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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망의 유혹 (욥 03: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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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종종 어떤 어려움이나 고통 중에 처하면 '죽고 싶다'는 말을 쉽게 합니다. 말은 워낙 생활 저변에 폭넓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심지어 는 '먹고 싶어 죽겠다' '좋아 죽겠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들의 깊은 내면에는 죽음을 향한 본능이 깊이 잠재되어 있음 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욥은 '아예 태어나지도 말았으면'(2-10).

'태에서 죽어 나왔으면'(11절) '엄마의 젖을 빨지 말았으면'(12절)하는 표 현으로써 죽음을 바라고 있습니다. 물론 욥이 처한 형편은 실로 죽음보다 더한 고통과 고뇌의 악조건이었으므로 그의 말을 경솔하다고 단정해버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스스로 목숨을 포기하는 행위는 정 당화될 수 없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듯이 생명을 거두어 가 시는 분도 하나님 한 분뿐이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통해 사망의 유혹은 왜 생기며 이 유혹을 극복하는 방법을 배웁시다.

 1.죽음은 사단의 손짓입니다.



욥이 죽음을 원하게 된 배후에는 사단의 활동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1:6-12, 2:1-6) 사단은 욥의 경건을 이기적이며 위선적인 것에 불과하다 고 하나님 앞에 참소하였고, 하나님은 그 참소의 거짓됨을 입증하고자 사 단의 개입을 허용하였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욥에게 재난을 허락하신 데에 는 그보다 더 숭고한 계획이 있어서 였을 것입니다.

사단은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선악과를 먹게 함으로써 낙원에서 추방 되게 만들었습습니다. 성경은 사단을 가리켜 '멸망으로 이끄는 자', '거 짓의 아비', '참소자'등으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에 사단이 개 입함으로 온갖 저주와 파멸이 되었으며 사단의 유혹에 빠진 인생들의 깊은 내면에는 죽음의 본능이 자리잡고 만 것입니다.

독일의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자살을 예찬하는 논리를 폈습니다.

이 이론은 인간의 비극적 실상을 적나라하게 간파한 것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인간 스스로에게서 찾 으려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알아야합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눈 에 보이는 가시적 현상 세계뿐만 아니라 비가시적인 영적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나날이 흉포화 되어 가는 폭력들이나 십대 초반의 여아를 술집에다 팔아 넘기는 따위의 인명 경시, 인륜 말살 풍조는 사단의 조종의 한 결과임을 기억합시다.

 <예화> '왜 이리 되는 일이 없담,' 제임스는 사업가인 제임스는 늘 사업에 대해 걱정하고 심지어는 밤잠을 설치기까지 했다. 더구나 한번 사 업에 실패해서 좌절감을 맛보았기 때문에 늘 사업에 대한 고민과 걱정거리 가 끊이질 않았다. 또한 불확실하고 또한 변동이 심한 미래는 그를 불안하 고 초조한 상태로 몰아넣었다. '아, 이래선 안 되겠는데..............., 무슨 대책을 세워야지.'근심과 걱정으로 지새우던 어느 날, 한 가지 방안 을 마련했다. 날마다 불안과 걱정에 사로잡혀 지내기 보다는 일주일 중 하 루만 걱정하는 날로 정한 것이다.

제임스가 궁리한 지혜는 '목요일 걱정 상자'를 만들게 했다. 일주일 동안 걱정이 생길 때마다 걱정거리의 내용과 날짜를 메모지에 기입하여 그 상자 에 집어넣었다. 그리곤 목요일에 개봉하는 것이었다. 그러길 몇 달..., 어 느 목요일엔가 제임스는 모여진 메모지를 뒤적거리며 정리하다가 매우 놀라 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메모지에 기입하여 상자에 집어넣을 때에는 큰 걱 정거리로 여겨졌던 것이 지금 와서 보았을 때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문제 로 탈바꿈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아! 내가 왜 이걸 몰랐을까.'제임스는 '목요일 걱정 상자'를 통하여 시간이 지고 사태가 진전됨에 따라 걱정의 내용마저 희미해지고 근심 걱정할 이유 마져 사라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본문의 욥처럼 언제까지 좌절과 한탄만 하고 있을 것인가

2.하나님의 영은 살리시는 영입니다.

 욥이 극심한 고난의 상황에 직면하여서도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으려고 눈물겨운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욥에게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자비를 끝까지 신뢰하고 전폭적으로 맡기는 자세라 하겠습 니다. 본문에서 욥이 발설한 내용들은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충분히 납득이 가지만 결국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대해서는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종착역에서 욥에게 갑절의 축복이 주어진 데에서 잘 보여지듯이 하나님의 목적은 인생을 연단한 후 더 큰 은혜의 터전으로 인 도하시는 데 있습니다. 사단은 인생과 하나님 사이를 이간시켜 인간 파멸을 위한 음모를 성취하기 위해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돌아다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성도를 붙들고 있는 한 아무것도 그 사랑의 끈을 끊지 못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살리는 영이시요 생명을 주되 넘치도록 부어주시 기를 원하는 영입니다. 주님께서도 세상에 계실 때 병자와 귀신들린 자들 을 치유하셨으며 좌절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영혼들을 생명의 길로 인 도하시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이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십자가상에서 대 속의 죽음을 당하심으로써 죄와 사망에서 의와 생명이 가득한 나라로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공중에 나는 새 한마리도 하나님의 뜻이 없으면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 을 기억합시다. 온갖 죄악과 불행으로 얼룩진 현대 사회를 살아가면서 특 히 견디기 힘든 고난의 상황에 직면했을 때 좌절하거나 낙망하지 말기를 바 랍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23:4)는 시편 기자의 고백을 여러분 의 것으로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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