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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빛으로 오시다 (요 03: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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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약성경 가운데 요한복음 3장만큼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과 그 이유를 자세하게 밝힌 곳은 없습니다.다시 말하면 요한복음 3장 한 곳만으로도 왜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으며 무엇하러 오셨는가를 밝히 알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3:16은 신구약성경 전체의 요절입니다.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외아들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과 그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요한복음 3:16은 신구약성경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17절에서는 예수를 보내신 것은 심판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는 것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이어서 19절에서는 그 예수가 빛으로 오셨는데 사람들이 악하기 때문에 빛보다는 어두움을 더 사랑함으로 정죄되고 심판받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히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표현을 요한복음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그것은 예수님의 탄생 사실을 빛이 세상에 오셨다고 표현한 점입니다.이 표현은 요한의 독특한 표현 방법입니다.물론 예수님 자신이 자신을 가리켜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그러나 “빛이 오셨다”라는 요한의 표현은 다른 복음서 기자들과는 다른 관점이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사도 요한의 표현대로 하면 성탄이란 빛이신 예수께서 오신 날입니다.
누가복음 2:32을 보면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라고 한 구약성경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고,요한복음 1:9을 보면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말합니다.빛으로 오셨다든지 빛을 비추었다는 것은 이 세상이 어두웠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탄생하실 당시 이 세상이 어두웠기 때문에 어두운 세상을 밝히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오실 때 태양 광선이 그 자취를 감추었다는 말인가요 아니면 모든 등불이 꺼졌다는 말인가요 물론 그런 의미에서의 어두움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여기에서는 죄악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영혼이 어두워졌고 그 심성이 가려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흔히 사람의 얼굴을 마음의 창이라고 합니다.마음이 어두우면 얼굴도 어둡고 마음이 밝으면 얼굴도 밝게 됩니다.
출애굽개 34장을 보면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기 위해 시내 산에 올라가 40일을 금식하고 철야한 일이 있었습니다.드디어 두 돌판에 새긴 율법을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는 모세의 얼굴에서는 광채가 발했다고 했습니다.40일 동안의 금식과 기도를 통하여 모세의 영혼이 깨끗해질 대로 깨끗해졌기 때문에 그 얼굴에서 광채가 난 것입니다.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마음입니다.마음이 순하고 깨끗하면 길거리에 휴지가 뒹굴지 않을 것이고 남의 물건이 땅에 떨어져 있어도 결국은 주인의 손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주님은 빛으로 오셔서 어둡고 침울한 우리의 마음을 밝게 비춰 주십니다.그리고 음지를 양지로 바꾸어 주십니다.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크리스마스의 참된 의미를 어둠을 물리치시기 위해 빛으로 오신 사건 속에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물리치신 어두움이란 여러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슬픔과 절망과 고통과 좌절을 의미하기도 하고 갈등과 번뇌를 의미하기도 합니다.그러나 이런 것들은 그다지 큰 문제가 안됩니다.그런 것들은 마치 방안에 불을 밝히면 어둠이 사라지는 것처럼 빛으로 오신 주님이 우리 마음에 오시면 위에서 말한 온갖 잡다한 것들은 다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설교가였던 죤스 목사의 큰아들 하워드 군이 교통 사고로 죽었습니다.그런데 성탄 전날 밤 가족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 있을 때 둘째 아들이 “하워드 형은 천당가서 첫번 크리스마스를 지내고 있겠지”라고 말했습니다.이 말을 듣고 있던 막내 아들이 “바보 같은 소리하지마 천당에서는 매일 크리스마스래”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큰 아들을 잃은 슬픔으로 비통에 빠져 있던 죤스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날마다 크리스마스래”라는 막내 아들의 그 한 마디에 정신을 차린 것입니다.
그렇습니다.성탄의 의미는 빛으로 오신 주님께서 날마다 내 심령을 밝혀 주시고 임마누엘이 되셔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나와 함께 계시는 바로 그 “날마다 크리스마스의 삶을 살게 하신다”는 데 있는 것입니다.날마다 예수의 나심에 감격하고 임마누엘의 은총을 느끼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심령 속에 어두움이 드리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빛이 내 마음속에 점령하고 있으면 나는 예수의 사람이라는 확신과 함께 내가 어떻게 살아야 예수를 위해 사는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영국 어느 시골 교회에서 어느 주일날 아프리카 의료사업을 위해 헌금을 걷게 되었습니다.한 소년이 자기 앞에 헌금 바구니가 돌아오자 그 바구니를 뺏아들더니 그 위에 성큼 올라서는 것이었습니다.사람들은 이 소년의 무례한 행동을 보고 격분하여 일어서서 야단을 쳤습니다.그러나 소년은 두 눈을 반짝이며 “저는 아프리카 의료 사업을 위해 바칠 돈이 없습니다.그러나 나 자신을 몽땅 바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를 몽땅 바치겠다고 헌금 바구니에 올라 앉았던 그 소년이 훗날 아프리카 선교의 위대한 장을 열었던 리빙스턴이었던 것입니다.예수의 밝은 빛이 리빙스턴의 마음을 비추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을 바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그뿐만이 아닙니다.“예수의 빛”이 사람들의 마음을 점령하면 평화가 임하는 기적도 일어납니다.
2차 대전 당시 12월 24일 저녁 작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독일군과 프랑스군이 대치하고 있었습니다.그 분위기는 정적과 살벌한 침묵으로 무겁기 그지없었습니다.그때 참호 속에 앉아 있던 프랑스 병사가 무심코 휘파람으로 크리스마스 캐럴을 불렀습니다.그러자 강 건너 독일군의 참호 속에서도 캐럴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고 점점 다른 병사들이 따라 부르다가 나중엔 합창으로 변했습니다.얼마 후엔 양군의 지휘관들이 서로 의논 끝에 세 시간 동안 적병들이 모여 성탄 예배를 드리고 크리스마스 파티까지 벌였다고 합니다.성탄은 빛으로 오신 예수 때문에 죄악이 소멸되고 증오의 뚝이 무너지는 날입니다.그리고 내 마음속에는 예수 때문에 용기와 희망이 넘치는 날입니다.
요한복음 8:12절을 보면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결론은 자명합니다.세상의 빛으로 오신 주님을 영접하고 따름으로 생명을 얻을 것인가,아니면 요한복음 3:19에서 말씀한 대로 빛을 영접하지 않고 계속 어둠 속에 살다가 심판을 받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친구였고 아테네의 천재인 낭만자로 소문난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를 만날 때마다 “나는 자네를 미워하네 도대체 자네를 만날 때마다 나를 살피게 되니 말일세”라고 했다고 합니다.그것은 소크라테스의 솔직하고 고상한 인격 앞에 설 때마다 자신의 허물과 추한 꼴과 정체가 드러난다는 뜻일 것입니다.
우리 역시 빛 앞에 설 때 우리의 존재가 낱낱이 드러나게 됩니다.그렇다고 해서 빛을 멀리하고 기피하면 나는 영원히 희망을 상실하고 맙니다.그러므로 내 모습 이대로 빛 앞에 서야 합니다.그리고 낱낱이 나를 드러내야 합니다.그래야 내가 빛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빛으로 오신 주님을 마음 깊이 영접하십시다.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위로와 기쁨으로 충만해집시다.성탄의 참된 축복이 함께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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