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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윗의 자손 (렘 31:7-9, 히 05:1-6, 막 10:4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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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주제:예레미야 31:7-9
본문은 30:31장에서 발견되는 구원의 예언들의 집성(集成)의일부분이다. 30-31장에 대해서는 30:1-3의 산문적인 서론이 그주제를 제시하고 있다. 이 예언들 가운데 예레미야 자신의 것이얼마나 되느냐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에 의견이 분분하다. 예레미야 31:7-9은 진정성이 의문시되는 예언들 중의 하나인데, 그 까닭은 그것이 제 2이사야서의 내용과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마도 원래 바벧론의 포로들에게 했던 예언을 제 2이사야가 개작(改作)하여 채택한 때문일 것이다.

본문의 주제는 하나님의 백성의 재구성이다. 여기서 하나님의백성은 "만국의 머리된 자"라 불리우고 있는데, 이러한 표현은아모스 6:1을 방불케 한다. 비록 남은 자(remnant)만이 구원의반열에 포함되어 있지만, 편집자는 그것을 큰 기쁨의 계기로 생각하고 있다. 그것으로 인해 이스라엘의 온 족속들이 하나로 합쳐질 것이기 때문이다(31:10). 그때서야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대량 학살과 분산(分散)에서 구원하셨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귀한자들 가운데에는 여행이 어려운 자들(소경과 절뚝발이와 잉태한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언급되어 있음)도 끼어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와주실 것이다. 영광스러운 귀환은 이사야서의 여러귀절과 비슷한 언어로 묘사되어 있다(예:사 35장, 40:3-5, 11,41:17-20, 42:14-16, 43:1-7, 44:3, 48:20-21, 49:8-13).

부자(父子)의 비유(9절)는 호세아 11:1-4을 방불케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일컬어 우선적인 권리와 책임을 걸머진 장자라고부르고 있는 점에서 호세아서의 비유보다 한 수 더 앞서가고 있다. 망국(亡國)의 시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상속권을 박탈하지 않으셨다. 귀환은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증표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창조의 질서 만큼이나 신빙할만한 것이다(31:35-37). 이 예언들의 편집자에게 있어서는 회복은 단순히 이전 상태에로의 복귀가 아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내면화(內面化)될 새 언약의 약속을 이 예언가운데 포함시키고 있는 것이다(31:31-34).

제 2 주제:히브리서 4:2-10, 5:1-6(-9)
히브리서 5:1-9에 대한 주석은 지난 주일의 주석에 함께 포함되어 있다. 4:2-10은 교회가 약속된 구원-이미 3:6-19에서도 선포된 주제-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역사에 충실하라는 목회자적인권면을 발전시키기 위해 광야에서 있었던 이스라엘의 전례를 상용하고 있다.
저자는 이스라엘의 경험을 알레고리칼하게(즉 우의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유형론적(類型論的)으로 다루고 있다. 엄밀히말해서, 알레고리(allegory)는 근본적으로 무시간적(無時間的)이거나 영구적으로 반복되는 현상들과 동일시하기 위해 어떤 기사를 이용하는 것을 말한다. 한편 유형론(typology)은 두 사건간의

병행성(竝行性)을 가려내면서도 단순히 "역사는 반복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거쳐가나안으로 이동하는 것은 히브리서 저자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종말론적인 백성들이 최종 목적지인 구원에로 나아가는 것에 대한 하나의 예표이다. 히브리서의 경우 교회는 아직도 믿음에 의하지 않고서는 구원을 누릴 수가 없다. 그 까닭인즉 교회는 아직도 역사 속에 존재하며 따라서 고난을 당하고 인내를 키워나가지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히 10:32-39). 다시 말해 교회는 마치광야에 머물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 마찬가지로 도상(途上)에있는 나그네 백성(pilgrim people)인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교회간의 이러한 구조적인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저자 자신은 교회가 단순히 그저 이스라엘의 경험과 그 결과의 전철을 밟도록 운명지어지지는 않았다고 믿고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아닌 것이 이나라 애굽을 떠나온 이스라엘 백성을은 가나안에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히브리서 3:15-19은 시편95:7-11을 해석하고 있는 게 분명하며, 한편 후자는 민수기14:1-35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일찌기 바울도 이스라엘의 광야 경험을 이런 식으로 다룬 일이 있다(고전 10:1-13).
달리 말하면, 유형론적으로는 이스라엘이 교회의 예 표이지만,구체적으로는 교회는 이스라엘과 같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오늘의 본문은 양자간의 유사점을 심각함을 지적함으써 시작된다. 이스라엘도 교회도 모두 기쁜 소식 곧 장차의 구원의 약속의소식을 들었으나. 전자의 경우에는 그 말씀이 믿음(여기서는 신실함으로 이해되고 있음)을 유발하지 못하였다. 저자는 그의 논증을 전개시킴에 있어 여러 본문들을 결합하고 해석한다. 이 본문들은 "안식"과 안식일에 관해 말하고 있는 바, 그것은 분명히이 두 가지를 모두 사용한 유대교의 주석적인 전승에 그 근거를두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본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에 관해서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종말론적인 비유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신으로 말미암아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저자는 권면에 골몰한 나머지 가나안에 들어간 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이미 믿고 있는 교회는 거기에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다(3절). 이 단락의 나머지 부분은 이 주장을 뒷받침 해 주고 있다.

첫째, 저자는 불신의 이스라엘이 "안식"에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 이미 앞에서(3:7-11) 인용한 바 있는 시편95:7-11로 다시 돌아가고 있다.

둘째, 이렇게 실패했다고 해서 목적지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목적지인 "안식"은 다른 모든 것들과 함께 창조되었으며, 따라서 우리는 거기에 이르기를 기다리면서 엄연히 현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회개나 메시야의 명칭과 같은 종말론적인 실재(實在)들은 현시(顯示)되기 전에 이미 선재해 있었다는 유대인의 신앙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것은 창세기 2:2에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세째, 저자는 시편 95:11은 이스라엘이 그 목적지에 도달하지못하리라는 것을 뜻한다고 결론짓고 있다.

네째, 그 목적지는 괜히 있는 것은 아니므로 누군가는 반드시거기에 도달할 것이다. 더우기 이스라엘이 그 때에 거기에 이르지 못했고 앞으로도 결코 이르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는 다른 한 때를 정하셨다.(다만 묵시적으로만 나타나 있으나 이때는 다른 무리들을 위한 때일 것이다). 저자가 이러한 추론을이끌어 낸 근거는 오랜 후에 시편 95:7에서 "오늘날 너희가 그의음성을 듣거든(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것처럼)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저자의 논리에 따르자면, 8절에서 말하고 있듯이 이러한 권면은 그 "안식"이 아직도 도달하지 못했을 경우에만 이치에 닿는합당한 권면이 된다. 그러므로 앞으로 있을 종말론적인 구원의상징인 안식일의 안식이 더욱 부각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저자가 3절에서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도다"하고 주장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따라서 신자들은 그 안식에 들어가도록 힘써야 하며 이스라엘이 불순종을 되풀이 해서는 안 된다(11절).

저자의 미묘한 추론과 석의의 진가를 십분 이해하기란 우리로서는 어려운 일이다. 미래의 구원에 대한 그의 비유들이 우리에게도 생소한 점이 없지 않은데다가 그의 문체 또한 매우 압축되어 있어서 저자의 요점을 파악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실천적이고도 목회적인 문제, 다시말해서 아직도 온전한 구원이 그들의 것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갈팡질팡하고 의기소침해 보이는 신자들에게 어떻게 하면 변하지않는 일관된 믿음을 유지하게 할만한 영적인 보증들을 제공해 줄수 있느냐 하는 문제와 씨름하고 있다("오순절 후 스무째 주일"의 "제 2주제"의 본문에 대한 주석을 참조할 것).

복음서 주제:마가복음 10:46-52
구체적인 내용은 별도로 하고서라도 이 설화 자체는 상당히 직선적이다. 그런데 마가는 이 설화를 훨씬 더 정묘하게 활용하고있다.
"다윗의 자손"이란 칭호가 분명히 메시야적인 의미를 지니고있는데, 어째서 이 거지가 예수님께 그러한 칭호를 외쳐댔는지분명치 않다. 유대인들의 사상에서 다윗적인 메시야가 병을 고치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무리들이 그의 입을 틀어막는데 실패하자 예수님은 그를 불러 오라 하신 다음 그에게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는 말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품고 하는 말인지 자세히 말해 보라고 하신다. 그런데 흥미있는 그사람이 이번에는 예수님을 "랍비"(rabbouni, 랍오니, "나의 선생님")라고 부르고 있는 점이다. 이 칭호는 어떤 전문적인 의미라기보다는 경의를 표하는 경어로 사용한 것이 틀림없다. 그 사람의 "믿음"에 관한 예수님의 언급은 아마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실뢰와 자기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끈질긴 의지를 동시에 의미하는 것 같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가라고 하셨으나 그 소경은 무리들 틈에 끼어 예루살렘행(行) 여행에 합세하였다.

마가복음에서는 이것이 마지막 치유 설화이다. 보다 중요한 사실은 이 설화가 예수님의 순회 사역과 다음에 나오는 예루살렘입성으로 시작되는 예루살렘 사역을 연결하는 "거멀못" 역할을하는 설화라는 점이다. 나아가 오늘 본문의 설화에 앞서 나타나있는 광범한 다락(8:27-10:45, 즉 가이사랴 빌립보 설화에서 시작하여 지난 주일에 다루었던 "데속물에 관한 말씀"에서 끝나는부분)에는 예수님의 자신의 운명에 대한 이해와 제자들의 몰이해사이에 괴리(乖離)의 분위기가 팽만해 있다.

이 단락(8:27-10:45)과 그 앞 단락 사이를 이어주는 "거멀못"도 역시 소경을 고치신 이야기이다(8:22-26). 그러고 보면 마가

는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이해하고 또 그 분이 가시는 길을 따를수 있으려면 먼저 맹목(盲目)의 상태가 치유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암시함으로써 이 단락의 전반적인 윤곽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관점에 비추어 볼 때, 오늘 본문의 설화의 결론적인 언급은만일 누구든 맹목의 상태가 치유되면 그는 예수님을 따를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다. 마가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이해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막 13:35-37).
이렇게 볼 때 마가는 어쩌면 오직 "소경"만이 예수님을 다윗의자손으로 부를 것이라는 암시를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닌 것이 아니라 사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다.

설교를 위한 해석

제 1주제:예레미야 31:7-9
본문을 적절히 다루려면 설교자는 단어들 뿐만 아니라 분위기까지도 다시금 조성해야 하는 부담을 감내해야 한다. 그리고 분위기는 청중들로 하여금 본문과 그 앞의 여러 장(章) 사이에 대조를 경험할 수 있게 해 줌으로써 재조성될 수 있다. 1-30장은파괴와 멸망을 예언하고 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오늘의 본문은 비유컨데 검은 벧벱 위에다 올려 놓은 다이어몬드이다. 탄식은 변하여 즐거운 춤이 되었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 30:5). 신실한 "남은 자"들이 이제 고향 땅 시온으로 돌아 온다. 얼굴에는 온통 눈물이 뒤범벅이된 채 떠돌이들이 오고 있다. 소경도, 절뚝발이도, 잉태하여 몸이 무거운 여인도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탄탄대로를 따라 맑은물가를 끼고 흥겹게 이동하고 있다.

예레미야는 그가 들은 말씀에 충실하기 위해 심지어 자신의 욕망과 본성을 뿌리치면서까지도 심판을 선언해 왔었다. 그는 심지어 이사야가 한 번도 예언할 일이 없는 예언마저도 했다. 곧 성전의 훼파에 관한 예언이었다. 예레미야 선지는 성상파괴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성전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들의 생명의 원칙인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이끌기는 커녕 오히려 하나의부적으로서 마치 몽상적인 안전감을 갖게 해 주는 국가적인 토끼발(rabbit's foot:토끼의 발을 행운의 부적삼아 지니고 다니는관습에서 유래한 말-역주)이 되고 말았음을 알고 있었다. "여기서는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거야. 우리는 요시야왕 때 종교개혁을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시드기야왕은 여호와를 경외하는분이 아니셨던가!" 그러나 결국 예레미야의 말이 옳았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30-33장은 작은 위안의 책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부분은 집요한 희망에 대한 증거가 된다. 희망은 사람의 손바닥만한 크기의 구름을 보고서도 비 피할곳을 찾아 줄달음질 친다. 희망은 고목 그루터기에서 돋아나는한 줄기 싹을 보고서도 온통 레바논의 백향목으로 뒤덮힌 언덕을떠올릴 수 있다. 희망은 땅에다 씨앗 하나를 떨어뜨려 놓고서도코끼리의 눈에 닿을 만큼 높이 자란 옥수수를 상상할 수 있다.
희망은 엄마의 못입은 옷으로 성장(盛裝)을 한 어린 소녀이다.
희망은 아침식탁 옆에서 서서 자기 세계에서는 가장 크다고 생각되는 아빠와 슬쩍 키를 대어보는 꼬마 소년이다. 희망은 어린 손자를 꼬옥 끌어 앉은 채 "이제 내 눈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보았으니 당신의 종을 평안히 잠들게 하소서"하고 기도하는 어떤 노인이다.
그러나 희망의 끈덕진 힘에 대한 증거도 증거이려니와 본문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재삼 확증하고 있다. 유리한 정치적인 동맹이나 참회자의 눈물이 아니라 바로 이 신실하심이야 말로 소망의확실한 근거이다. 포로로 잡혀가기 바로 전에 예레미야가 밭을구입할 때 그가 말하고 있었던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닌가(렘 32장) "비록 내가 에브라임을 쳐서 말하고 있긴 하지만 그도 역시나의 자식이다." 이것이 곧 성서 전체의 핵심적인 확언(確言)이아닐까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백성들과 맺은 사랑의 언약을 파기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 났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옷을 지어 입히셨다. 가인은 저주를 받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보호하시기 위해 그에게 표를 주셨다. 세상은 홍수로 멸망되어야 했지만 사람들과 동물로 가득 찬 방주는 남아 있었다. 40일이 지나면 니느웨는 멸망하도록 되어 있엇으나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키셨다." 이스라엘은 불신으로 인해 열매없는 나무처럼 잘리웠지만, 그러나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왔다.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제 2주제:히브리서 4:2-10
설교자가 보다 확신을 갖고 히브리서의 메시지를 활용하는 데도움이 될 만한 말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로, 저자의 문체에 관한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나오는 어떤 인물이나 사건을 논한 다음 교훈이나 권면을 도출해 내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패턴은 히브리서 전편을 통해 반복되어 나타나며 오늘의 본문은 그 한 예라 할 수 있다. 둘째로, 저자는 기독교를유대교보다 우월한 것으로, 그리고 유대교의 완성으로 간주하고있다. 그 우월성은 "그림자-본체"라는 틀(shadow-substanceschema)을 사용해 논증되어 있다. 즉 유대교는 지상적인 것으로서 본체적인 참 형상 곧 기독교의 그림자라는 것이다. 이를 테면, 장막은 참된 예배 장소의 그림자요, 대제사장은 진정한 대제사장의 그림자요, 시온성은 위에 있는 영원한 시온산의 그림자였다. 따라서 유대교는 기독교 안에서 완성 내지는 성취되었다고할 수 있다.

오늘의 본문은 이러한 논리 전개의 한 차원을 캐고 있다. 시편95편에 의하면,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그의 백성들이 활용할 수있는 "하나님의 안식"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결코그 안식에 들어가지 않았다. 어째서 그랬을까 모세의 지도 하에있을 때에는 이스라엘은 결코 그 안식에 들어가지 않고 40년간을광야에서 살면서 불평하고 우상숭배에 빠지며 불신하였다. 그러나 여호수아의 지도 하에서는 이스라엘은 그 땅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 땅에는 쓰디쓴 실망만이 도사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땅은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는 흡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안식이라곤 없었다. 사실 초기 예언자들은 백성들에게 광야로 되돌아갈 것을 촉구했다. 그 땅에는 거짓 안정과 우상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찾는 것을 포기했다. 오직 소수만이하나님께서 건설 하시고 꾸미신 도성을 계속 찾고 있었을 따름이다.
하나님의 안식(창 2:2)-창조 사역이 끝난 후 피조물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은 여전히 활용가능한 것으로남아 있다. 그러나 저자의 말에 의하면 믿음이 없는 탓으로 아무도 그 안식을 누리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리스도인 독자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말도록 경고하고 있다. 그런데 도대체 그 과오라는 것이 무엇인가
(a)여행의 환상이다. 일단 우리가 그곳에 이르러 이것 저것을

소유하고, 우리의 문제들이 다 해결되고, 그래서 안정을 누리고,우리의 아이들은 우리가 겪었던 고생을 겪을 필요가 없어지게 될것이고, 그렇게만 되면 우리는 안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이다.

(b)목적지의 환상이다. 이제 이곳에 온 이상 우리는 그 안식을잃지 않았다는 것과, 우리의 국경은 수비되고 우리 가운데 있는적들은 통제되고 있다는 것과, 그리고 우리의 업적은 인정을 받고 우리의 장래는 보장되어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싶어하며, 만일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는 안식을 누리리라는 환상이다.
그건 그렇고, 도대체 누가 이 안식에 들어가는가 어는 곳에서나 어떤 처지에서나 하나님을 의뢰하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가이 안식에 들어간다. "오, 하나님, 당신 안에서 안식을 발견할때까지는 저희의 마음은 쉼이 없나이다."

복음서 주제:마가복음 10:46-52
오늘의 세 본문은 다같이 약속과 희망에 관해 말하고 있다. 이본문들은 각각 남은 자의 귀환(렘 31장),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안식의 약속(히 4장), 그리고 승리의 서곡(막 10:46-52)을 그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제 본문에서는 예루살렘 입성 이전의 기사를 다루고 있는데,이 기사는 독자들을 예수님의 승리의 입성에 대한 희망과 흥분에로 인도해 주고 있다.
마가복음의 주석자 가운데서 그것이 드라마와 닮은 점이 있다고 말한 사람이 더러 있다. 그렇다면 이제 이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을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예수님은 자기 인생의 방향과목적을 알고 있는 유일한 등장인물인 것 같다. 그리고 우물쭈물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열 두 제자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고백하기는 했으나 그 의미를 곡해하고 있다. 다음으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한편 위협을 느끼고 당황해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비판적이다. 마지막으로 군중들은 호기심을 일으킬 만한 사건에는 항시 따라다니지만 결코 믿지는 않는다.

이제 우리 앞에 전개된 장면에서는 예수님과 제자들과 그리고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는 무리들이 거룩한 도성인 예루살렘으로한 발자국씩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 도시에서 돌아가실 것에 대해 세 번이나 말씀하신바 있다. 이제 예수님과 십자가 사이의 시공(時空)의 간격은 급속도로 좁혀지고 있다. 이미그는 입언저리에서 죽음의 맛을 느끼실 수 있다. 제자들은 무리들보다 세 배나 더 지혜로와야 할텐데도 아직 그렇지 못한 것이틀림없다. 군중들의 흥분은 최고조에 달해 있다. 많은 사람들이믿고 있는 바와 같이, 만일 예수님의 입성이 유월절이 아니라 초막절에 있었더라면 찬양의 노래와 나뭇가지를 꺽어 흔들어대는행위와 축제의 분위기가 훨씬 더 뚜렷이 부각되었을 것이다.

극작가 마가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고함소리와 그 고함을 치고 있는 소경 거지를 소재로 하여 본문에 나타난 행렬을 해석하고 있다. 그 거지는 방해물이었다. 그래서 무리들 중에서 몇 사람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게 하려고 한다. (예수님의 청중들 가운데 어린 아이들이 나타나 방해했을 때제자들이 보인 반응을 기억하고 있는가) 예수님만이 발을 멈추어 경청하시고 응답하시고 도움을 주신다. 그 거지는 예수님을따르게 된다. 그리고 이름없는 무리들 가운데서 유독 그의 이름만이 기억되고 있다.

이 설화를 배치할 위치와 그 내용에 의해 마가가 이야기하고자하는 것이 무엇인가 본문의 설화는 승리의 입성 직전의 기사로서 메시야적인 이미지를 지닌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는 외침을도입하고 있다. 이것은 물론 외침 그대로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야고보와 요한의 실패 바로 다음에이 이야기가 나와 있는 걸로 보아 어쩌면 그들의 실패와 소경의진정한 믿음을 대립시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나 마가가 교회(제자들과 무리들-역주)를 비판하고 있다는 느낌을 누가 물리칠 수 있겠는가 앞에 놓여 있는 십자가와제자로서의 희생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저 예수님 뒤를 따라 행렬을 벌이고 있는 그들은 그들의 행렬이 차단되는 것을 거부하고 있으며 또한 무자격자인 소경 거지를 그 행렬에 끼워 주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결국은 그 소경 거지 한 사람만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를 자격을 갖춘 자였다. 그는 믿었다. 그리고 오직 그 소경 거지 한 사람만이 진정으로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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