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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 죄를 용서 하소서 (마 06:11-16, 18: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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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기도생활을 하는데 몇가지 장애물이 있습니다. 왜 기도생활에 실패하고 기도생활을 잘하지 못하는지를 생각해 보면 그 첫번째 이유는 당면한 문제에 너무 집착해서 그것을 해결하려고 열심히 돌아다니기 떠문에 기도의 시간을 갖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기도는 심심풀이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바쁘고 중요한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기도의 시간이 더욱 더 꼭 필요합니다.

두번째 이유는 기도를 유치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기도하지 못하고 기도생활에 실패 합니다. 아마 이 자리에 계신는 분들도 기도를 유치하게 이해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어린아이들이 산타클로스가 선물을 갖다 주기를 바라듯이 항상 하나님께 구걸하는 것으로만 기도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무엇을 달라고 하는 요소도 있지만 기도의 중심은 하나님 아버지와의 교제입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귐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은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인격적인 교제와 사귐을 통해서 하나님의 그 풍성하신 삶 그리고 우리의 삶의 기쁨과 감사와 사랑이 삶 속에 머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번째 이유는 기도하는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세금과 같이 강제적으로 해야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 않으면 안 되어서 하는 의무가 아니라 평화와 기쁨을 회복해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특권이기도 합니다.

삶의 어떤 정황을 만나든지 하나님 앞에 무상출입할 수 있는 특권이 기도입니다. 기도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특권이라는 것을 자각한 사람만이 기도 생활을 잘 할 수 있습니다.

네번째 이유는 언제나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우리로 하여금 기도생활에 실패하게 합니다.

여러분에게 물어 봅시다. 여러분 중에 최근에 달성공원에 가 보신 적이 있는 분이 있습니까 대구에 살면서도 달성 공원에 안 가본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언제든지 가 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그곳에 가지를 않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기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도하지 아니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기도할 때가 되면 기도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실패하거나 늙어서 인생이 쓸모없거나 죽을 병에 걸려야 기도하는 줄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다섯번째 이유는 인내의 부족입니다. 참을성이 없기 때문에 기도생활에 실패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한 두번 기도해 보고 자기의 원대로 뜻대로 이루어지지 아니하면 기도를 포기해 버립니다. 좀더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뜻에 자기의 뜻을 바치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려 꾸준히 기도하지 못하기 때문에 풍성한 은혜와 행복의 삶을 맛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 하옵소서]라는 기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우리에게 밥을 주십시요] 라는 기도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밥이 중요하지만 밥이 전부가 아닙니다. 사람은 밥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 영적인 존재입니다. 영적인 존재는 죄를 그대로 가지고는 절대로 행복하게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죄를 잘 해결해야 영혼이 행복을 누리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사는 존재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더불어 사는 존재입니다.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남의 의견을 듣기도하고 자기의 생각을 제안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살다보니 서로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기도하고 때로는 서로의 기대를 좌절시키기도 합니다. 서로를 행복하게 만들기도 하고 불행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서로 부딪치기도 하고 의견이 다르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 그러므로 때로는 관계가 깨어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사람과 더불어 살다보면 이웃에게 빚을 지기도 하고 잘못을 범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죄라는 것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없이 살기를 원하지만 그러나 인간이 죄와 동떨어져서 살 수 없는 존재인 것을 하나님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 죄라는 것은 빚을지는 것입니다.

이 빚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랑의 빚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랑의 빚을 지고 삽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좋은 모든 것은 인간의 재간으로는 생산될 수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는 빚을 지고
있습니다.

오늘의 나는 하나님의 사랑뿐 아니라 이 세상의 부모의 사랑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모의 사라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또한 사회와 교회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스승의 빚을 지고 있으며 국가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이 사랑의 빚은 갚을래도 갚을 수 없는 빚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사는 것입니다. 여기에 진정한 감사가 있습니다. 사랑의 빚을 많이 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감사의 인생을 삽니다. 사랑의 빚을 많이 졌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일수록 아름답고 복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사랑의 빚은 많이 지면 질수록 그것은 축복입니다.

또 하나의 빚은 죄의 빚입니다. 이것은 범죄한 결과로 진 빚입니다. 그런데 이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죄는 세가지 입니다. 첫째는 우리가 마땅히 되어야 할 존재가 되지 못한 것이 죄입니다. 둘째는 마땅히 해야할 바를 하지 못한 것이 죄입니다. 셋째는 우리가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나 사회앞에서 우리가 마땅히 되어야 할 존재가 되지 못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모로서, 아내와 남편으로서, 자식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하지 못하는 것이 죄입니다. 또한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죄인 아닌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자각하기를 싫어합니다. 신문에 이름이 날 만큼의 죄를 지어야 죄인이지 그렇지 않으면 죄인이라는 인식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인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되어야 할 그러한 사람이 되어 있지 못하며,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하지 않았으며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했습니다.

죄를 회개할 필요도 없이 스스로를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가장 큰 죄인으로 정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정죄하신 자는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이 오직 자기에게만 쏟아 부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을 믿으며 약한 자나 잘못을 범한 자를 가혹하게 대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을 향하여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원이 필요없고 병든 자에게만 의원이 필요하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자기 스스로 죄인이라고 하는 자각이 있는 자에게 참 구원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1:31에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의롭다고 생각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을 가혹하게 대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스스로를 의롭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세리와 창녀가 여러분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 가리라고 하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첫번째는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 나아가서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는 사람 곧 유대인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두번쩌는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회개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없는 사람 곧 이방인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번째는 회개해도 소용없고 용서받을 희망도 없는 부류의 사람이 있는데 문둥이, 중병환자, 창녀, 세리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이 회개해도 소용없고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와 긍휼을 받을 수 없다고 딱지를 찍어 놓았던 문둥이와 창녀와 세리와 중한병에 걸린 사람들을 향하여 [너희 죄가 사해졌느니라]는 놀라운 용서를 선포한 것을 우리는 복음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죄의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육체가 밥이 없이는 살 수 없듯이 죄의 빚을 갚지 않고는 사람답게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만약 어떤 죄를 짓던 사람이 그 이상 더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죄를 짓던 사람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으면 다 되었다고 생각합
니다.

그러나 죄를 짓던 사람이 더이상 죄를 짓지 않고 착한 일한다고 해서 그 죄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끊임없는 죄책감과 후회가 우리의 삶을 파괴하고 행복과 건강을 파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용서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택한 이스라엘 백성이 죄에 매어 있어서는 복의 근원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죄를 처리하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사제도 입니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라는 제사제도를 두셔서 인간이 양심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생각으로 범죌르 하고,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국가적으로 범죄하게 되어졌을 때에, 우리의 죄를 자각하고는 양을 제물로 가져가서 양의 머리에 손을 얹고 죄를 다 고백하고 그 양을 제물로 바친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용서와 하나님의 자비를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 보면 재물로는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웃사람에게 구체적으로 범죄를 해서 그들에게 손해를 끼친 죄입니다. 이 죄는 사람에게 용서를 받아야 하나님에게 용서를 받을 수 있고 또한 사람을 용서해야만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구약성경에 나오는 속건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감으로 인하여 검정색이 흰색이 되어 집니다. 하나님없이 살던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 앞에 우리의 삶을 바치게 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신분을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죄인을 의인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여러분! 검은 옷이 더럽다고 해서 그것을 빨면 빨수록 그 검은 옷이 더 검어지는 것이 진리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 하나님없이 사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 앞에 자기의 삶을 내어놓지 아니하는 사람은 자기가 의롭게 살면 살수록, 바르게 살면 살수록 하나님 앞에는 더 큰 죄인이 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경험하고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새롭게 되어진 사람은 하나님이 그를 의롭다고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았지만 이 세상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살다가 보면 늘 인생의 옷이 더러워집니다. 그러므로 더러워진 옷을 날마다 순간순간 빨아야만 행복한 그리스도인의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함 없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없다는 사실,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과실을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형제와 화목하고 그후에 예물을 드리리고 말씀하십니다.

이웃과 화해함이 없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을 우상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화평이 없이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와 축복을 받겠다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종교들이 있고 많은 신앙이 있습니다. 무당을 불러서 굿하는 사람에게는 이웃이 필요 없습니다. 귀신에게만 잘 보이면 되는 것입니다. 산에 올라가서 산신령 앞에 절하는 사람에게 이웃이 필요없습니다. 그저 산신령 앞에 빌어서 잘 보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웃과의 화평없이 하나님과의 화평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웃에 대한 용서없이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받을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놀라운 핵심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에 보면 [주께서 여러분을 용서한 것같이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시오] [용서하라. 그리하면 하나님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것이다.] [너희가 남을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하나님이 너희를 헤아릴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전적으로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지 않은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무제한적인 용서를 받을 수 없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왜 용서하지 못합니까 우리가 왜 사람으로부터 용서를 구하지 아니합니까 크게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용서 해줌으로 자기의 인격과 자존심이 상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용서하지 아니합니다. 두번쩌는 우리가 용서하면 사회질서가 파괴된다고 하는 생각 때문에 용서하지 아니합니다. 자기에게 잘못하고 악한 일을 한 사람을 용서해 주면 사회정의가 무너지고 악이 판을 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의 공의를 세우기 위해서 부득불 용서해 줄 수 없으면 보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마치 대단한 존재인 양 큰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뭐 그렇게 대단한 존재이기에 남을 용서하면 자신이 무시당한다는 생각을 합니까 하나님 앞에 자신을 비춰보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1만 달란트 빚진 자와 족히 비교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이라고 용서하지 못합니까 우리는 또한 사회 질서와 정의가 무너지기 때문에 용서하지 못한다고 보복합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요. 하나님의 정의는 하나님이 세우십니다. 이 땅의 사람이 하나님의 정의를 이룩한 적이 있습니까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용서하고 용서 받는 비결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말씀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마지막 교훈은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같이 하시리라] 입니다 아직도 용서하지 못한 것이 있으며 용서 받지 못한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가 유보되어 있습니까 우리의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도 유보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고개를 숙여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때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 하나님이시여 나의 죄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라는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용서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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