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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행복(5)-긍휼 (마 05:1-7, 살전 05: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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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다섯번째 행복론에 관해 명상하고 그 뜻을 음미하고저 한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공동번역성서에서는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사람들은 실력이 있어야 행복해진다고 믿는다. 그래서 주먹질 연습에 열중하고, "아는 것이 힘"이라며 공부하기를 힘쓰기도 한다. 다른 사람 보다 실력이 있어야 경쟁에서 승리하고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비를 베풀다가는 이미 경쟁에서 낙오된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자비 를 베푸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셨다.

 곽노순 교수의 글 "그대 삶의 먼동이 트는 날"에는 이런 말이 씌어져 있다.

 "원수의 공격을 어떻게 맞으랴 예의를 지키면 담을 두른 것 같고 관대하면 든든한 대문을 세운 것 같고 겸허하면 높은 성곽 안에서 사는 것 같다.

 그리고 자비함을 알면 원수가 어디 있으랴"

예의를 지켜 대하면,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하면, 겸손한 자세로 대하 면 원수의 침노를 막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원수 자체가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자비를 베풀면 원수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인간관계 에 있어 가장 바람직한 성품은 자비를 베푸는 마음이다. 그래서 옛 사람들 은 적선(적선)을 최고의 덕으로 여겼다.

 (1)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란 다른 사람의 아픔과 슬픔을 나누어지는 사람 이다. 사마리아 사람의 덕성은 "강도 만나 죽게 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기고 가까이 가서 상처를 돌보아 주었다"는데 있다. 제사장도 지나 가고 레위인도 지나갔는데 유독 사마리아 사람만이 그 고난의 현장에 뛰어든 것 이다. 레위인이나 제사장은 다 같은 종교적 인간들이다. 마땅히 억울하게 죽게 된 사람을 돌보아 주고 그들의 인권침해를 규명하여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책임을 기피하였다.

 이것은 예수의 비유에 있는 이야기이다. 이 비유를 들어 말씀하게 된 것은 청년법관의 구원문제에 관한 질문에 대한 답으로 예거된 것이다. 예수 는 청년법관에게 "당신 생각에는 이들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겠느냐"고 물었다. 청년법관은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대답하였 다. 그러면 "당신도 가서 그대로 하시오. 그러면 살게 될 것이다"라고 명 하셨다. 자비를 베푼 사람은 복이 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복을 받는 다.

 상계동에는 은명내과의원이 있다. 1984년에 설립된 이 병원은 정동교 회 김경희 장로님이 원장으로 진료를 베풀고 있다. 그는 환자를 돌볼 뿐만 아니라 85년도에 은명장학회를 조직해 불우한 청소년들의 학비를 지원하고 있다. 85년설립 이후 89년까지 자그마치 800명의 중학생과 고등학생들에게 학비를 보조해 주었다. 중학생에게는 연간 28만원씩, 고등학생에게는 40만 원씩 지급했다. 놀라운 일이요 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김 장로님은 은명심장수술후원회를 조직, 수술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심장질환자들을 돕는 운동도 벌이고 있다. 이분이야말로 병든 자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이다.

은명내과의원을 위해 김 장로님은 다음과 같은 소원을 잊지 않고 외우고 있다 한다.

 "은명의원, 사랑의 집 너는 소금과 빛이 되고 방주와 등대 되어라 육신의 고통을 덜어 주고 죽을 생명 살려 주며 마음의 평안까지 선물로 주려무나.

강도 만난 자의 상처를 치료하고 물에 빠진 자에게 생명줄 던져 주고 약한 자의 무거운 짐 내려 주어라."

다른 사람의 슬픔과 아픔을 나누어 지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가 영원 한 생명의 복을 누릴 것이다.

 (2)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란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는 사람이다.

그리스도교의 진수는 십자가이다. 십자가의 특이성은 구속의 은총에 있 다. 십자가를 통해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죄에서 해방되고 구원받는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린채 "아버지여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누가 23:34)라는 기도를 드렸다. 그 기도, 용서의 기도가 그의 죽음으로 하여금 인류구원의 원동력이 되게 하였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완전하심 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마태 5:48) 존 웨슬리는 그리스도인 가운데 두 유형의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말했다. 준그리스도인(Almost Christian)과 완전한 그리스도인(Altogether Christian)이다. 준그리스도인의 경지에 이르기도 힘들지만 그리스도인은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준그리 스도인이란 있을 수도 없고, 또 있어서도 안된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완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는 말 씀은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설교의 결론으로 하신 말씀이다. 원수를 사랑하며 그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 이 하느님과 같이 완전해진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사도들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이지만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린도전 13:13) 고 설교했다.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 사람은 모든 죄와 허물에서 구원받기 때문이다.

 야곱은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인, 천륜을 저버린 망나니였다. 그리 고 외삼촌을 속인 사기꾼이었다. 에서는 절치부심 원수 갚을 날만 기다리며 칼을 갈고 있었다. 그러나 형 앞에서 무릎을 꿇고 일곱번씩 절하는 아우 야 곱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그의 복수심은 눈과 같이 녹아 버리고 아 우를 용서했다. 이 때 야곱의 눈에 비췬 에서의 얼굴은 하느님의 얼굴과 같았다. "이렇게 형님이 나를 따뜻하게 대해 주시니 내가 형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 꼭 하느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습니다"(창세기 33:10)400명의 사 병(사병)을 거느리고 복수의 기회를 엿보던 에서는 아우의 참회와 사과를 받아들여 용서함으로써 어리석은 형이 아니라 그 얼굴이 마치 하느님의 얼굴과 같은 존재로 변화되었다.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야곱은 "이 못난 아우 야곱이 문안드립니다. 아무쪼록 너그럽게 보아 주십시오."(창세기 32:4-7)라고 용서를 빌었다.

 작가 톨스토이는 그의 명작 "안나 카레니나"의 서문에 다음과 같은 성 구로써 작품의 주제를 밝히고 있다.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기뻐하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기뻐해 주고 우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울어 주십시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다 좋게 여기는 일을 하도록 하십시 오. 여러분 자신이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 십시오. 원수가 배고파하면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면 마실 것을 주 십시오. 악에게 굴복하지 말고 선으로써 악을 이겨 내십시오"(로마 12:14-21)

(3)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란 다른 사람의 속사정을 자기 지렛대로 보지 않 고 그 사람의 눈으로 보고, 그 사람의 감정으로 느끼고, 그 사람의 사고로 생각하는 사람이다.(W. 바클레이) 시인 발자크(Baljac)는 "발명가의 고난 "이란 글에서 "실락원이란 공감자(공감자)를 잃어버리는 것"이라 했다. 사 람은 모든 것의 중심이 자기에게 있다. 그러나 루터는 "그리스도인이란 모 든 것의 중심이 자기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지는 사람"이라 했다.

 예수께서도 당시의 세태(세태)를 걱정하시면서 탄식했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마치 사람들이 장터에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슬퍼하지 않는다"(마태 11:17) 비정(비정)의 세태, 무정(무 정)의 세태를 가슴 아프게 여기셨다. 비정의 거리에는 폭력과 속임수만 판을 친다. 무정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외로움이나 아픔을 그의 무능, 그의 죄과의 탓으로 매도한다. 이것은 무서운 죄악이요 자기기만의 행위이 다.

 테레사 수녀의 주변엔 먹지 못해 죽어가는 사람, 병들어 죽어가는 사 람들이 많았다. 과연 테레사의 친구들은 죽음에 즈음하여 무슨 말을 남겼으 며 무슨 희망을 이야기했을까 테레사의 회고에 의하면 그들이 죽기전 단 한 시간만이라도 자신들을 이해하고 벗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먹지 못해 죽는 사람에겐 마음껏 먹었으면 싶을텐데, 병 들어 죽어가는 사람에겐 일급 병원에서 한번 치료받기나 하고 죽었으면 싶 을텐데 실상 그렇지 않았다. 그들의 마지막 소원은 참 친구, 참 이웃을 보는 것이었다.

 현대인은 고독한 군중(D. 리스만)이라 했다. 사람은 너무 많아 지구촌 은 폭발직전이라는데 실제 있어 사람들은 "서로가 타인"(타인)으로 살아간 다. 이 살벌한 생활환경 속에서도 우리에게 힘이 되고 의지가 되는 이가 누구일까 진정 믿고 따라갈 만한 존재가 누구일까"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 친구이시라

그 은혜를 간구하면 풍성히 받으리 주야로 보호하시며 바른 길 가게 하시니 의지하고 따라갈 이 주 예수"(찬송가 93장 톰손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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