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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의 고난 (시 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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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다윗의 고난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다우시은 실제로 벌레, 사람의 조롱 거리, 수족이 찔리는 경험을 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다윗이 자신의 고난가운데 시 를 쓸 때 성령의 감동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고하는 시를 쓰게 된 것이라고 본 다. 또한 이 시는 마 27장, 막 15장. 요 19장 등 예수님의 수난을 통해서 그대로 이 루어 짐.

 1절.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 27:46) "어찌하여" 너무나 괴로우면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할가 라는 이유를 반문 할 수 있다. 조금만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우리는 원망함녀 기 이유를 묻는다. 그러 나 실상 이런 말을 우리 인간은 할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

죄인은 버림받아 마땅하고 당연함.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의인이며 무죄하셨다. 그런데 버림을 당해 야 하셨다. "어찌하여" 이 말속에 주님의 고뇌가 담겨 있다. 주님은 고난받으실 것 을 아셨고, 스스로 순종하시기로 작정하셨다. 그러나 그 고난은 너무가 크고 괴로운 것이었다. "내가 피곤하여 죽게되었으니 나와 함께 기도하자"고 하였을 정도이다.

땀에 피가 섞여 나올 정도로 괴로운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주님은 왜 그토록 괴로 와 하셨을가1)우리들이라면 너무나 짧은 나이에 뜻을 못이루고 억울하게 죽는다면 그렇게 괴로 와 할 수 있을 것이다. 작년에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유능한 젊은이가 죽었을 때 가족은 물론이고 주위모든 사람들도 동정을 금치 못했었다.

모하멧은 60세까지 살았고, 소크라테스는 70세를 살았다. 플라톤과 석가는 80이 넘어서 죽었다. 그런데 에수님은 30세가 약간 넘음. 정력이 있었고, 세상의 모든 사 람들을 다르게 할 지력과 능력을 가진 분, 인생의 최고 시절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자기가 뜻을 못이루고 죽는 실패의 죽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 죽음을 에견했고(마 16 장), 십자가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만족한 말씀을 남기셨다. 그러므로 주님이 허무하게 죽는 것을 괴로와 하신 것은 아니다.

2)주님은 하늘나라를 위해서 고난당할 때 기뻐하고 즐거워 하라고 하셨는데 왜 자 신을 괴로와 하셨을까 사도들은 매를 맞고 산헤들인 공회를 떠날 때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 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햇다'고 햇다(행 5장). 2세기 중엽 86세인 서머나의 감독 폴리캅은 도주하거나 그리스도를 부인함으로 죽음을 피할 것을 거부하고 당당히 화 형을 당했다. 불이 붙기 전 그는 이렇게 기도. "오, 아버지시여! 나를 순교자의 한 부분을 담당할 만 자로 여기시오니 주를 찬송하옵나이다" 순교자들은 불타는 화염 속에서 그들의 몸이 불타고 있던 그 때도 기뻐할 수 있었고, 찬송하면서 죽는 분들 이 많았다.

안이숙여사는 평양감옥소에서 춥고 배고프고 모진 고통중에도 알 수 없는 기븜이 그 녀를 늘 사로잡았다고 한다. 그래서 유치장에서 교도소로 이감되기 위해 나왔을 때 일본순사가 "감옥에 있던 안이숙은 왕비같이 얼굴이 빛나니 왠 일이냐"고 물엇 다 한다.

그런데 왜 우리 주님은 그렇게 괴로와 하셨을까 주님은 "아버지여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옰겨 주옷소서"기도. 이 "잔"이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진도를 가리키는 상징이었다. 욥 21:20"악인은 전능자의 진 노를 마셔야 할 것이라" 겔 23:32-34 이 세상 죄인들이 당해야 할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대신 받으신 주님은 요 18:11 "아버지게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하심. 죄없으신 분이 인류 의 죄를 담당하시고 아버지로부터 진노의 받아 죽어야 할 때 그 두려움과 그 괴로움 은 얼마나 끔직했을까! 순교자들은 육체가 괴로움을 당할 때 그 영혼은 하늘의 빛 으로 충만하였다. 그러나 주님은 육체의 괴로움만이 아니라, 영혼의 어두운 밤이 그 를 짓눌렀고, 무거운 죄악이 그 영혼을 눌렀다.

무엇보다도 아버지로부터 버림당하는 영적 고통은 가장 큰 것이었다.

 과연 아버지께서 그를 버리셨을까 어떤 학자 왈, 아버지는 아들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보다 더 사랑한 적이 없었을 것이라고 함. 큰 고통가운데도 아버지께 순종하는 아들이 더 사랑스럽지 않은 아버 지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가장 사랑스러운 아들이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완전히 버림당하는 처지에 이르도록 내어버려 두셔야 했다. 그러므로 본문에 "하나님은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 시며, 낮에도 밤에도 부르짖지만 응답지 안으신다"고 했다. 하나님은 독생자에게서 얼굴을 돌리시고 완전히 그 영혼을 버리셨다. 이 절규를 하는 아들의 고통이 얼마 나 컸을까! 사랑하는 아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고개를 돌리셔야 햇던 아버지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가! 십자가의 망치소리는 겟세마네 동산에만 울린 것이 아니라, 온 지상에 울렸고, 죄 인들의 가슴속에 울렸고, 저 천국에 까지 울렸던 것이다. 잔인한 쇠망치는 아들의 양손 양발위에만 갸해진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가슴마져 아프게 때렸 다.

 옥타비우스 윈슬로우 "누가 예수를 죽음에 넘겨 주엇는가 돈을 위하여 유다가 넘 겨 준 것이 아니다. 두려움때문에 빌라도가 넘겨 준 것도 아니다. 시기때문에 유대 인들이 넘겨 준 것도 아니다. 바로 사랑을 인하여 성부께서 넘겨 주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 2(시 22:6-20)

우리는 지금 십자가를 자랑한다. 에수님 혹은 기독교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십자가 를 내세운다. 그러나 초대교회때는 십자가를 기독교의 상징으로 내세우기가 매우 난 처하고 주저스러웠다. 왜냐하면, 십자가형벌은 당시 어떤 야만인들에 의해 고안된 것인데 뒤에 헬라와 로마인에게 알려져 받아들여 진 사형방법이었다. 그것은 지금가 지 지구상에 행해진 모든 처형방법중에서 가장 잔인한 방법이다고 한다. 나무에 달 려 죽는다는 것은 유대인에게는 하나님의 저주를 의미했음(신 21:22, 23). 로마인 들에게는 가장 잔인하고 혐오스러운 형벌로서 로마 사람들은 이 형벌을 가하지 못하 게 했고 이방인에게만 그렇게 하도록 했다. 그러니 전도할 때 "너희 주는 어던 분이 냐"고 물을 때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은 분이다"고 대답한다면 그야말로 미련한 것이요 미친 것이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인들이 카타콤에 숨어 지낼 때 벽 화에 새겨놓은 상징그림들을 보면, 예수님의 상징으로 십자가보다는 공작(불멸상 징), 월계관(승리상징), 물고기(물고기란 글자가 에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각 낱말의 머릿글자를 합친 것과 동일)를 그리기도 했다. 그러나 바울은 십 자가를 나타냈고, 하나님의 섭리로 기독교의 상징으로 십자가를 내세우게 되었다. 십자가는 가장 잔인한 형틀이었으나 우리성도의 자랑이 되었다.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당하신 고난이기 때문.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생각해 보자.

 1. 조롱당하시는 그리스도(6-11)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취급을 받지 못함. 최고의 형벌, 십자가형에 처해진 죄 수로서 무슨 인간대우를 받을 수 있었겠는가. 살인강도들 가운데 그를 세웠다는 것 은 그를 죄인중의 괴수로 취급하였던 것.

사람의 괴로움가운데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이 조롱당하는 것이다.

[2차대전 때 독일군에 의해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혔던 빅토르 플랭크는 거기 갇힌 자들이 하루 20gram 밖에 안되는 빵을 먹으며 추위에 떨고 구둣발로 채이며, 중노동을 해야 했고,약간의 병세만 보이면 그 날부로 독개스실로 들어가 죽게 되는 무서운 고통을 받았지만, 그런중에도 한동안 더욱 괴로운 것은 개인적인 조롱을 당 하는 경험이었다 한다. 사람들은 남에게 무시당하거나 조롱당할 때 대개 흥분하여 격앙하고 다투고 심지어 살인까지 한다. 그러나 주님은 묵묵히 다 참으셨다.

예수님은 침뱉음을 당하고 뺌을 맞으셨다. 로마 군인들은 갈대를 에수님의 손에 들 리고 임금님 하고 조롱했다. 그리곤 그 갈대를 빼앗아 에수님의 머리를 때렸다.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모든 이들이 입술을 삐쭉이며 조롱, 십자가위에서 내려와 봐 라. 그러면 믿을꼐! 심지어 강도들마져 조롱.

 3. 고통당하시는 그리스도(18) 많은 황소들-세상의 권력으로 주님을 죽이려는 자들. 가야바를 비롯한 산헤드 린 공회원들. 바리새파 두령들. 본디오 빌라도. 세속의 권력가들은 사단의 도구가 되어 주님을 못박는데 앞장섰다. 권력과 금력이 잘 쓰면 유익한 것이나 눈이 어두우 면 하나님을 대적하는데 앞잡이가 될 우려가 있다.

개들-이방인들, 즉 로마의 군인들이다. 수족을 찌르나이다. 못박히는 고통, 창 에 찔리는 것을 가리킴.

마음이 나약해 진 주님-육체가 극도로 피곤하고 아프면 마음도 약해진다. 그러 나 아버지를 향한 주님의 의뢰를 깨뜨리게 하지는 못했다.

내 힘이 말라-온 몸의 힘이 말랐다. 피와 물이 다 탈진된 상태. 혀가 잇틀에 붙었다. "내가 목마르다!" 외치심. 그런 죽에도 죄인위해 기도하시고, 모친을 요한 에게 맡기심.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너무 아프면 뼈마디마디가 아파 각각의 뼈를 의식 할 수 있다함. 에수님의 모든 뼈가 그렇게 아프신 것.

그 옷을 제비뽑나이다. 예수님이 입고 계셨던 흰 속옷을 탐냄. 처형장의 담당자들 은 사형수에게 있을 좋은 물건을 챙기는 버릇이 있었다. 에수님의 속옷을 찢어 나누 면 슬 때가 없으므로 누가 차지하나 제비뽑음. 목마름과 버림받음, 아픔으로 괴로와 하는 하나님의 아들 바로 아래서 술을 마시며 농담이나 지껄이고 속옷을 제비뽑는 로마 군인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게 인간이다.

 이런 주님이기에 우리가 버림당할 때 돌보신다. 외로울 때 위로해 주신다.

날 이토록 사랑하여 죽으신 주님위해 무엇을 드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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