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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깨어 준비하라! (마 24:3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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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본문 사역

36절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
37절 노아의 때와 꼭 같이 인자가 올 때도 그러할 것이다.
38절 홍수 이전 시대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갈 때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며 지냈기 때문에
39절 홍수가 와서 모든 것을 쓸어버릴 때까지 그들은 알지 못했다. 인자가 올 때도 그러할 것이다.
40절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을 텐데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내버려둘 것이다.
41절 두 사람이 맷돌을 갈고 있을텐데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내버려둘 것이다.
42절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왜냐하면 너희는 주께서 언제 오실 지 모르기 때문이다.
43절 그러므로 너희는 이것을 알라! 도둑이 언제 오는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어서 그의 집이 도둑맞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44절 그러므로 너희는 준비하고 있어라! 왜냐하면 너희가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II. 본문 연구

본문에서 특이한 점은 인자의 도래를 심판적인 것으로 설명하는 점이다. 내용은 과거 사건을 회고하고 미래에 있을 일을 예상하면서 현재에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가르쳐 주는 세 가지 시각으로 구분할 수 있다.
과거적 시각:36-39절은 구약에 나타나는 노아의 방주 사건을 예로 들어 심판의 엄습성을 현실감 있게 설명한다.

< 36절 >

마가복음 13장 32절에도 거의 같은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은 독립적으로 사용되고 전승된 말씀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만이 재림의 시간을 아시며 사람이 그것을 안다는 사람들의 주장은 거짓이다. 사람은 그 때가 가까워 졌다는 사실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이것을 안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것은 하나님만 가지신 권위에 대한 도전이며 엄청난 죄악이다.)

< 37절 >

노아의 때와 꼭 같다는 말은 하나님의 심판의 전격성을 말한다. 사람들이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있을 갑자기 임했다. 재난과 심판은 전격적으로 임하는 경우가 많다. 평행 귀인 누가복음 17장 26절에는 롯의 경우가 더 기록되어 있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롯이 소돔에서 떠날 때까지 사람들은 사고 팔고 나무를 심고 집을 지으며 심판의 전격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 38절 >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이 죄가 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본문에서 결혼이 부정적으로 묘사된 것은 노아에 관한 기록 앞부분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창6:1-4).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에만 취하여 아내 택하는 일에만 몰두하는 잘못을 범한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 받으며 살아야 하는 인간이 영이 없는 `육'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결혼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며 인간에게 생명을 주는 영이 인간의 몸에 영원히 머물던 상태에서 120년만 한시적으로 머물게 하신다. 먹고 마시는 것도 본질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일에만 빠져 하나님의 뜻을 망각하고 육신의 쾌락만을 추구하기에 심판이 임해도 깨닫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 갈 때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은 세속적인 일에 철저히 빠져 있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둔감성의 극치를 설명하는 말이다. 그들은 세상이 영원히 이대로 있다고 착각한 것이다. 인간의 타락과 방종은 `세상의 영원성'과 `심판의 부재'라는 착각에서 시작된다.

< 39절 >

먹고 마시며 세속적인 일에 빠져 하나님의 뜻은 분별치 않는 생활을 하다가 다가오는 심판은 감지하지 못한 것이다. 홍수가 닥쳐 비로소 깨달았지만 이미 늦었고 재앙은 여지없이 임한다. '모든 것을 쓸어버릴 때까지' 라는 말은 인간이 추구한 것들이 철저히 파괴 당한다는 뜻으로 재앙의 심도를 가리킨다.
미래적 시각:40-41절은 장차 올 심판이 곧 선택받는 자와 버림받는 자로 철저히 분리하는 사건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 40절 >

밭을 갈고 있을 때 심판이 임한다는 것은 심판이 일상적 상황에 순간적으로 엄습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일상의 삶에서도 재림과 하나님의 뜻을 의식하며 살아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다. 두 사람의 위치는 순식간에 극과 극으로 달라진다. 데려가진 한 사람은 선택받은 사람이다. 버려진 한 사람은 버림받은 사람이다. 인자가 오는 것은 구원과 심판이라는 상반된 성격의 사건이 일어난다는 점을 밝힌다. 본문에는 심판이 곧 닥칠 것을 강조하려고 현재형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 41절 >

40절이 남자의 경우에 해당된다면 41절은 여자의 경우에 해당한다. 일상적 상황에 임하여 두 사람을 갈라놓는다. 따라서 선택받는 자의 입장에서 보면 일상생활을 하면서 순간 순간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면 된다. 그것이 최적의 준비가 된다. 심판의 시기를 알고자 하는 호기심에 집착하여 일상생활을 포기하거나 지나칠 정도로 위기를 느끼며 긴장된 생활을 할 필요도 없다 (살후3:12). 현재적 시각:42-43절은 현재에 살면서 임박한 심판에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를 가르쳐 준다.

< 42절 >

깨어 있으라는 말은 명령형으로 기록되어 있다. 깨어 있어도 되고 안 그래도 되는 것이 아니다. 절대로 깨어 있어야 한다. 사람은 사건이 일어나는 때를 알면 그때가 임박해서야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사건이 일어나기 바로 전까지도 둔감한 상태로 살며 다른 일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든지 긴장하며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타락하기 쉽다. 본문에 있는 대로 문제의 심각성은 그 때를 모른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때까지 딴전을 필 수 없는 점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주께서 언제 오실 지 모르기 때문에 늘 깨어 있어야 한다.

< 43절 >

43절은 42절을 한번 더 강조하면서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일종의 반복적 표현이다. 이번에는 일반적 서술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납득시키기 위해 아주 적절한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이 짧은 비유는 강한 설득력이 있어서 듣는 사람은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또한 심판적인 성격을 도둑이 예기치 않은 시간에 침입하여 완전히 털어 가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노아 홍수가 모든 것을 쓸어 가듯 집안은 털리는 곤경에 처하게 된다. 알면서 도둑맞는 사람 없듯이 분명히 오는 심판에 대비하지 않은 사람도 없지 않느냐는 말이다.

< 44절 >

결론적인 말씀으로서 42-43절의 요약이다. 홍수나 도둑이나 '생각지 않은 때에' 오기에 재앙이 된다. 인자도 그런 때에나 올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의 생각이 잘못 된 것을 드러내기나 하듯이 올 것이다. 그러므로 루터가 말 한대로 항상 하나님의 앞에서 살 듯이 살아야 한다 (coram Deo).

III. 본문과 관련된 여러 단상들

가. 심판의 엄습과 깨어서 준비하는 자세에 관한 한 예화

요사이 많은 사람들이 여객기를 타고 여행을 합니다. 승객이 자리에 앉으면 제일 먼저 승무원들이 잘 보이는 곳에 서서 시범을 보입니다. 사고가 날 경우에 대비해서 안전 장구 쓰는 법과 탈출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대체로 비행기 처음 타는 사람들일 수록 열심히 봅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그런 상황이 되면 그렇게 행동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반면에 비행기를 여러 번 탄 사람들일 수록 등한히 하고 한 눈 파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자신이 타고 있는 이 비행기는 그런 위험한 상황을 만나지 않는다는 막연한 생각이 방심하게 만듭니다. 진작 그런 상황이 오면 누구보다도 침착하게 행동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합니다. 지난 여름 무더위에 시달리던 우리들은 태풍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런 가운데 여객기 한 대가 제주 공항에 내리다가 사고를 일으킵니다. 아무도 예기치 않은 그 상황에서 승무원들은 승객들을 안전하게 대피시키고 재삼 확인까지 한 뒤 뛰어 내렸습니다. 깨어서 대비하는 사람만이 재앙이 엄습할 때 자신과 생명을 구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올 때를 대비하여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나. 심판의 불가피성

왜 하나님은 심판하시는가 창세기 6장 6-7절을 보면 그 이유가 나타난다. 세상에는 사람의 죄악이 가득 차고 마음에 계획하는 것들이 모두 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사람이지만 그 구실을 못하고 죄만 짓기에 땅에서 쓸어버리시기로 결심하신다. 심지어 노아에게 방주를 짓도록 명하신 뒤에도 다시 세상을 보시는데 세상이 썩었고 무법천지가 되어 있었다(11절). 살과 피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의 삶이 속속들이 썩어 있었다(11절). 살과 피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의 삶이 속속들이 썩어있었다(12절). 오늘에 사는 우리에게 주는 큰 의미가 있다.

다.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바른 자세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았던 노아만 계시를 받았고 준비하고 있었다. 이유는 그가 의롭고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깨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식하고 사는 것이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 것은 깨어 있지 않은 것이고 자연스럽게 죄를 짓게 만든다. 또한 인자의 재림을 노아 시대의 심판과 연결시킴으로 재림은 심판의 성격을 강하게 띄고 있음을 보여준다. 주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이 있는 달을 맞으며 우리 신앙인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 노아나 롯 시대의 사람들이 그랬듯이 먹고 마시는 축제일로 무감각하게 맞을 수는 없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로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서 깨어 있는 생활을 해야 한다. 세상이 아무리 썩어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당연시하며 타협하는 생활을 할 것이 아니라 근신하며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성탄을 맞는 바른 자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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