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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의 권세로부터의 해방의 길-예수 그리스도 (롬 07: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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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구원받았다고 할 때 그 구원은 죄의 용서란 차원에서만 보면 죄의 형벌로부터의 구원에 불과하다. 죄인된 신분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죄인이라는 신분으로부터 해방되었을지라도 죄를 짓는 가능성에서부터 해방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난 후에 현실적으로 부딪치는 것은 삶의 기쁨이 아니라 갈등이다. 옛날에 내가 죄인되었을 때는 죄와 같이 살아가면서도 갈등이 없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그의 말씀대로 살려 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은 죄를 떠나라 하고 본능은 여전히 죄악의 자리에 머물고자 한다. 여기서 갈등이 빚어지는 것이다. 자신이 깨끗하게 살겠다고 결심했다고 죄악을 좇던 성품들이 금방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기와의 치열한 싸움을 통해 조금씩 나아지는 것이다. 신앙이 성숙하고 있는 것을 알려 줄 수 있는 지표는 사람이 외적으로 변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성품을 통해서이다.
우리가 일상 생활 속의 죄의 도전을 깨닫지 못하고 그 갈등을 해소키 위해 자꾸만 교회 쪽으로 도망감으로 우리의 현실의 삶 속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가졌던 감격들은 시간이 갈수록 맥이 빠지게 된다. 우리가 살아야 되는 곳은 늘 죄가 우리를 유혹하고, 늘 우리를 죄를 짓도록 만드는 죄의 덫이 감추어진 곳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생활 속에 교묘히 감추어진 ‘죄’에 대하여 늘 잊고 있다. 실제로 지금 패배하고 있는 형편임에도 그것이 죄 때문이라는 것을 잊고 오히려 ‘신앙이란 다 그런거야’하고 체념하며 그런 상태를 당연시하고 있다. 이와 같은 죄의 교묘함과 무서움에 경악해야 한다.
기독교는 가난하지 않다. 우리는 현실의 생활 속에서 훨씬 더 풍성하게 많은 것을 누려야 마땅하다. 또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왜 안되는가 일상의 삶에서 교묘히 감추어진 죄의 덫에 걸려 넘어지고, 죄의 도전에 늘 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를 이긴다면 너무나 풍성한 삶을 순간 순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그런 맥빠진 삶을 기독교 자체가 그런 것처럼, 죄 때문에 그런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신자인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우리가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감격과 희열에 넘쳐 있을 때는 힘있게 죄를 이긴다. 그러나 죄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는다. 자꾸만 유혹한다. 사탄은 우리가 어디가 약한 줄 알고 그곳을 집중공격한다. 우리 속에는 아직도 죄짓기를 원하는 마음이 자리잡고 있다. 죄를 갈구하는 것이다. 옛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그러면 성경은 이 힘있는 교묘한 죄를 어떻게 극복하고 해결하도록 요구하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롬 7:21-23)”
인간은 죄인된 신분으로부터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할지라도 죄에 대해서만은 아직도 본능적으로 그쪽에 기울이도록 되어 있는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중력의 영역 속에 있는 모든 물건은 위로 올라가지 않고 늘 땅에 떨어지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
하였음이라(롬 8:1-2)”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
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
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죄를 짓는다. 그러나 신분적으로 우리는 정죄를 받지 않는다. 우리의 범죄는 용서받을 수 있고 그 죄가 멸망으로 우리를 이끌지는 못한다.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것은 우리를 신분적으로만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지 않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이제 그의 자녀로 삼으심으로 육신으로 할 수 없었던 일을 이루려 하신다. 신분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이제 육신을 좇지 않고 그의 영을 좇으면 율법을 이행할 수 있는 존재들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성화라 한다. 성화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자력으로 자신을 힘있게 만들거나 자신을 거룩하게 만드는 싸움이 아니라 나 대신 예수 그리스도로 대치하는 삶인 것이다.
그러나 성화의 과정에 있어서 나는 가만히 있고 하나님이 다 해주시기를 기다린다는 말은 아니다. 오늘의 삶 속에서 내가 내 발로 일어나 하나님 쪽으로 걸어가야 되는 싸움이다. 그래서 신자의 싸움은 늘 두 가지 갈등에 싸이게 된다. 그것은 죄를 짓고 싶다는 것과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과의 갈등이다. 내가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께서 죄를 이길 수 있도록 해주시지는 않는다. 내가 스스로 그래서는 안되는 쪽에 나를 항복시켜야 한다. 그분에게 항복시켜야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내가 혼자서 죄를 안 짓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께 나를 항복시키는 것과의 차이가 별로 없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다른 점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전자는 하나님의 약속들과 하나님의 명령들을 내 원리와 내 근거와 지켜야 할 규범으로 삼아 그것을 가지고 내가 싸워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후자는 그 일을 유일하게 하실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그분에게 나를 항복시키는 것이다. 전자가 신앙을 깨우치는 것, 규칙적인 것, 방법론과 규칙이라는 것으로써 내가 지켜 나가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인격으로, 그분에게 나를 항복시키는 것이다. 로마서 7장은 우리 안에 도무지 선한 것이 없다고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시고 내 삶의 주인이 되게 하는 방법 외에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
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
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
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
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
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
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5-11)”
성화란 절대 체험과 은사로 받을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구원을 선물로 받을 뿐이다. 구원받은 자로서 성화의 과정은 절대 은사와 선물이 아니라 내가 해야만 되는 것이다. 성화란 하나님의 약속을 향해 죄에 대하여 자기가 스스로 싸워 이기며, 친히 얼굴을 돌리며 그 축복된 약속을 향하여 자신이 실제로 발을 내딛어 걷는 것이다. 성화란 그래서 인내하고, 사랑하고, 거짓말하지 않는 등의 인격적 변화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하나의 규범으로 내 생활을 치장하려는 쪽으로 가는 점에 있다. 여기서 죄는 교묘하게 우리를 걸고 넘어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 성경의 어떤 원칙들을 깨우쳐 그것을 지켜 나가는 것으로써 기독교인의 삶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면 나름대로 굉장히 노력을 하고 또 대단한 수준에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인본주의에 불과한 신앙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해놓고 늘 자랑의 차원에 머무르는 실수를 범한다. 자랑이 있다는 것은 ‘이것은 내가 한 것이다’라는 것이다. 주님 앞에 항복하는 사람일수록 그분과 인격적인 사귐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겸손하고, 용서하고, 참으며, 모든 일에 나는 없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계신 것이다. 언제나 죄를 만나서 승리하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
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
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성숙해졌는가는 외적인 변화로 밖에 알 수 없다. 그러나 외적으로 나타나는 신앙의 성장은 내가 얼마나 그리스도와 깊은 교제에 들어가 있느냐의 부수적인 결과일 뿐이다. 이 교제가 없다면 우리는 잘못가고 있는 것이다. 예수만이 우리를 유일하게 죄에서 승리케 하신다. 그는 죄를 알지도 못한 분이시다. 요한복음 8:29에 의하면 그는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만 하셨다. 그분이 바로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일을 하게끔 하신다. 죄를 승리하는 방법, 그분으로 하여금 내 안에 계셔서 내 삶을 주도케 하는 방법 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 우리가 죄를 이길 수 있는 근거가 바로 내 안에 계신 바로 그분 때문이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
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벧후 1:4)”
결국 구원이란 죄인 된 자리에서 꺼냄을 받았을 뿐 아니라 죄를 이겨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리까지 가는 것이다. 신자가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차원까지 가는 것이다. 신자들에게 있어 가장 나쁜 점 하나는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신데도 불구하고 전혀 감각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에 대하여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
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6)”
우리 안에 계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운명과 우리의 전 인생이 축복받는 길로 갈 수 밖에 없도록 운명지어져 있는 사람들이 우리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기도와 요구에 귀를 기울이는 적이 없다. 그분에 대한 감각이 없다. 왜 그런가 우리는 죄에 대하여 훨씬 더 익숙해져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악된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지금에는 우리가 죄를 이길 수 있다는 점이다.
두 성품-신의 성품, 죄의 성품-이 있는데 전자는 우리를 승리와 영광으로 이끌어 가고, 후자는 우리를 실패와 멸망으로 이끌어간다. 그러면 우리는 어느 쪽을 택해야 하는가 당연히 승리와 영광의 길을 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론이다. 실제로 우리의 신앙 생활을 보면 우리는 어느 쪽을 택하고 있는가 실패와 멸망으로 이끌어 가는 죄를 택하고 있다. 그쪽이 훨씬 더 좋기 때문이다. 결국 여기에 이르러 보면 우리의 신앙생활을 실패로 이끄는 근본적인 원인이 드러나는 것이다.
신앙 생활에 있어 실패하게 하는 근본 원인이 무엇인가 결국 ‘자기’이다. ‘자기’가 실패의 근본 원인인 것이다. 죄와 하나님 사이에서 어느 쪽이 옳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안다. 그러나 현실은 반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죄로부터 해방되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 안에 이제 생명의 성령의 법이 들어와 있으므로 거기에 대하여 더 많이 감각하고 이 약속에 대하여 더 많이 익숙해져야 하는 것이다. 내가 싸워야 할 대상은 내 안에 있는 죄의 본능이다. 스스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내 삶의 주인이 되셔서 나의 삶을 주관하도록 하게 하는 싸움을 해야 한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우리를 유혹하는 무서운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유일한 해답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실제의 신앙 생활에서 느끼는 그런 변화는 어느날 갑자기 한꺼번에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조금씩 변화되어 어느날 우리의 성품을 보니 성령의 열매들이 나타나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똑같은 일을 당해도 그 일을 당하는 사람의 성품이 변해 있으므로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렇게 되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신 자신의 관심과 열심을 거두지 않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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