상황이 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진리가 왜곡되고 인류가 서로 도우며 평화롭게 살지 못하고 인간의 마음이 근본적으로 타락해 버리는 이런 상황은 창조주로서는 결코 묵과할 수 없는 상황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특정한 시대가 아닙니다. 흔히들 이런 현상을 시간적으로 종말의 현상이라고 이해하고 지금 어떤 거짖예언자가 나오고 어느 나라와 어느 나라가 전쟁을 하고 이상기온현상이 있고 하는 것을 마치 종말이 온 것처럼 이해해서 말세라고 지칭하는데 이 본문의 의미는 결코 연대기적인 (Chronological) 차원에서 이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종말이 오기전에 인간의 세계는 전혀 그렇지 않다가 종말이 다 되면 진리를 거슬르고 나라와 민족간의 다툼이 심화되고 인간의 마음이 사악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는 창조직후 타락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인간은 항상 하나님앞에서 진리를 왜곡하고 다투고 분쟁하고 사악한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역사가 항상 그래왔습니다.

이 지적은 인간의 죄악이 항상 현재적으로 지속성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이런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으로 오늘 본문말씀이 두 가지의 권면을 하고 있는데 한 가지는 "깨어있어라"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준비하고 있어라."는 말입니다. 이 두 단어는 희랍어에서 명령형으로 쓰이고 있는데 이 명령형이 독특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희랍어 명령법에는 단회적 명령법과 계속반복적 명령법이 있는데 여기에 "깨어있으라"는 동사와 "준비하고 있으라"는 동사는 계속반복적 명령형입니다. 다시 말하면 한번 깨어 있고 한번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깨어 있고 계속해서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위에 언급한 인간의 죄성, 즉 진리를 거슬르고 인간간에 분쟁을 일으키고 마음이 사악해 지는 그런 성향은 어느 특정한 때만이 아니라 죄있는 인간이 존재하는 한 항상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이 두 동사가 반증하는 것입니다.

이 인간의 죄악의 지속성, 그리고 이 죄악에 대해 빠지지 않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 즉 항상 깨어있고 항상 준비태세를 갗추라는 의미는 이 본문이 있는 그 다음 장인 25장 1-13에 나오는 열 처녀의 비유에서 잘 나타납니다. 이 비유는 결코 종말만을 위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기에 신랑이 오신다는 것이 마지막 때에 한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오실지 모르는 무시간성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더욱 강조되고 있는 점은 신랑을 맞을 처녀가 항상 기름을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 점입니다. 열처녀에게 미래를 위해 준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준비상태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미래는 결과에 불과합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 기름이 준비되어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마치 군인이 현재 전투태세가 완비되어 있는 상태가 더 중요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대강절의 의미는 인간은 하나님앞에 항상 적나나하게 노출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어떤 행동과 생각도 하나님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고 낱낱이 하나님앞에 공개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견딜 수 있는 인간의 영역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이란 인간이 하나님앞에 성실한가를 묻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말씀에는 주님이 오시면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 데려간다는 말이 휴거란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앞에 의롭다함을 받게 되는 용납과 하나님으로부터 쓸모없는 인간으로 버림을 당하는 배척의 의미일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자신의 평가만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종국적으로는 하나님의 평가를 받고 어떤 삶은 하나님에게 영접되고 어떤 삶은 배척당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하나님앞에 바로 살아야 하는 것이고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심판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늘 상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은 이 심판앞에 견딜 수 있는 예방책에 대해 친절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예방책은 바로 위에서 이미 묵상한 "깨어있으라"는 말씀과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항상 보초를 서라는 말입니까 잠도 자지 않고 주님이 도적같이 임하시는 그 소리에만 귀기울이라는 말입니까 어느 휴거를 준비하는 집단처럼 일상생활도 다 내동댕이치고 교회에 모여서 찬송하고 기도만 하고 있으란 말입니까 두 예방책은 계속반복형명령으로서 항상 깨어있고 항상 준비하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모든 삶이 깨어있는 삶이 되어야 하고 모든 삶이 준비하는 삶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대학입학시험을 마치고 수석으로 합격하는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평소에 학교공부에 충실한 것이 수석의 비결"이었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주님이 오신다고 해서 따로 이것만을 위해 깨어 있는 것이 아니고 따로 이것만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깨어있는 상태가 준비하는 상태이고 그런 상태가 곧 주님을 영접하는 준비인 것입니다.

그럼 깨어있다는 것은 무엇이며 준비하는 것은 무엇을 준비하는 것이겠습니까 24장부터 26장에 걸쳐서 여러 가지 그 구체적인 예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진리에 굳게 서라는 것입니다. 여기저기 그리스도가 있다 해도 거기에 현혹되지 말고 하나님에게 굳게 서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을 유혹하는 어떤 것에도 현혹되지 말고 자기 자만심에도 현혹되지 말고 또 인간에게 겁을 주는 것에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이 역사를 최후에 의로 장식하실 것이라는 그 믿음에 굳게 서는 것이겠습니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에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신실하고 슬기로우라는 것입니다. 24장에 나오는 신실한 종과 신실하지 않는 종에 관한 비유, 열처녀의 비유, 달란트의 비유들에서 두드러지는 윤리는 신실의 문제입니다. 거짖의 삶이 아닌, 게으름의 삶이 아닌, 하나님 바로 앞에서 살아간다는 의식으로 진실하고 성실한 삶을 항상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신실하고 사회에서는 사악하다든지, 그 꺼꾸로 산다든지, 남에게는 신실하고 자기 가족에게는 불신실하다든지, 그 반대로 산다든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는 신실하고 남을 위해서는 불신실하다든지, 그 반대든지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성실한 삶의 자세가 하나님앞에서 요구됩니다.

셋째는 이 세상에서 고난당하는 자에 대해 자비를 베풀라는 것입니다. 25장 31절이하의 최후의 심판의 이야기는 바로 이 점을 분명히 합니다. 이 세상에서 목마른 자, 감옥에 갇힌 자, 헐벗은 자, 병든 자를 돌보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돌보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이런 자들과 자신을 동일시(Identify) 할 때는 굉장한 강조가 이 속에 들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사랑의 마음없이 그 실천없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증명할 길이 없습니다.

예언자 미가는 이 세 가지를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으로서 다음과 같이 정리했습니다. 주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첫째는 오로지 공의를 행하며 둘째는 인자를 사랑하며 셋째는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미가 6:8)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이 오신다는 소문이 들리는 이 계절에 우리는 우리의 삶의 옷깃을 새로이 여미고 하나님의 주권에 복종하고 주어진 삶에 성실과 진실로 살고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이웃과 함께 그 고통을 나누고 은총을 나누는 삶으로 주님의 오심앞에 떳떳한 삶을 살아가기를 권면합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