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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치료하시는 예수님 (레 13:1-2, 고전 10:3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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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주제:열왕기 하 5:1-14
엘리사는 엘리야의 제자이며 후계자로 주전 9세기 후반기에 이스라엘의 북쪽에서 예언자로 있었다. 예언자의 무리의 지도자로알려지면서(왕하 2:15-16), 그는 이스라엘과 외국의 정치에 큰영향을 끼쳤다(왕하 8:7-15, 9:1-3). 그렇지만, 그의 기본적인직무는 기적적인 일꾼의 그것이었다. 그 사람과 그의 능력있는행동의 추억은 예언자의 써클에서 보존되어졌고, 궁극적으로 신명기사가의 작품 속에 기록되어졌다(아마 열왕기 하를 통하여 신명기로). 엘리사의 전승의 대부분은 열왕기 상 19:19-21, 열왕기하 2-9:3, 13:14-21로 구성된다. 구약성서가 있는 곳에는 어디서나 그와 같이 작은 장소에서 기록된 그런 많은 기적은 없을 것이다
우리의 본문(왕하 5:1-14)은 불리한 환경에 직면하여 나아만의문둥병을 치료한 엘리사의 일을 보도한다. 그 치료의 이야기는포로로 사로잡힌 소녀가 엘리사를 "사마리아에 있는 예언자"로추천하는 데서 시작된다(3절). 나만은 서신과 많은 선물을 휴대하고 이스라엘 왕에게로 온다. 왕은 그 서신의 내용이 전쟁을 야기하려는 의도로 해석한다. 엘리사는 그의 왕의 의구심에 끼어들어 이의를 제기한다. 그러나, 나만이 엘레사의 지시를 따를 것을거부했을 때에 아직 치료를 볼 수 없었다. 단지 그의 종들의 촉구에 따라서 나만은 그 예언자의 말에 복종하려고 수그러든다.
나만은 요단 강에서 일곱 번 그의 몸을 담그자 그는 건강한 사람으로 나온다.
이 기적은 주로 교훈적인 목적을 갖고 있다. 어떤 특별한 관심이 이 기적에서 제시되지는 않는다. 치료는 기도의 능력있는 말에 의해 된 것이 아니다. 또, 그것은 주문, 공식 또는 몸짓에 의해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진실로 그러한 마술적 수행은 분명히이 시리안인인 나만이 기대했던 것이었다(11절). 대신에, 엘리사는 적절한 기적과 분리되어 있다. 이것은 모든 능력의 근원인 야웨에 대한 직접적인 관심으로 봉사한다. 엘리사는 이 기적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의 우월성을 입증시킨다(15절 참조).
또 다른 면에서 그 기적은 나만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그치료는 외국인이고 문둥병자인 사람에게도 은혜를 입힌다는 것이다. 야웨는 정상적으로는 깨끗하지 않는 자로 생각되는 한 외국인에게 도움을 확장시키므로서 그의 양립성을 입증하고 있다(레13-14 참조). 이 자극적인 인간주의적 관점이 기독교 전승에서분명해진 것이다. 그의 나사렛의 취임 설교에서 예수는 이방인을향한 하나님의 은총의 예로서 나만의 치료를 언급하고 계신다(눅4:27). 엘리사의 기적은 예수의 선교의 증거로서 봉사한다. 그것은 이 세상의 이방인에게 향한 것이다.

제 2주제:고린도 전서 10:31-11:1
고린도 전서 8-10장에서 바울은 우상에게 제사물로 드려진 고

기의 경우를 시범적으로 사용하면서 자유와 사랑의 원리를 발전시키고 있다. 우리의 네 귀절은 이 토의를 요약하고 있다.
원칙적인 예로서, 제사장의 음식을 먹는 것은 용인된다(31,8:8, 10:25 참조). 왜냐하면, 모든 것이 그 자체가 속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롬 14:14). 그리스도의 지체를 위하여 이 땅의 물건이란 그것의 제사적 및 마술적 성질이란 이미 잃었다. 왜냐하면, "이 땅은 주의 것이며, 그리고 모든 것이 그 안에 있기때문이다"(10:26, 시 24:1). 창조론의 철저한 적용(역시 8:6 참조)이 지구의 표면으로부터의 거룩이나 또는 비거룩의 요충을 제거해 버린다. 바울은 주님의 말씀 위에 깨끗함과 더러움에 관한이런 정의를 기초로 삼지 않았다. 이것은 그의 관점이 공관서의전승에 의하여 포용되는 말과 이야기에서 표현된 것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뚜렷하다. 그런 물질에 대한 접근은 그에게는 유용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어떤 경우에든 바울의 윤리는 깨끗함과 더러움 사이에 있어서 물질적 분리를 세우려고 하지 않는다.

우상의 힘으로부터의 해방이 자유의 지나친 남용을 위한 핑계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자유의 범위는 사랑의 적용에 의해 통제받기 때문이다(32절). 사랑은 타인에 대한 관심에 의해 인도된다. 만일 누군가가 이방인의 무리 가운데서 이 음식이 신앙고백의 위치(status confessionis)를 구성한다고 하는 사람을 위하여먹거나(10:27-29), 또는 만일 믿음이 약한 형제들이 아직도 고기의 효능을 믿고 있다면(8:7-13), 그 형제를 위하여 마땅히 절제해야 할 것이다. 행동의 과정을 결정짓는 것은 사물 그 자체나혹은 인간적인 선호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양심에 있는 것이다.

사랑은 공동체를 위한 관심에 의해 인도된다. 바울은 "그 자신의 이익에 의해서가 아니라(to emautou symphoron) 많은 사람을위한 그것을" 추구한다(33절). "도움이 되려는"(symphoron) 것은그 공동체에 이익이 되는 것이다. 바울은 폭군이란 "그 자신의유익만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동의하는 것 같다(Eth,Nic.:to hauto sympheron skopei). 바울의 윤리에서 개인의 이익이란, "많은 사람"의 유익에 종속되고있다(빌 2:4). 궁극적인 선은 국가와 사회와 성의 구별을 넘어"하나님의 교회"이다(32절).
"기독교인은 모든 인간적 제도와 가치의 표준으로부터 자유로운" 특권을 갖는다(R.불트만). 그러나, 자유는 하나님에 대한 의무와 형제에 대한 관심에 의해서 구체성을 띤다. 이것은 자유의노예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의 실천이다.

복음서 주제:마가복음 1:40-45
예수의 갈릴리 사역은 병치료와 마귀를 내쫓는 일에 몰두하고계신다. 예수는 그의 초인적 능력의 행위로 그의 신적 권위를 인증하신다. 그는 병자, 정신 이상자, 그리고 심지어 죽은 자까지도 살려내신다. 이 능력에 관한 기독론은 전복음의 대표적인 것은 아니다. 예수는 역시 고통과 죽음에 복종하신다. 그러나, 동성의 설화는 능력의 행위를 제거해 버리려는 의미에서는 바로 이해될 수 없다(그래서 과거와 현재에 있어서 많은 해석자들). 인간의 삶의 고통에 대한 예수의 통제는 십자가상에서 그의 굴욕에의해서 무효화되지 않는다.

문둥이의 치료에 관한 기적(1:40-45)과 마가에 있어서 마귀를내쫓는 것 사이에는 매우 유사성이 있다. 문둥이는 예수에게 그

를 고쳐 줄 것을 요청하고(40절:katharisai). 예수는 깨끗케 하여 주므로서 응답해 주신다(41절:katharistheti, 42절:ekatharisthe). 마치 그 문둥병자는 더러운 영에 의하여 감염된악마인 것처럼 보인다(pneuma akatharton, 1:23, 26-27, 3:11 등참조). 예수의 격동의 상태는 역시 마귀를 내쫓는 성격과 걸맞는다. 41절에서 많은 주석가들이 "예수님이 동정하셨다"(splangchnistheis)는 것보다, 차라리 더 어렵게 읽는 것(lecfiodifficilior):"그가 노하셨다"(orgistheis)를 택하고 있다. 예수는 분노하사 감동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문둥병을 악의현시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즉, 환자는 그로 하여금 악의 능력과대결케 한 것이다. 43절(마태와 누가복음에서 빠뜨린)은 귀신을내쫓는 과정에 맞게 한다. 비록 그 사람이 치료되었음에도, 예수는 아직도 그에 대한 강한 감정을 갖고 그가 악마를 내쫓는 태도로 유사하게 그를 떠나도록 명령한다(exebalen auton, 1:34, 39참조). 그 이야기의 극적 묘사가 예수와 악령간의 힘의 충동을가리킨다.

또 다른 면에서 병자의 치료는 예수가 종교적 기관과 더욱 가깝게 대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 깨끗치 못한 자가 사회로부터 멸시당했고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으로 간주했다. 이 문둥이가예수께 가까이 와서 그를 만지도록 하므로서, 예수는 그의 종교의 보호법을 더럽힌 것이다(레 13-14). 성공적인 치료가 제사장의 직제에 대한 고소를 제기하여, 만일 그 조직이 그 치료를 이해한다면, 반면에 치료자의 인격과 능력을 인정하는 것을 거부할것이다(44절의 마지막 절을 "그에 반한 증거"로서 읽는다, 6:11,13:9참조).
예수는 마력적인 능력의 입증은 악마의 세력에 반하고, 종교의권위에는 무거운 짐을 놓는다. 병자의 치료를 숨기려는 예수의노력에도 불구하고(44절), 그 사람은 그것을 공개시키지 않을 수없었다(45절).

설교를 위한 주석

나만의 치료 이야기는 설교자에게 현현절에 명령적인 선교의주제를 계속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하나님은 단순히 이스라엘의하나님만이 아니시고, "하나님은 시리아에 구원을 주셨다."는것은 바로 나아만에 의해서였다. 예수는 나만의 예를 들어서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지만, 이방인 나아만만이 깨끗함을 입었다고 지적하셨다. 이런 예는 분노와 반감을사서 예수를 그의 말을 듣는 자들 앞에서 죽이려고 하였다. 하나님의 힘을 제한시키려는 타락한 자에 의한 우상숭배적 의도에 대결하여 하나님의 법의 광범위한 주장에 의하여 야기된 분노가 모든 시대에 걸쳐 편만해 온 긴장인 것이다. 루터가 "인간의 마음은 우상의 공장이다."고 밝히는 것이 이상할 것은 없다. 어떤이의 한계를 더욱 근접시켜 놓는다는 것은 조직과 마찬가지로 개인에게도 죽음의 방향인 것이다. 벽을 찢어 버리는 것은 그들 자신의 올무에 빠진 희생자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한번은 신학생이 카리브 해역에 있는 영국 영토 서부 인디안의본토인을 위해 봉사하는 교구에서 일하며 한 여름을 보냈다. 그가 미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가 이제까지 했던 기여에 관해 오히려 그의 한계를 넓혀 준 커다란 은혜에 대해 의구심을 표현했다. 토마스 울프의 "그대는 다시 집에 갈 수 없노라."(You Can'tGo Home Again)를 읊조리면서 그는 어떻게 그의 집이 그의 삶의관점의 한계와 평가가 될 수 없는지 외치고 있다. 그는 이제 세

상을 보는 길로서 가정보다는 차라리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세계관을 갖는다. 그것은 세상에 관한 기독교인의 관점에 대해 디오게투스에게 보낸 서신은 초대교회의 선언문에 가깝다:"각자의 조국은 외국이며, 각자의 외국은 조국이다." 기독교 선교에 대한 놀랄만한 은혜는 주느 자와 보내는 자가 그 자신의 밀폐된 우상으로부터 자유의 소홀한 영수인이라고 할 것이다.

선교와 목회는 나눌 수 없이 관련되어 있고, 나만의 이야기는목회의 필수적인 특성, 곧 종의 정신을 회상시켜 주는 경우를 회중에게 제공한다. 엘리사의 능력에 대한 나아만의 지식은 하녀에게 의존하고 있다. 그가 예언자의 지시를 받았을 때, 그는 그것을 따르기를 거부했다. 왜냐하면, 엘리사가 그를 지켜야 할 존엄을 갖추지 않고 대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강에대한 그의 무례한 정중함이 그가 요단강에서 목욕하는 것을 금했다. 다시, 종을 통하여 "무용의 장수"로 하여금 겸비하고 치료받게 한다.
겸비와 치료 사이의 관계는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이다. 우리들의 사이에도 많은 나아만이 있다. 병든 결혼과 깨어진 우정에서자만은 피할 수 없는 울타리이고, 치료가 취해지는 곳은 겸손히내려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만, 겸비한 여러분이 피아노를칠 수 있는데도 칠 수 없는 것과는 다르다. 보통 거짓 겸손은 우리를 노출로부터 보호해 주기를 바라는 단지 교활한 거만일 뿐이다. 우리가 노력하려고 하는 아무 것도 겸비를 낳을 수는 없다.
그것은 참된 종의 정신의 부산물일 뿐이다. 우리가 왕국의 봉사에 뛰어들었을 때, 모든 노력과 성취는 종속적인 가치가 있을 뿐이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리라."는 고린도서의 본문에서 우리는 바울의 명령을 진중히 다루면서, 우리의 종의 의무는 겸손은 단지 가능한 결과일 뿐이라는그러한 요구 아래 있다. 그러므로, 겸손이란 단순한 굴종이 아니라 보다 깊은 자유이다. 교만의 죄악적인 면은 그러한 우리 자신의 존엄에 대한 사랑으로 우리가 공격들로부터, 또한 잘못된 변화에도 면역되어 버린 의도에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일을 하는 것은 우리의 존엄을 이 왕국에 전이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종으로서의 바울은 "내가 은혜로 말했던 그 음식을 먹는 것 때문에 비난을 왜 받는가"(NEB)라는 말에 의해 정죄로부터 그의 자유를 보여 주었다. 이 자유는 우리가 은혜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것을 했을 때에 우리가 할 수 있는것으로 확대된다. 교만의 역할은 드려진 봉사에 의하여 대치되고,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이 우리의 존엄에 의존하고 있는 것보다는 우리를 사랑으로부터 더욱 효과적으로 분리시켜 놓는 무장을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마가는 문둥이를 깨끗케 한 주제를 계속하여 다루고 있다. 피부병학에 많은 탈선을 포함시키는 것은 설교를 위해서 좋지 않은충고가 될 것이다. 구약과 신약의 본문의 요점은 그들에게 있어서 문둥병은 죄의 상징이요, 죄와 같이 그것이 전염성이 있고,치료받기 보다는 더욱 깨끗함을 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예수는문둥이를 만지므로서 법률을 깨뜨렸으나, 그러나 악령, 질병, 그리고 죽음에 대한 그의 능력은 기적적인 치료에 의하여 입증되었다. 법률을 어렸을 때, 그때 그는 구약의 선택적인 본문에서 레위기에 밝혀진 대로 모세의 요구에 따라서 제사장에게 자신을 보이도록 그 사람을 보내서 그 법을 따른다. 이와같이, 법을 어기기도 하고 따르기도 하는 이런 행동은 예수의 사역의 전체적 의

미를 요약해 주는 상징적 행동인 것이다. 비록 그가 문둥이를 만지고, 안식일에 치료하고, 법을 어기면서도 죄인을 용서할지라도그가 율법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성취하는 것이다. 예수는 제사장들 앞에서 문둥이를 깨끗케 함을 받아들이지않기도 하시고, 또는 받아들이므로서 그들 스스로 법을 깨뜨리는과격한 결정을 두므로서, 그로 인하여 율법 위에 있는 예수의 능력과 권위를 인식케 한다.
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는 이와 비슷하게 제사장이 곤경에 있는 당대의 청중을 그들로 하여금 보다 높은 소명에서 그들의 현재의 관여를 변형시키고 그들의 현재의 충성을 보다 깊은신앙으로 부르고 있다. 예수는 그가 어떤 전통의 한계 아래서 얻을 수 없는 사랑으로 종족, 단체, 교회의 법을 깨뜨리므로서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그 표준들을 깨뜨렸다.

메시야의 비밀이라고 그렇게 부르는 것은 그것이 마가의 시대에 그러했던 것과 같이 현대인의 귀에도 같은 역할을 갖는다. 고통과 죽음에 대한 예수의 기적적인 힘은 성서적인 자료나 계속되는 증거라는 양자에 의해서 깨뜨리지 아니하고는 거부되어질 수있다. 그렇지만, 마가는 예수가 잘못된 이유를 따르는 것을 원치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기적을 행하는 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십자가상의 승리자였기 때문이다. 예수는 "그가 동정에 의하여 감동되었기" 때문에 그 문둥이를 치료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가르치고 선포하고 있다. 그러나, 우연히 그가 만난자들을 치료하는 일을 반복 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군중들에게그에 대한 매력을 불러일으켜서 그가 누구인가를 구별을 하려는것이 아니라, 그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인 것이다. 예수는왕국의 선포가 움직이는 병원의 외침보다도 더 높기 때문에, 비록 치료가 본래적인 동정의 열매와 마찬가지로 왕국의 파생물이라고 할지라도 그는 군중을 애써 피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예수 그 자신의 충만한 드러남 속에서 인간의 마음은 변화되어지는 것이다. 말하지 말라고 예수의 명령에 대한 문둥이의불복종에서 그의 피부를 치료해 준 것이 그의 마음을 변화시키지못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제자가 되지 못했다. 예수에의하여 치료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언제 그가 배신당하고, 고난에 처하고, 군중이 해상되도록 제공되고, 끝내 십자가에 못박혔는가 그의 동정 때문에 그는 그들을 치료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외적 변화의 기적 이상의 더 깊은 목표를 추구한다. 한 인간의 바로 그 마음이 그의 삶에 의해 일깨워 주고, 그의 죽음 가운데 매장되고, 그의 제자 정신 속에서 부활되어져야 할 것이다.

한번은 오랜 경험을 가진 피부병 전문의가 그의 환자가 긴급히그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피부에 바를 약을 원했으나, 그의 규정 식사와 그의 생활 습관을 바꾸어야 하는 어떤 처방도 특성적으로 거부한 것을 관찰했다. 그 환자의 진면목이 바로 회중의 실상이다. 우리는 그 징후가 치료받아 낫기를 원하면서도, 그러나십자가에 의해서만이 일어날 수 있는 보다 깊고 더욱 근본적인변화는 거부한다. 메시야의 비밀은 신앙의 변화가 초인적인 기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피부에서 태어난 것이 아닌 십자가상의 마음가운데 있는 것이다. 어떤이들은 기적을 거부함으로 비밀을 간직하려고 시도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그 비밀을 직능적인 것으로만들려는 나쁜 방법인 것처럼 그 대신에 신앙이 신뢰의 여러 다양한 수준의 변화라는 것은 명백하다. 기적없이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깊은 의미와 기적이 주어졌으리라고 보는 것은 의심스럽다.
우리와 함께 표면적인 것을 신뢰하는 것이 우리의 삶에서 계속적인 조우가 우리로 하여금 신앙에서 더 큰 신앙으로 인도하는 하나의 과정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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