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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의 승리 (롬 05: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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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은 예수님은 2000년 전에 돌아 가셨고,내가 나기도 전에 내가 죄를 짓기도 전에 돌아 가셨고, 내가 알지도 못할 때, 돌아 가셨는데 그것이 어떻게 나 와 관계가 되느냐 하는 의문이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오늘 본문을 기 록하게 된 배경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에 대한 교리를 계속해서 배우고 있습니다.하나님 의 은혜를 얻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절대성을 말하는 것입니다.그래서 하나님의 의를 받아 들이고,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을 때, 그 사랑을 받아 들 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롭다고 하실 때, 순종으로 예하고 받아 들여야 합니 다.

이렇게 함으로써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귀한 진리를 보여 주셨습니다.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사랑을 보여 주셨는가하는 사랑이 최종적인 확증도 확인했습니다.

우리가 죄인으로서 의인되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귀중한 변증적 증거가있습 니다. 그것은 의인이 죄인처럼 죽는것을 보고 알수 있습니다.

 의인이 죄인처럼 죽는다는 사실은 죄인이 의인처럼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입니다.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으로 의인이 죄인처럼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인 우리들이 의인처럼 살수 있 는 것입니다.

 이것을 철학적인 용어로 말한다면 "만유균형이 원리"라고 합니다.완전한 의인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실은 죄인이 의인처럼 살수 있다는 것을 확증해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가 너를 사랑하며 너의 죄를 사했다고 하는 확증을 주셨습니다.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이 십자가를 믿음으 로 죄사함을 받는 것입니다.그런데 이렇게 증거하고 나니,논리적이고 예리한 비판 이 나옵니다.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관연 모든 세상 사람들을 구원할 만한 충 분한 은혜가 될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한 사람이 죄를 지었으면 바로 그 사람의 죄를 위해 제사를 드 려야 합니다. 다시말하면 사건마다 제사를 드려야 하고,사람마다 제사를 드려야 하므로,매일 제사를 드려야 하고,매해마다 매 절기마다 드려서 죄사함을 받는 것 입니다.

그러니까 한 번 드렸다고 해서 일생의 죄가 다 사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지었으면,또 회개하고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속죄제를 드리고, 속건제를 드리고,화목제를 드려야 하는데,어찌해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한가 지 사건이 모든 사람의 죄를 다 사할수 있느냐하는 의문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답변할수 있을까하고 인간적으로 걱정할 수 있겠지만 여기에 바울의 천재성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귀중한 논리를 가지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잠간 히브리서에 보면 그 주제는 단번에라는 뜻입니다.

 단번에 모든 사람을 위하여 제사를 드렸고,이것은 단 1회로써 충분한 은혜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제사 그 하나가 만 백성의 죄를 속하기에 넉넉하다 는 것입니다.한 번 드린 제사로서 만족하다는 것이 히브리서의 주제입니다.

 마틴루터의 종교개혁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를 한 번 돌아가신 것으로 만족해야지 도 못 박고,또 못 박는 일은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카톨릭의 미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재현하는 것으로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는 뜻입니다.마틴 루터는 이것을 전면적으로 반대하고 나섰습니다.완전하게 한 번 드 려진 제사인데 어찌 다시 못 박고, 또 못 박는 것이냐고 반론을 제기한 것입니다.

마틴루터가 열심히 강조한 것도 단번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해서 이 한사람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죄사함을 받을수 있으며, 또 단 한번의 사건이 충분한 은혜가 될수 있느냐에 대해 본문에서 바울의 논리를 보겠습니다.

 그 예로 아담을 듭니다.

 "이러므로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 나니 이와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 니하였느니라"고 롬 5:12-13에 말씀했습니다.

 이 구절은 아주 귀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확고한 신앙을 주는 말씀입니다.흔히 예를 들어 설명할 때 좋은 예와 부정적인 예가 있습니다.그런데 그리스도의 사건 은 최고로 귀한 것이기에 그 이상의 예를 들수가 없습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악을 예로 들어서 선을 설명하고 있습니다.아담이 지은 죄를 우리는 원죄라고 합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그 죄 하나의 사건에 머물지 않 습니다.형무소에 가보면 많은 죄수들이 있는데 그 중에는 2범,3범,6범까지 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있습니다.그들의 말에 의하면,이 번 한번만,딱 한탕만 하다가 전 과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악이란 것은 한번만 범하고 끝나기가 어렵습니다.

그 악이 그 다음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죄는 그 다음 죄의 원 인이 되고 있습니다.

 원죄가 무엇이냐의 신학적인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죄의 원인이 되는 것이 원죄입니다.

 이것을 시간적으로 말해서 아담이 죄는 짓지만 않았더라면 또한 하와가 선악과 를 따 먹지만 않았더라면 하고 되풀이 생각을 자꾸하지만 그것을 질적으로 보면 간단합니다.

 칼빈은 이것을 압축시켜서 말하기를 "죄의 원인이 되는 죄는 불신앙! 곧 교만이 다."라고 했습니다.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우리 누구에게나 죄의 원인이 되는 죄가 있 습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고 사건도 없는 것 같은데 무서운 죄의 씨앗으로 숨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정말 형편없고, 변변치도 못한 인격인데 그 속에 교만 이 있습니다.

 이렇게 불신앙적 교만으로 인해서 죄가 계속 생산되고 있는 것입니다.이것을 원 죄라고 합니다.이런 의미에서 죄가 죄를 낳기에 조의 유전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죄가 하나로 끝났으면 좋겠지만 죄를 짓는 순간에 그것이 씨앗이 되어 죄로 열 매를 맺고,또다시 씨앗이되고, 또 열매를 맺기에 죄의 유전성 내지는 영향력을 말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룩이라고 표현을 하셨습니다.조그마한 누룩하나 때문에 전체가 썩어 집니다.의학적으로 말하면 나쁜균이 몸에 하나 생기므로 차차 번식을 하고,점점 커져서 결국에는 온 몸에 열이 나고,병이 되는 것입니다.이와같이 죄도 점점 커져 나가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5:14절에 그러나 아담으로 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 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니라고 했습니다.

죄는 또하나의 왕권을 가지고 있습니다.본문에서 왕노릇한다고 했는데,이것은 독재를 말하며 다스린다는 뜻입니다.다시말하면 죄가 자유를 뺏는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죄를 짓지마는 그 다음에는 내가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내 속에 죄가 왕노릇해서 죄가 죄를 짓게 하는 것입니다.

마치 술을 마시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로마서 7장에 보면 "내 안에 죄가 나를 지배하고 있다. 원하는 선은 행할 수 없 고, 원지 않는 죄만 짓는다"고 내 안에 죄라고 하는 또 하나의 어떤 힘이 나를 지 배하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죄의 수렁에 빠지면 죄가 나의 왕노릇하게 됩 니다.바울은 죄가 왕노릇하면 나는 죄의 노예가 된다고 말하고 심지어는 위식구조 까지 죄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그리하여 마지막에는 사망에 이른다고 바울은 말 합니다.

 처음에는 내가 죄를 짓지마는 후에는 죄가 나를 지배하고 마지막에는 아주 죽어 버린다는 것입니다.이것은 율법과 관계없이 원리적이라는 것입니다.

14절 끝부분에서 아담은 오신자의 표상즉 오실자의 표상은 예수 그리스도으 예표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는 아담과 우리와의 관계입니다.

아담이 한 번 죄를 지음으로 죄의 노예가 되었고, 죄의 노예가 된 그것이 유전 성을 가지고 영향력을 주어서 오늘 우리는 날 때부터 죄에서 나고,그리고 계속 죄 의 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아담 한 사람 때문에 온 인류가 죄에 빠졌고,죄아래 살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전제로 해서 바울은 이제 은혜를 설명합니다.

로마서 5:15에 그러나 그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 한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한 사람 예수로 말미암아 어떻게 구원을 얻을수 있느냐에 대한 사도 바울의 설 명이 본문에 나타나있습니다.

즉 한사람으로 인해 온 인류가 살수 있다는 설명인 것입니다. 한 사람으로 인해 서 온 인류가 사망에 매었다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말미암아,온 인류가 생명 에 이르는 것은 논리적으로 당연한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은혜의 선물성을 설명했습니다.한 사람의 의인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다는 것입니다.

선물이란 내가 수고한 댓가로 받는것이 아닙니다.선물은 주는 사람이 주도력를 가지고 있습니다.받는 사람의 뜻이 아니라,주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주는 사람의 은혜이며 은총입니다.전혀 생각지도 못했는데 주는 사 람이 마음대로 상대방을 사랑해서 주는 것이 선물입니다.이런 선물을 받는 사람은 믿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감사한 마음과 진실한 마음으로 주고 받지 아니하면,뇌물이 됩니다.

 주는 이의 마음과 정성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그것이 믿음입니다.예수 그 리스도는 우리가 생각지 않았을 때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선물로 주셨습니다.

선물은 묘한 것으로 받을 때는 공짜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공짜가 아닙니다.크 든 작든 선물은 상당히 큰 힘이 있어서 받고나면 매이게 됩니다.받을 때는 그저 받느것 같은데,받음으로써 예속되게 됩니다.

 죄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들어와서 온 인류를 사망에 빠뜨린 것처럼 한 의인 으로 은혜가 들어와서 온 인류에게 구원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불순종하므 로 죄가 들어 오듯이 예수께서 순종하므로 말미암아 생명이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로 인해 이루어진 생명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보겠습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생명의 가능성을 봅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달나 라에 가본일이 없지만 매스컴을 통해서 달나라에 올라가는 장면을 지켜볼 때,우리 도 갈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게 됩니다.한 사람이 갔으면 우리도 갑니다.

이와같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즉 이 구원이 생명의 길을 열어 놓았습 니다.이 길을 통하여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예수님은 죽음 을 이기는 생명의 은혜를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죽습니다.이렇게 죽음의 힘은 큽니다.그러나 예수님의 힘은 죽 음의 힘보다 더욱 크기 때문에 사망을 이겻습니다.

죄의 힘이 큽니다.죄의 빛을 값지 못한 사람에게입니다.그러나 주님은 죄의 빚 을 죄의 값으로 죽는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값아 주셨습니다.이것이 하나님의 은혜 입니다.

 죄의 힘이 크기 때문에 죄가 왕노릇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와 부활의 은혜는 죄의 힘보다 더욱더 크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자에게는 더 크신 예수님의 은혜가 왕노릇을 합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 많이 임했습니다.

죄가 많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교만한 자에게는 더 큰 은헤가 임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겸손하게 회개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항상 임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죄인을 부르러 온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죄인과 의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사람은 누구나 다 죄인이지 만,내가 죄인이라고하는 죄인과 내가 의인이라고 하는 죄인이 있을 뿐입니다.의인 이라고 하는 사람은 교만이라는 죄 하나를 더 짓고 사는 사람입니다.

 참 은혜는 내가 더욱더 큰 죄인이라고 하는 자기 뉘우침으로 그렇게 인식하고 계속회개하는 사람입니다.그러므로 가장 깊은 회개에 가장 높은 은혜가 임하는 것 입니다.그래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는 것입니다.

  이는 죄가 사망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 여,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21절에 말 씀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의의 승리를 말하고있습니다. 어두움이 캄캄한 곳 어두운 곳에서만 왕노릇 할 수 있으나 빛 앞에서는 없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죄가 많아도 하나님의 의와 사랑은 더 큽니다. 또한 예수그리스도의 십 자가와 부활의 은혜는 만 백성을 구원하고도 남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크고 무한하신 은혜의 승리를 역설하고 증명하는 것이 오늘의 본문의 뜻입니다. 이 은혜에 감격할 때 우리도 승리의 삶을 살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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