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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양의 침묵 (사 5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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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 없어 침묵하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말할 줄을 몰라서 입을 열지 못하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힘도 있고 말할 줄고 알고 설득력도 있는 사람의 침묵이라면 거기엔 어떤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행동보다 말을 앞세우는 사람이나 실천보다 말을 먼저 꺼내는 사람을 가리켜 수다쟁이,혹은 부실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웅변은 은이고 침묵은 금이라는 금언은 그런 면에서 깊이 새겨야 할 교훈이라고 봅니다.
잠언 기자는 “입을 지키는 자는 그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13:3)고 했습니다.
우린 이사야 53:7-9속에서 어린양의 침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깍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라는 7절 말씀이 그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일찍이 장차 오실 그리스도께서 어떤 고난을 당하실 것인가를 마치 곁에서 보고 있는 것처럼 기술했습니다.

1.언제 어디서 침묵하셨습니까
이사야의 예언은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수난 기사에서 성취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린양 예수의 침묵은 말할 줄 몰랐기 때문도 아니요 할 말이 없었기 때문도 아닙니다.주님의 말씀은 권위가 있었고 능력이 있었고 권세가 있었습니다.말씀 한 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셨고 죽은 자를 살리셨고 병든 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 분은 고난받는 자리에서는 침묵하고 계십니다.
어린양의 침묵은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1)죽음 앞에서의 침묵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어린양 예수에게 십자가라고 하는 가장 큰 고난을 주셨습니다.그러나 그 분은 이사야의 말대로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침묵하셨습니다.그것은 곧 순종을 의미합니다.
주경가 멕세인은 “십자가 위에 있는 그 분에게서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리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은 그것을 부당하다고 말하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어린양 예수의 침묵은 죽음을 각오한 침묵이었습니다.
2)사람들 앞에서의 침묵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치 강도를 잡듯이 사람들이 달려들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할 때 에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왜 이러느냐,내가 무슨 잘못을 했느냐,어떻게 하려고 이러느냐 하는 일언 반구의 항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신 말씀이 있었다면 함께 있던 제자들의 안전을 염려하신 나머지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요 18:8)는 것이었습니다.
그뿐입니까 가야바 법정 뜰로 재판받기 위해 끌려가셨습니다.물론 그 재판은 이미 계획되고 조작된 것이었습니다.그러나 주님은 거기서도 침묵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57-68을 보면,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로 신성을 모독했다하여 종교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당시 종교 재판은 대제사장이 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거짓 증인들은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했다”,“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다시 짓는다고 했다”는 등 떠들어 댔습니다.이 말을 들은 대제사장이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냐”
그러나 63절을 보면 주님은 잠잠하셨습니다.
그리고 67절을 보면,그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었고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렸습니다.그러나 주님은 침묵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7:12을 보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소를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고 했고,14절에서는 “한 마디도 대답지 아니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모습은 일찍이 이사야는 “털 깍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다”라고 묘사했습니다.
자존심만 약간 건드려도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우리”에 비한다면 주님의 침묵은 위대한 침묵입니다.
감기 몸살만 걸려도 끙끙 앓는 소리를 내는 우리에 비해 십자가의 고통 앞에서도 침묵하신 주님의 침묵은 웅변입니다.
지극히 작은 손해만 입어도 펄펄 뛰고 야단을 하는 우리에 비해 주님은 목숨까지 내놓으시면서도 침묵하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일을 하면서도 소리 나가를 바라고 알려지기를 바라서 침소 봉대를 일삼는 것이 우리네들입니다만 주님은 구속의 대업을 이루시면서도 침묵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말없이 순종하시고 실천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2:19을 보면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주님은 사람들처럼 신경질을 부리고 핏대를 올리며 다투지 않으시며 거들먹거리고 떠벌리지도 않으시며 떠들썩하게 행차하지도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잠잠한 어린양 예수,그 분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하고 싶은 말도 많고 해야 될 말도 많았습니다만 잠잠한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우린 오늘 어린양의 침묵을 배워야 합니다.
이사야 53:7을 보면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괴로울 때나 끌려갈 때도 침묵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언제 어디서나 자기 변명이나 항변을 일삼지 않으셨고 떠들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선한 일에 방해가 된다면 주님의 침묵처럼 잠잠하기를 배웁시다.
고통스럽고 괴로운 일이 앞을 가로막을 때,묵묵히 갈보리 가파른 언덕 길을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셨던 어린양의 침묵을 생각하며 잠잠하기를 배웁시다.
우리 마음속에서 어떤 사건이나 이유 때문에 화산처럼 격정이 폭발하려 할 때,온갖 굴욕을 말없이 참으시며 입을 열지 않으셨던 주님의 모습을 떠올리며 참는 법을 배웁시다.

2.왜 침묵하셨습니까1)속죄의 완성을 위해서였습니다.
주님이 하시려는 일이 워낙 큰일이었기 때문에 자질구레한 일로 입을 여실 수가 없었습니다.
간신들은 말이 많습니다.그리고 이중 간첩은 쌍방에 정보를 팔아 먹습니다.
그러나 혁명가는 입이 무겁습니다.말 많은 사람이나 입이 가벼운 사람은 혁명 거사에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그랬다가는 거사가 누설되어 실패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일대 격전을 치르기 위해 출전하는 장군이 전선에 선 채 건빵을 씹으면서 건빵이 싱겁다느니 짜다느니 맛이 없다느니 하며 투정을 부린다면 그는 소인배일 뿐 장군은 못 됩니다.
큰일을 할 사람들은 잔소리가 없습니다.큰일을 해낸 사람들은 군소리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인류 구속의 대업을 이루시려는 어린양의 침묵은 그런 의미에서 조명되어야 합니다.
이미 죽기로 작정한 어린양이셨기에,이미 속죄의 제물이 되기로 결정한 어린양이기에 그 분에게는 침묵과 결단에로 향한 전진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교회 안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즉,입으로 떠들고 행하지 않는 사람들과 말없이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떠들고 소리를 내나 실천없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종이 아닙니다.
이름없이 빛도없이 감사하며 말없이 실천하는 사람들이 주님의 종입니다.
말없는 어린양 예수의 침묵은 속죄의 완성을 위한 거룩한 침묵이었습니다.
2)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제자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들의 잘못과 허물을 들춰 내지 않고 침묵해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내 지난날을 들추지 않으시고 시비하지 않으십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잡아다 놓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녀의 죄에 대해 떠벌리고 정죄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는 너을 정죄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뜻은 “나는 네 죄를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스펄전은 “예수님은 사람들을 축복하실 때는 결코 말을 더디게 하신 적이 없으셨다.그러나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 마디 말도 하시려고 하지 않으셨다.예수님은 침묵을 통하여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하셨으며 하나님의 어린양임을 입증하셨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사야 53:4-5은,어린양이 그토록 침묵하시면서 고난받으신 이유는 우리의 질고 때문이며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침묵과 함께 당하신 고난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고침을 받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과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과 함께 고난도 받고 영광도 받겠다는 결단이 곧 믿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린양 에수의 침묵을 배웁시다.
괴로워도 억울해도 입을 열지 아니했던 예수님의 침묵을 실천합시다.
예수님을 따라 골고다로 갑시다.아니 골고다는 가지 못하더라도 날마다 내가 걷는 길에서 십자가를 생각합시다.
예수님의 그 고통에 참여하는 사람이 영광에도 참여할 수 있다는 진리를 다시 확인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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