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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는 누구뇨 (마 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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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 구뇨 하거든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 니라"(마 21:10-11). 예수님이 계시는 곳마다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때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최후 예루살렘 입성 때도 소동이 있었습니다. 또한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도 소동이 있었습니다.

 이 세계사적인 구령사업의 대무대는 유월절을 중심으로 하여 예루살렘 입성으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당시 로마 정부의 조사에 의하면 유월 절에 제물로 바쳐진 양이 약 25만 마리였다고 합니다. 양 한 마리를 최소한 열 사람의 제물로 친다면 모여든 사람은 적어도 250만 명 가량 으로 추산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 장정으로, 예루살렘 반경 30킬로미 터 이내에 있는 사람은 의무적으로 참가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팔레 스탄에 거주하는 유대인은 물론이요, 세계에 산재해 있는 그들은 기왕 이면 이 절기에 예루살렘을 찾는 사람이 많았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 다.

 예수님은 감람산 벱바게에서 평화를 상징하는 나귀새끼를 타시고 입 성하셨습니다. 이 나귀새끼는 아무도 타보지 않은 순수한 짐승이었습 니다. 요한보음 12:12에 보면,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호산나 찬송하 리로다 하고 환호하면서 영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가복음 11:7-9 에 보면 "나귀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걸 쳐 두매, 예수께서 타시니 많은 사람은 자기들의 겉옷과 다른 이들은 밭에서 벤 나무가지를 길게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외쳤습니다.

 이 많은 군중들의 자생적인 환영 속에 33세 되는 무명인사인 예수님 은 나귀를 타시고 당당하게 입성하셨으니 일대 장관이라고 아니할 수 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는 분명히 평화의 왕으로서 환영을 받으신 것 입니다. 예수님께 호산나라는 말로 환호한 것은 '이제 구하소서.'라는 뜻입니다. 무리들의 외친 호산나라는 말의 뜻은 깊은 애원이 담긴 것 으로 압니다. 로마제국의 속박으로부터 구해 주시오. 모든 가난과 질 병으로부터 구출해 주시오. 모든 억울함과 부조리로부터 구원해 주시 오. 아마 더 깊은 갈급한 요구를 채워 주시리라는 애타는 부르짖음이 었을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 모든 인생의 근본적인 욕구를 충족 시켜 주시는 주님이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적인 방법이 아닌 신적인, 유일한 방법인 십자가의 대속의 죽으심으로 성취되었던 것입니다.그렇 기 때문에 그 처참한 죽음을 목전에 두시고 용기 있고 담대하게 입성 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공의와의 무서운 대결의 결전장 이었기에 예루살렘 도성은 온통 큰 소동으로 술렁거리고 있었습니다.

 나귀 타신 분이 도대체 누구시기에 이런 소동이 일어나는 것일까 하 는 의문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 세계적으로 10억 이상 되는 세계 인구가, 그것도 유식하고 잘사는 선진 국가 사람 들이 믿고 있고 매년 종려주일과 부활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이 일에 대하여 한번쯤은 사심없이 깊이 생각해 볼 만한 일인 줄로 압니다.

 대제사장 가야바 같은 사람이나 서기관, 바리새인들과 같이 의도적으 로 예수님의 구속사업을 부정적으로 외면하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들의 밑바닥에는 잘못된 편견이 있습니다.저들은 자기들의 편견을 내세워 사실 자체를 묻어 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잠잠 하시거늘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 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 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울 찢으며 가로되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마 26:63-65)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주이심을 불신하고, 죽이려 는 증거로 삼았습니다.지금도 자기 편견을 믿고 진리를 외면하는 사람 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이들은 끝가지 신앙을 부인하는 사람들입 니다.

 다음으로 빌라도와 같이 예수님께 대하여 무관심한 사람들입니다. 빌 라도는 정치가로서 종교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가 신경을 쓴것은 권세입니다. 총독의 지위였지 예수님에 대하여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 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대해서 정당한 재판도 못 했습니다. 무죄인 줄 알면서도 무죄로 선포하지 못했으며, 죄없는 예수님을 석방하지도 못했습니다.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마 27:24)고 하였습니다. 이런 형식적인 행동으로 책임이 없다 하겠습니까 하여튼 우물쭈물 넘겼습 니다. 세상에 이런 무관심이 어디 있겠습니까 흥미나 관심이 부족하 거나 돌보지 않는 것이 무관심인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정죄하 고 싶지는 않았어도 책임만은 피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당치도 않는 아집을 내세워 변명하지 맙시다. 얼마나 비신사적인 처사입니까

마지막으로 심령에 큰 충격을 받으며 예수님을 겸손하게 영접하는 사 람이 있습니다. 지은 죄 때문에 십자가상의 한 강도는 죽어 가는 그 순간에 떨리는 심정으로 예수님을 깊이 생각했습니다. 또한 지은 죄도 회개 자복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 소서."라고 애원했습니다. 그 강도는 하늘과 땅 중간, 십자가에 매달 려 있었습니다. 불과 몇 초 있으면 영원한 죄인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 다. 예수님께 마지막 기도 외에 무엇을 기대했겠습니까 그의 사경에 서 마지막 애원을 들어 주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었습니다.우 리 예수님은 그 강도의 마지막 부탁을 외면하시지 않았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도 지은 죄를 깊이 회개하고 떨리는 겸허한 믿음으로 주님을 하 나님의 아들로, 생명의 구주로 영접하는 분은 어느 누구나 구원을 받 게 될 것입니다. 또한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성도들은 확실한 응답 과 축복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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