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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갈릴리 전도 (마 04: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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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어처구니 없는 일로 기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화과도 열리지 않고, 포도도 달리지 않고, 올리브 농사도 망하고, 밭곡식 하나 나지 않았는데도 기쁘답니다. 우리에 양떼도 간 데 없고 목장에 있던 소떼가 보이지 않아도 환성을 올리고 기뻐 뛰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미치광이 같은 사람이 누구일까요. 구약의 선지자 하박국입니다. 과연 머리가 돈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하박국이 본래 이런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패배 속에서 희열을 느끼는 이상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박국서에 의하면 원망과 원한에 치를 떨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에 사무쳐 하나님께 달려들어 절규도 했습니다. 부자나 권력자치고 하박국의 울분과 규탄의 대상이 되지 않은 자 없었습니다. “여호와여 사람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저 소리들을 언제 들어 주시렵니까 목이 메어 호소하는 저 억울한 한들을 언제 풀어주시렵니까 어인 일로 이렇듯 애매한 일을 당하게 하시고 이 고생살이를 못본 체하십니까 보이느니 약탈과 억압뿐이요, 터지느니 시비와 말다툼뿐입니다. 법은 땅에 떨어지고 정의는 끝내 무너졌습니다. 정의가 짓밟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합 1:2-4)”
하나님을 향한 하박국의 원망과 절규입니다. 다른 때는 필요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오셔야만 합니다. 세상이 마구 뒤죽박죽이 된 이 순간에 오셔서 억울한 사정을 들으시고 올바르게 재판에 주셔야만 합니다. 그런데 정작 필요한 때에 하나님은 너무 멀리 계십니다. 어쩌면 안계실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문제에는 아랑곳하지도 않으시는 분 같기만 합니다.
우리는 이런 하박국의 절규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우리도 하박국 시대와 같은 절박한 때를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이한열의 시신을 담은 상여가 시청 앞을 지나갈 때 우리는 그렇게 절규했습니다. 아직도 점심을 굶는 국민학생이 있고, 연탄깨스의 사신에게 젊음을 송두리째 저당잡히는 사람들이 수두룩한 때에 몇백 몇천억의 놀음으로 국가경제를 뒤흔드는 경제사범들을 볼 때에 기가 찼습니다. 단란한 부부가 도로에서 억 한마디로 생사의 갈림길에 서서 불귀의 객이 되어버린 한국원씨를 생각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절규해야 했습니다.
하늘을 처다보던 하박국의 눈이(1장) 땅을 둘러 봅니다(2장). “남의 것들을 전당잡아 치부하는 것들(2:6)” “죄없는 사람들을 마구 잡아 죽이는 것들(2:8)” “저만 살겠다고 남을 등쳐먹는 것들(2:9)” “죄없는 사람의 피를 빨아 도시를 건설하는 것들(2;12)” 아 세상은 이런 것들 뿐입니다. 욕합니다. 저주합니다. 미처버립니다.
이러한 하박국을 동정할 사람은 많습니다. 같은 감정을 가지고 하나님께는 절규하고(1장) 사람들에게는 욕을 퍼부을(2장) 수 있는 사람은 많습니다. 체제에 익숙하고 제 앞의 것을 챙기지 못할까봐 안달하는 우리들도 그러했으니까요.
그러나 하박국서 3장에서 하박국은 달라집니다. 이미 모든 것은 빼앗겨 버렸습니다. 남은 것은 가난 뿐입니다. 너무도 억울해서 증오밖에 모르는 동지들, 그들을 배반합니다. “비록 무화과는 아니 열리고, 포도는 달리지 않고 올리브 농사는 망하고, 밭곡식은 나지 않아도, 비록 우리에 있던 양떼는 간 데 없고, 목장에는 소떼가 보이지 않아도 나는 여호와 안에서 환성을 올리렵니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 날뛰렵니다(합 3:16-17)”
도대체 무엇이 어찌 되었다는 것입니까 어쩌면 하박국이 이렇게도 변해 버릴 수 있습니까 하박국이 절규하고 원망하던 상황은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지금 구원 받았다고 기뻐하며 환희에 차서 소리지르고 있습니다.
하박국의 감사와 기쁨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그 극한 상황에서 하박국의 생애을 백 팔십도로 회전시켜 버린 비밀은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의 정의가 구현되고 공법이 하수같이 흐르게 되는 하나님의 심판과 평화의 그 나라가 도래하게 된다는 비죤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본 것입니다. 정의와 공법으로 이 악한 세상을 심판하고 그 자리에 들어설 나라, 생명수가 흐르고 평화가 가득찬 나라, 내 이웃을 내 몸 같이 살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 친히 통치하시는 그 나라를 본 것입니다.
이 때는 예수님 오시기 6백여년 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오! 말만 들어도 온 몸을 짜릿하게 만듭니다. 사람들의 가슴마다 희망을 심고 목말라 기다리기 그 얼마만입니까. 그런데 그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세례요한을 통하여 전파되던 소식이 예수님을 통하여 현실로 증명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갈릴리 전도편을 공부하게 됩니다. 주님은 두루 다니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백성들의 병을 고치셨습니다. 구름떼 같이 모여든 허다한 무리들을 보게 됩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주님이 전도하시는 모습들을 마음에 새겨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주님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23절)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행해진 갈릴리는 넓은 지역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도보로 행군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예수님 때보다 한 세대가 지나간 후에 저술된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갈릴리에는 204개의 도시와 마을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도시에는 적어도 만오천명 이상의 사람이 살았다고 합니다. 이들이 단지 성벽이 있는 도시에만 해당된다 하더라도 최소한 300만의 인구가 살았음이 분명합니다.
주님은 이 마을들을 두루 순회하셨습니다. 매일 두 개의 마을을 순회하더라도 안식일을 위한 휴식도 없이 줄잡아 3개월은 걸려야 되는 일수입니다. 육체적인 힘의 소모만도 엄청난 것이 사실입니다.
주님은 순회전도자이며 교사이셨습니다. 본문은 회당에서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거의 같은 내용을 계속 반복하여 말하며 같은 문제와 병과 어려움에 계속 부딕쳐야 했을 것입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유대인이 사는 지역에는 가는 곳마다 회당이 있습니다. 주님은 다행이도 이런 회당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전도하실 수 있었습니다.
“회당”이라는 말은 두 개의 헬라어 즉 “함께”라는 말과 “모인다”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만나는 장소”를 뜻합니다. 회당은 바벨론 포로 당시에 생겨 났는데 후에 자기 나라로 돌아올 때에 그대로 옮겨왔다고 생각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볼 때에 옳은 설명이 될 것입니다.
어쨌던 회당은 유배지에서 하나님의 율법과 예배에 대한 굶주림이 마음에 용솟음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로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입니다. 귀환 후에는 예루살렘에서 먼 거리에 살았던 사람들이 자주 성전에 올라가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매 성읍에 적당한 규모의 회당들이 세워졌습니다.
유대인이 있는 곳에는 어디에나 회당이 있습니다. 매우 작은 마을에도 이런 회당이 있었던 것은 “한가한” 열명의 사람들이 회당에 기꺼이 봉사하며 헌신할 수만 있으면 회당을 건축했기 때문입니다.
회당의 예배는 항상 안식일에 있었으며 때로는 더 자주 드려지기도 했습니다. 회당 예배는 모든 사람들이 낭독되고 해설되는 하나님의 율법을 들을 수 있었고 공중기도에 함께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회당장은 관습적으로 낯선 참예자가 있으면 그 회당의 회중에게 인사시키고 권고나 위로의 말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가르치거나 설교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주님과 제자들은 설교하고 가르칠 수 있는 장소로서 회당을 쉽게 찾았고 그 기회를 십분 이용하셨을 것입니다. 주님은 흔히 야외에서 설교하셨으나 회당이 언급된 것은 주로 예배는 회당에서 드리고 또 우천시에는 회당에 모여야 하기 때문일 것으로 보입니다. 그때까지는 유대의 관원들도 편견에 덜 치우쳤기 때문에 주님의 회당 설교를 금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천국 복음이 무엇입니까 구약의 예언서 속에는 하나님께서 역사 속으로 오셔서 심판과 구원을 베푸시고 정의와 사랑의 그 나라가 세워질 것을 기대한 희망이 자주 언급됩니다. 그들의 예언 속에 나타나는 표현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날이 오면”이란 것입니다. 선지자들은 저마다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그날” 에 대한 환상을 제시했습니다. 그 중 몇가지만 살펴 보십시다.
첫째, 그날은 새 임금이 오시는 날입니다. 새 나라 즉 하늘나라의 임금이십니다. 예레미야는 그날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지금은 야곱이 고난을 겪는 때이지만... 그날이 오면 내가 야곱의 어깨에서 멍에를 벗겨 부수고 사슬을 끊어버리리라 그러면 남의 종노릇을 하지 않고 나 여호와를 저희 하나님으로 섬기며 내가 세워줄 다윗왕을 임금으로 섬기리라(렘 30:7,9)”
그날 오실 그분에 관하여 또 이렇게 진술해 줍니다. “내가 다윗의 정통 왕손을 일으킬 그날은 오고야 만다(지금의 왕은 정통 왕손이 아니고 옆에서 들어온 자입니다). 그는 현명한 왕으로서 세상에 올바른 정치를 펴리라(즉 지금의 왕은 어리석어서 심히 그릇된 정치를 펴고 있지만). 그를 왕으로 모시고 유다와 이스라엘은 살길이 열려 마음놓고 살게 되리라(지금은 마음놓고 살 수 없지만)(렘 23:5, 33:15).
둘째, 여호와의 날이 오면 옛 사람은 새 사람으로 바뀌고, 인간의 존엄성이 다시 회복되어 사람은 ‘하나님의 신부’가 됩니다. 이제 그는 이놈 저놈이 마구 주무르다가 내버린 계집이 아닙니다. 장터마다 단을 쌓고 산디를 만들어 놓고 지나가는 아무 놈에게나 가랑이를 벌리고 수없이 몸을 팔던 계집이 아닙니다. 물건이 크다고 해서 외국놈에게 제 밑것을 마구 비벼대며 여호와의 분을 터뜨려 놓던 천한 계집이 아닙니다(겔 16:23-24).
여호와께서 오셔서 하늘나라를 세우시면 사람 대접도 못받던 이 천덕꾸러기 계집은 그 신분이 확 바꾸어집니다. 하나님의 곱디 고운 새 색시가 되는 것입니다. 인권의 회복입니다.
세째, 그 날은 차례가 바뀌는 날입니다. 예레미야에게서 또 인용해 보십시다. “그렇지만 이젠 너희를 집어삼킨 자들이 도로 먹힐 차례이다. 너희 원수들이 포로로 끌려가고 너희를 털던 자들이 오히려 털리고, 약탈한 자들이 오히려 약탈 당할 차례이다. 너희가 ‘소박데기’또는 ‘퇴물기생 시온’이라고 불리웠으나, 이제는 너희의 상처에 새살이 돋아 아물게 하여 주리라(렘 30:16-17)”
네째, 그 날은 경제질서가 회복되는 날입니다. “사마리아 이 산 저 산에 다시 포도를 심고 심은 사람은 그 포도를 따먹게 되리라(렘 31:5)” 경제적 무질서는 형벌이었습니다. “집을 지어놓고도 그 집에서 살지 못하며, 포도원을 가꾸어 놓고도 맛을 보지 못하리라. 너희 눈앞에서 너희 소를 잡는데도 입을 대보지 못하고... 너희 땅에서 애써 거둔 곡식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다 먹어버리리라(신 28:30-34)”
이것은 저주입니다. 아주 고약한 저주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오시고 그 나라를 세우시는 날 그런 질서는 새로운 질서로 바뀝니다. 천국 복음이란 이런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새 임금 곧 정통 임금이 오셔서 새 나라를 세우실 것입니다. 그 나라는 인권이 회복되고, 차례가 바뀌어 지고, 경제질서가 제 자리를 잡는 그런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 나라가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나라가 우리 가운데 와 있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런 새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도 천국 복음을 전파하십시다. 이 세상이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지 않으면 정의의 나라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주의 복음을 전파하는데 안일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전도를 본받아 열심히 전파하는 성도들이 되십시오. 이 하나님의 나라를 점점 확장하여야 합니다.

둘째, 주님은 모든 질병을 고치셨습니다(23-24절)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는 한편 약한 것과 병을 고치신 것은 주님의 무한한 자비성에서 흘러 나오는 실천생활이십니다. 전도의 본령(本領)은 구원에 있지만 육체적으로 고통 당하는 현실을 외면치 아니하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는 이론의 종교가 아니라 실천의 종교입니다.
주께서 고치신 병이 종류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 나열된 병들은 치유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는 수술로 되는 것이 아니요, 약을 복용해서 고쳐지는 병도 아닙니다. 이것들은 오늘날도 난치병들입니다. 자연의 이치로는 치료 불가능한 것도 그리스도께서는 이들을 고치는 기적을 통하여 그의 신성을 보여 주셨다는 것에 역점을 둔 것입니다.
주님은 병을 고치는 이적으로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행적은 좋은 대조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또 다른 기적의 사람을 봅니다. 이스라엘의 해방자 모세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행한 기적들은 거의 가 다 심판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에 비하여 예수님의 기적은 사랑의 역사였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이해하는 병은 직접적으로 어떤 특별한 죄의 결과일 수도 있고(요 5:14, 고전 11:30)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요 9:2-3) 모호한 태도입니다. 그러나 모든 병은 타락된 세계에 살고 있는 그 결과로 간주합니다(마 8:17). 이런 모든 것들이 메시야 시대가 오면 그 비참함이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증명하시고 계십니다.
베드로는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다(벧전 2:24)”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질병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갈릴리에서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를 고치시듯이 우리의 모든 질병을 고치십니다. 이것을 믿는 자들에게 더 이상 질병은 그 육체에서 왕노릇할 수 없습니다.
이 소문은 당연히 멀리 멀리 퍼질 것입니다. 그 소문이 온 수리아에 펴졌습니다. 갈릴리가 서쪽으로는 지중해 연안에 항구들과 연결되고, 동쪽으로는 페르샤의 도시들과 연결됩니다. 북쪽의 다메섹과 남쪽으로는 예루살렘을 거쳐 이집트를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이기도 합니다. 그 때문에 예수의 소식은 매우 쉽게 그리고 소상하게 온 사방에 전파 되었습니다.

세째, 허다한 무리들이 주님을 좇았습니다(25절)
예수님의 명성은 갈릴리를 훨씬 넘어서까지 퍼졌습니다. 이방의 갈릴리에서 “비취기 시작”한 빛은 온 사방을 두루 비쳤습니다. 주님의 소식을 듣고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주님을 좇았습니다.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데가볼리는 10개의 도시라는 뜻입니다. 지리적으로는 갈릴리 바다의 남쪽으로부터 북쪽의 다메섹에서 빌라델비아에 이르는 갈릴리 동쪽의 수리아 지방을 말합니다. 그 10개의 도시가 어디를 말하는지 지금도 의견의 차이가 있지만 꽤 넓은 지역입니다.
요단강 건너편은 주로 베리아라고 불리웠는데 이것은 “건너편”이라는 뜻입니다. 요세푸스는 베리아의 북쪽에는 펠라가 있고 남쪽에는 마케루스가 있다고 했습니다. 지도를 펴놓고 보시면 갈릴리 남쪽 해안의 반대쪽에서 시작하여 사해의 동쪽 중간쯤에 있는 모압과 닿은 지경을 말합니다.
주님의 사역은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예루살렘에서 끝마치셨습니다. 지도상에서 뼘으로 재면 한 뼘도 되지 않을 땅이지만 여기서 비친 빛이 온 세계를 두루 비치고 우리들 심령 구석 구석까지 비치고 있다는 점에서 성서지리를 공부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주께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약한 자 병든 자를 고치실 때에는 허다한 무리들이 따랐으나 막상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는 저를 따르는 자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기까지 했습니다. 이것이 인생의 정체입니다. 인간이란 것은 누구나 자기의 이익만 구하면서 십자가는 회피합니다.
이익이 있을 때에는 따르고 이익이 없으면 버릴뿐만 아니라 도리어 처치하려고까지 합니다. 그 약은 꽤가 사실은 생명의 주를 죽이고 영생의 축복을 걷어차 버린 꼴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여우가 제 꽤에 넘어갑니다. 약삭빠른듯 하지만 항상 손해보는 것은 이 까닭입니다.
주님은 인간성을 너무도 잘 아십니다. 약은 꽤를 알면서도 천국으로 인도하시려고 복음을 전하시며 질병을 고치십니다. 우리의 따름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던 그 약은 꽤를 가진 사람들의 무리에 속하지나 않을는지 두렵습니다. 주님이 주는 떡을 먹고 그 손으로 치료받은 몸뚱이를 가지고 자기에게 이익이 없을성 싶으니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아우성쳤습니다.
하늘을 찌를듯이 솟아있는 십자가 탑아래 으리번쩍한 예배당 안으로 꾸역 꾸역 모여드는 저 예수쟁이들이 속에는 무슨 꿍심이 있는지 알 수 있습니까 그들의 관심이 진리에 있지 않고 이득얻을 궁리 뿐이라면 지금도 그리스도를 찌르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려는 길을 가로막는 원수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쳐다보지 말고 세상교회를 부러워 말고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 나라의 복락을 누리시면서 이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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