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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는 법 1 (요 04: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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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주부터 우리를 이렇게 교회로 세우신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에 그 전체적인 제목을 설정하여 말하기를 교회의 사명을 크게 말해서 한가지 뿐인데 그것은 이 땅위에 임하여 온 하나님의 나라를 교회가 잘 증시해 내는 것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이 교회의 위대한 사명,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에 펼쳐내는 일, 이 세상에 확연하게 드러내는 일, 이 일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해야 될 일이 무엇입니까 이제 우리가 그 중에 하나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주님 앞에 경배하는 일입니다. 주님앞에 예배하는 일입니다. 이 일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에 비추는 일입니다. 이 일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벗어 날 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의 고정관념 입니다. 우리의 고정관념은 무엇이냐 하면 예배라고 하는 것을 교회에 속한 일종의 요식행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가면 늘 예배행위를 한다. 지루해도 그것을 해야 그 다음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다른 모든 일에 있어서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어디를 가면 어쩔 수 없이 요식행위로서 예배를 하고 다음에 어떤 순서를 가진다.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어떤 강압적인 사회 안에서의 국민의례를 사람한테 요구하는 거와 비슷한 것 처럼 되어져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해서 교회에 가면 의례적으로 그런것을 한다. 그러니까 예배라고 하는 것을 어쩔 수 없이 우리가 견뎌 내야할 것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죠. 그러나 참된 의미로서의 예배는 무엇이냐 우리는 뭐하러 이렇게 모이는 것이냐.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주 앞에 감당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사명이 하나님의 나라를 증시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시고 구체적으로 지금 우리들을 여기서 통치하고 있다는 것을 이 세상 앞에 확연하게 드러내는데 예배가 그것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냐.
첫째는 하나님과 관련해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분이시니까 우리의 경배를 받아 마땅하십니다 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라고 하는 일은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관련하고 있는 하나님께 하나님은 마땅히 우리들을 포함해서 모든 피조물들의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하는 것을 표현해 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둘째로 우리와 관련해서도 아주 의미가 있는데 우리 스스로도 우리 자신들을 어떻게 인식하여 드리느냐 하면 우리들은 마땅히 하나님께 경배를 하면서 살아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께 우리 영혼의 무릎을 꿇어서 우리 자신을 드려햐 하는 존재입니다. 하는 것을 이 표현해 내는 것입니다. 이 예배 행위 가운데서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우리 자신의 어떠함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것이 잘 드러나게끔 예배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그리고 더군다나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와만 관련되어진 일이 아니라 여기에,하나님을 경배하면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직접 통치하시고 계심을 인정하고 서 있는 우리가 있음을 이 세상 앞에 나타내 보여주는 일이기 때문에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배행위는 3종류의 존재들에 대해서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대해서 의미를 가지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고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표현해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번째는 하나님과 관련 없는 듯하고 우리 하고도 관련이 없는 듯 하고 지금 이 시간에 자기들의 시간을 즐기고 있는 온 세상과 관련해서도 이것은 의미있는 일입니다. 온 세상앞에 우리가 선포하는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라고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저 요식행위 정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의 개념 가운데 만일 그런 개념이 있다면 그것은 빨리 벗어나야 할 일입니다. 물론 한국 교회에서는 사람들이 열심히 예배에 의미를 두고 참여하니까 이게 잘못된 생각이 없을 수 있겠습니다만은 그래서 한국 사람이 많이 없는 지역에 여러분들이 산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한국 사람들이 거의 없고 간혹 가다가 한국 사람을 몇 몇 만날 수 있는 사회 가운데 산다고 해 보십시다. 그러면 그런 사회에서는 어떤 일이 생겨질 수 있느냐 하면 한국 사람들이 한국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예배당에 나오는 일이 생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국 사람들이 예배당에 나오는 목적이 어떻게 되어지는가 하면 나중에 한국 사람들을 만나서 울기도 하고 서로 교제도 하고 하는데 목적이 되어진다는 말이죠. 그러면 예배의 가장 중요한 목적, 하나님 앞에 우리의 경배를 드린다고 하는 것을 뭐 생각하기는 하는데 그것은 부차적인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죠. 그런 이유로 있어지는 일들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매일 만나는 사람들이 한국 사람인데 우리끼리야 뭐 이런게 없겠죠. 그러나 우리 끼리라도 그런 일이 발생할 수가 있습니다. 또 이게 어려서 부터 또는 예배당에 나와서 생활한지 오래 되다보면 예배한다고 하는 일이 교회에 나오면 늘 해야되는 일이니까 그냥 해야되는건가 보다 라고 습관적으로 참여하는 경우가 생길 수가 있습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다시금 우리의 교회의 사명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무엇하러 이 자리에 모이는 것이가 하는 것을 생강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가장 고귀한 일입니다.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우리의 온 마음을 다 쏟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한 여인도 자기 인생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질문은 예배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본문에 어떤 여인이 등장하는가 하면 사마리아인 여인이 하나 등장 합니다. 이 여인과 예수님과의 대화가 오늘 읽은 본문 4장에 첫 부분서부터 계속 되어지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아마 우리가 생각하건데 그 동네 사람들로 부터 별로 높인을 받지 못하던 여인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별로 높이지 않는 별로 고귀하게 생각하지 않는 여인, 그런데 그런 여인에게 예수께서 친히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어디로 가셨는가 하면 우물가에 앉아 계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우물가에서 있어질 법한 이야기를 시작하셨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셨는가 “나한테 물 좀 주십시오”그러니까 사람과 무슨 이야기를 할려면 닫자곧자로 저희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하고 접촉점을 마련해야 하죠. 우리가 다음 주일날 우리 친구들을 같이 모셔서 예배하기로 했습니다. 이럴때에도 여러분들이 막무가네로 가서 다음주에 우리 가서 함께 예배드립시다.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했죠. 어떻게 해야 된다고 했습니까 사전에 이번주까지 여러분들이 인간적으로 좀 친해 놓으라고 했잖아요. 접촉점을 마련하셔야 된단 말이예요. 이 사람하고 나 하고 무슨 이야기가 통한다. 종교적인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어도 이야기가 통한다는 것이 있어야지 이야기가 되지않겠습니까 ! 이 여인하고 예수님하고 이야기가 시작되어 집니다. “물 좀 달라” 그러니까 이 여인이 이 사람의 모습을 보니까 유대사람인데 사마리아 사람인 나에게 왜 물을 달라고 하는가 그래서 예수님 앞에 다시 물어봅니다. “왜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그 배경을 좀 알 필요가 있는데요. 유대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아주 개 처럼 취급을 했습니다. 왜 그랬는가 하면 우리가 단일 민족이기 때문에 피가 섞인 사람들 혼혈인 사람들을 별로 좋은 감정인지 아닌지는 좀 차추에 두고 단일민족인 사람들은 늘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하고 중국사람들 또는 일본사람들하고 피가 섞였다 하면 그것에 대해서 별로 안 좋은 감정들을 가지죠. 어쩌면 우리가 이것은 극복해야 되는 감정인지도 모릅니다. 그와 비슷한 일이 누구에게 일어났는가 하면 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 사람들은 사람 취급도 안해줍니다. 예수님이 이 여인과 대화를 합니다. 그러면서 물을 달라고 하니까 이 여인이 이상스럽게 생각해서 자꾸 묻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이야기를 점점 깊은 수준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네가 만일 너한테 물을 달라고 하는 이가 누군지 알았더라면 네가 나한테 물을 달라고 했을 것이다 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이 여인이 이상해요 당신은 여기서 어떻게 물을 길러 주겠습니까 여기는 우물도 깊고 당신은 우물물을 기를 그릇도 없으니까 나한테 물을 달라 해놓고서는 어떻게 물을 준다고 합니까 이 여인이 이상해서 묻습니다.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주는 물을 먹는자마다 그 속에서 물이 쏟아나서 다시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이 이상한 이야기를 하죠. 지금 목말라서 물달라고 하신 분이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사람은 그 속에서 물이 쏟아나리라”그래요. 예수님이 무슨 영적인 이야기를 하시려고 한단 말이죠. 요한복음에서는 늘 사람들이 그것을 육체적으로 자꾸 생각을 합니다. 물 그러니까 자주 먹는 물만 이 여인이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한테 그렇게 질문을 하는 겁니다.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 자 내가 주는 물은 어떤 물이냐 하면 그것은 생명의 물, 그것은 영생하도록 쏟아나는 물이다. 결국 무엇을 상징하느냐 하면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가져다주실 성령님의 놀라운 능력을 이야기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그것을 이해 할 길이 없죠. 그러니까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당신이 어떻게 해서 물을 길러 준다고 하니까, 그러면 내게 그 물을 주십시요 그 물 주시면 다시는 목마르지 아니한다고 했으니까 내가 다시 이 뜨거운 여름 날에 물길러 나오지 않을 수 있게 물을 좀 주십시오” 이 여인이 아직도 문자적인 수준에서 그냥 육체적인 수준에서 이해하고 있잖아요. 예수님은 이여인에게 이렇게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가서 네 남편을 데리고 오라” 이 여인이 생각한 이야기예요. 왜 갑자기 내 남편을 데리고 오라 하느냐 “내 남편이 없는데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네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는데 지금 있는 남편도 네 남편이 아니다”그러니까 이 여인이 자기의 상황을 송두리째 밝혀놓고 이야기 하거든요 이 여인이 어떻게 해서 남편이 다섯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남편이 다섯명을 차례대로 혼인을 했었는지, 아니면 동시에 여러 남편을 두고 사는 창녀 같은 여자였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이 별로 좋지 못한 과거가 있다는 것을 알아내니까 이 여인이 “내가 보니까 당신은 선지자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내 사정을 이렇게 잘 압니까”하면서 이제 예수님의 이야기가 무르익습니다. 그러면서 이 여인이 예수님께 던진 질문이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무언가 새로운 이해를 하면서 부터 이 여인이 자기의 마음속 깊이 묻어 놓았던 한가지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 질문이 무엇에 관한 질문이냐면 예배에 관한 질문입니다. 이 여인은 사마리아인이라도 예루살렘에 가서 예배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마ㅓ리아 사람들이 그리심이라는 산에다 산당을 지어 놓고서 거기에 예배를 했거든요. 그러니까 사마리아 사람들은 매일 여기서 예배 하는데 유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는 것이 진짜라고 그러죠. 그러면 사마리아 사람들은 마음속에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단 말입니다. “어느 예배가 진짜인가”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섬기지 않는 사람들도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자기가 어떤 종교를 가지고 섬긴다고 했을때 그 예배하는 행위에 대해 아주 깊이 있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가장 깊은 인간의 종교적인 질문입니다.
누군가 말했듯이 관심일런지도 모릅니다. 궁극적인 관심, 하나님을 안 섬겨도 그런것이 있단 말이죠. 그래서 그런 것과 관련해서 할 때는 이 세상에 예수 안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자기의 정성을 다 해서 합니다. 있는 정성, 없는 정성 다해서 합니다. 물론 우리와 한 가지 다른 점은 있습니다. 두 가지 의미에서 다른데 하나는 정성을 드리는 것은 오직 그 예배 행위와 관련된 때와 관련해서만 잘 하면 됩니다. 다른데서는 어떻게 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예배행위에 관련된 곳에 가서는 잘 하면 됩니다. 그것이 이 세상 사람들의 보통 예배하는 행위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따라서 그것은 무엇을 의미해 주느냐 하면 예배때에는 정성을 다하지만 그것이 자기의 삶과 관련은 별로 없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단지 예배때에 정성을 다하지 않으면 그 자기의 예배드리는 대상이 자기한테 뭔가 화를 줄거니까 이 때는 모든 정성을 다한다는 그런 생각이 이 세상의 하나님을 안 섬기는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있습니다. 이 때 우리가 이렇게 예배하는 사람들하고 관련해서 한편에서는 우리가 배울 것도 있고, 배울거라는게 어떤거냐 하면 하나님이 아닌 존재를 섬기는데 그렇게 아무렇게나 예배를 드릴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 볼 수가 있겠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찬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람이 거기에 모든 마음을 던지지 아니하고 그저 예배하면서, 딴 생각하면서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또, 시간표를 놓고 본다면 시간이 있을 때는 예배를 하는 거고, 시간이 없을 때는 예배를 안하는 거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있는 것인가. 물론 하나님을 안 섬기는 사람들이 예배 할 때는 참 하나님께 안 드리니까 예배가 이렇게 정해진 시간이 아니지만 모든 정성을 다 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속에 가장 심각한 질문, 예배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 그 면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예배가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예배에 심각하게 잘못된 것은 가장 기본적으로 예배의 대상이 잘 못 되었다는 것은 자처하고라도 몇가지 문제가 있는데 하나는 그 예배 행위와 삶을 분리시킨다는데 있습니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그런 관습에 젖어 왔던 예수 믿는 사람이 된 사람한테도 빠져들어가기 쉬운 문제입니다. 우리도 어떻게 되기가 쉬운가 하면 예배행위와 같이 분리되기가 쉽습니다.사는 것과 예배하는 것과는 별개의 무제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내거 예배 행위와 와서 이것만 다하면 난느 하나님 앞에서 할 것을 다한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나의 사명을 다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하면 우리는 사실상 우리의 예배의 대상은 옳을는지는 몰라도 실질적으로는 다른 사람들하고 비슷한 행위에 빠져들어가고 있다고 하는 것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배해야 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이때에 우리한테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해 주시는 말씀을 해주십니다. 어떤 이야기를 해 주시느냐 하면 그것이 오늘 본문의 23절의 말씀인데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그 이 때라 하는 때는 어느 때냐 하면 메시야가 오신때, 예수님이 오신 때 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다음에는 어느 곳에든지 상관이 없고 우리가 참되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 입니다. 이제는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장소의 구예가 없습니다. 어느 곳에든지 우리가 예배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또 잘못 생각하면 안됩니다. 아 ! 그래요 그러면 주일날 구태여 내가 예배당 안가고 우리 집에서 예배하면 되겠네요. 원칙상으로는 그것이 가능합니다만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다 각기 예배드리겠죠.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극치에 도달하기 전 까지는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시기 원하셨는가 하면 일정한 날을 아직도 정해 놓으시고, 그것이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신 주일입니다. 주일을 정해 놓으시고 이 날 모든 성도들 그 지역에 사는 모든 성도들이 같이 모여서 예배 하도록 하셨습니다. 이 예배 행위를 통하여서 무엇을 드러내도록 하였냐면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증거하고 그 사람들이 어떤 존재인가를 증명해내고 그 사람들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 앞에 여기 이런 사람들이 여기 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이 지금도 이 세상을 통치하고 자기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고 믿고 그것을 인정하여 드리는 사람이 있다고 것을 밝혀내는 행위를 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가운데서는 뭐라고 예기하셨냐면 “하나님은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니라”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이 약속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주 앞에 나와서 예배할 때 주님께서 뭘 하길 원하셨는가 하면 이런 식으로 주 앞에 예배하시는 분을 주님께서는 찾으시기를 원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여기서 하나님에 의해서 찾음을 당해야 합니다. 어느 꽁트집에 이상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무슨 이야기냐면, 옛날에 한국에서 ‘엑스플러 74’이런것을 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인데 모여서

5.16광장에서 집회를 했었는데 그때 제목이 뭐였냐면 “나는 찾았네” 이 말이 어디서 나왔는가 하면 “I am found" 이런 스타일이 다 미국에서 왔기 때문에 미국말을 번역해서 내가 찾았다는 거예요. 누굴 찾았냐면 나의 구세주 예수님을 내가 찾았다는 거예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전도를 열심히 해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찾게 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제 우리가 잘 생각을 해봐야지요. 그랬더니 이제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만들어 내는 것이 좋은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은 그럼 하나님 편에서는 뭐가 될까 사람들은 다 찾았으니까 예수님을 통해서 살 길을 찾았으니까 좋은 말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나는 들켰네’ 하나님은 들키시는 분이 아니시고 하나미이 우리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들켜야 돼요. 우리가 한님 앞에 발견을 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발견하시는 거죠.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오시면 이 공동체가 그런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발견 하십니다. 그래야 우리가 우리의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명을 다하기 위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려면 우리가 이것에 온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전심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예배를 보면 안되 죠. 흔히 이런 말을 쓰지만 우리가 예배하는 행위를 지켜보는 거죠. 그럼 나는 뭡니까 구경꾼이죠 구경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늘 말씀 드렸죠. 우리 교회 안에서 구경꾼이 있다면 딱 한 분이신데 누구십니까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예배를 지켜 보시면서 우리 예배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저들의 온 힘을 다해 가지고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모든 순서가 그렀습니다. 성가대가 찬양을 할 때도, 우리가 들어면 안 되요. 우리가 ‘아 ! 노래 잘한다’ 그러고 있으면 안되고 하나님 앞에 성가대가 우리 모두를 대표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온 힘을 다해서, 모든 사람들이 전심해서 찬송을 주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이 일이 제대로 되게 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그렇게 분명히 써야 합니다. 그런데 예배를 오래 드리다 보면 여러분들이 습관적으로 되기 쉽단 말이예요. 그래서 이것을 정말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으식이 없이 그냥 가는 경우가 있어요. 그러다 보면 이제 사람들의 심정이 어떻게 되냐하면 자기들이 좋은데를 갑니다. 일단은 분위기가 좋아야 돼요. 그리고 성가대의 찬양이 우렁차고 멋있어야 됩니다. 자기가 듣기 좋아야 돼요. 그 다음에는 설교 이야기가 부담이 없고 그냥 편안하게 앉아 있다 나오면 좋을만 한데로 가게 됩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럼 그것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나를 위해서 예배하는 거얘요. 그렇죠. 부담이 없어야 돼요. 어떻게 되든지 그렇게 되어지면 그것을 주님 앞에 예배드리는 행위가 아닐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같이 예배를 드리지만 진짜 예배드리는 것과 아닌게 구별이 되어 집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전부다 하나님의 인도하심대로 출애굽을 해 나갑니다. 남자 어른만 60만 대군이 출애굽해 나가요. 또 홍해를 육지처럼 많은 사람이 건너 갑니다. 건너가지만 그 사건을 경험하면서 그 사건을 정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것을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 살아야 겠다는 인식을 가지면서 가는 사람이 있고 같이 사건에 동참하지만 결국에는 하나님과 관련이 없어지는 사람이 있어요. 우리 가운데 그런 사람이 있어서는 안돼요. 우리가 다 같이 하나님께 예배 하러 나왔는데 우리가 다 전심으로 예배를 해서 우리가 주님 앞에 다 예배를 해서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인정해 드리는 일이 되어야 하고 우리가 우리 자신도 그런 분으로 인정해 내는 것이 되어야 되고 그리고 이 세상 앞에 하나님을 그렇게 선포하는 행위로서 이것이 되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이죠. 그럼 이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될건가 사실은 여기까지만 이야기하고 나머지 이야기는 안 해도 여러분들이 자동적으로 컴퓨터처럼 착 착 나와야 돼요. 그런데 또 이야기를 안하면 구체적으로 적용을 안하실까봐 이것까지 이야기 합니다. 신경을 써야 합니다. 하나님께 공예배는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영혼의 무릎을 꿇어서 절하면 되지만 같이 예배드리기로 한 것이니까 우리가 어떤 식순을 가지고서 누구한테 잔치를 해 주기로 했다. 그러면 어떻게 하시죠. 딱 시간에 맞춰서 가서 모두가 같이 시간 맞춰서 절하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것 처럼 하나님 앞에 공적으로 절하는 거니까 시간을 딱 맞추어서 그러니까 에를 들어 우리가 주일날 11시에 예배드리기로 했다. 그러면 그 예배시작하기 전에 우리가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러죠 우리 모두가 그렇게 마음을 써야 되는 겁니다. 마음을 분명히 거기에 써야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전에 사실은 그렇게만 했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속에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주님 내가 예배하러 주 앞에 나갑니다. 주님 앞에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우리들의 마음을 준비시켜 주십시요’ 모일 때는 언제든지 그렇게 해야 합니다. 주일 아침, 저녁, 그러니까 하루 전체를 다 주님께 드립니다. 하는 오랜 습관에서 나온 겁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우리 형편에 따라서 변경시키지 않는 것은 공예배로 드리는 것이니까 원칙상 모든 성도들이 다 참여 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또 우리가 수요 기도회로 모인다고 했을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주 앞에서 그것을 인정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내 시간 시간표보다는 이 시간을 중요시해서 거기에 맞춰 내 시간표를 짜야 합니다. 이것을 너무 율법적으로 이야기하면은 사람들이 간혹가다 마음속에 이런 반발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자유롭고, 예배 때문에 내 생활이 규제 되어서야 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심지어 저 자신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성도들한테 어떻게 해 줘야 될건가 ! 이 사람들이 너무 규제되어서 생활한건가 ! 그러나 이 때 한 가지 생각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지난주에 이야기 했던 것인데 사람을 존중하는 것은 좋죠. 우리들의 삶을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종교적인 것 때문에 내 인간성이 말살되어 진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원치 않으셔요. 그것은 옳은 거예요. 그러나 나의 인간적인것, 다른 사람의 인간적인 것, 인간성이 구현되는게 너무 높아져서 이것이 하나님 보다도 더 높아지면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간혹 가다가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그렇게 되기가 쉽습니다. 또 그렇게 될 만한 여건이 한국 교회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들 피곤하니까요. 주일날도 피곤하고 주일날 교회에 나와서 일하다 피곤하니까 그렇게 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좀 자유롭게 해주기 위해서는 그것을 좀 풀어줘야 겠다는 의식이 우리 가운데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양보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의 자유로운 인간다움, 인간다운 풍요로운 생활 그것이 하나님 보다는 더 높아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그것을 만족시켜 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존재로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내에서 우리가 크게 일으켜야 될 캠페인이 있는데 그것은 모두다 하나님께 경배하는 이 공예배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 운동이여야 합니다. 이것이 한국 교회에서 너무나 낮춰져 있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이야기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요즘 극동방송 중에서 기독교 윤리 실천 운동에 관련된 선생님들한테 이야기를 하라고 하는게 있는데 그 이야기를 할 때 어떤 분이 ‘주일날 이든지 아뭏든 공예배로 모이는 날에 여러분들이 꼭 참석을 해야 된다’ 여러분들이 혹시 집에 있으시면 12시55분-1시 사이에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시면 유익이 되고 어떻게 실천해야 될 것인가, 우리가 생각했던 이야기도 하고 생가하지 못했던 이야기도 하니까 혹시 시간 있으시면 맞춰 놓으시고 들어시는데 그 때 그런 강조점에 유의해서 들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우리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 전체적으로 우리가 해야 될 일입니다. 공 예배를 중요시 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한 우리가 제대로 교회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게 다 된다고 했을 때 이것이 진짜로 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어야 하면요 아까 예배의 세번째 의미중의 온 세상 앞에 여기는 하나님을 경배하는사람들이 모인다. 이게 드러나야 되지 않습니까 이게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어져야 하느냐 하면 우리의 삶이 다른 사람이 보기에 정말 예배와 관련된 사람으로 살아야 됩니다. 그래야지 이 사람은 늘 자기의 일을 신실히 하는 사람이 어떻게 주인날만 되면 장사하는 것도 다 그만 놔 두고 이 사람이 예배하러 간단 말이죠. 그게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아 ! 여기는 예배하는 공동체가 있구나 우리가 이 주변에서 제대로 살면은 말입니다.우리가 주일날 여기서 찬송을 하고 찬송소리가 밖으로 퍼져 나갈때 사람들이 저 사람들은 매일 왜 저렇게 찬송을 하는 걸까 어느 뜻있는 시간에 생각하게 되면 아 ! 저들은 적어도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생각하면서 그 앞에 경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저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소리가 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네 우리의 삶이 예배와 관련되어지지 않으면, 유리되어지면 어떤 결과가 되어지냐면 ‘저 사람들은 이상하게 살더니 주일날 모여서 뭐하는 거지’이렇게 되어져 버린단 말이예요. 이게 정말로 중요합니다. 다른 이방 사람들의 예배와 우리 예배가 다르기 위해서는 우리의 구체적인 삶과 우리의 예배 행위가 연결이 되어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한테도 정말 예수 믿는 사람답게 대해주고 사랑해 주는 것이 실현되어져야만 합니다.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이게 어떻게 되어져야 하는가 하는 것은 나중에 우리가 해 나갈 것입니다만은 기본적인 원리 ‘삶과 예배가 하나가 되어 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결국 우리 오늘 말씀이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그리고 이 공예배가 교회의 사명의 하나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잘 드러나기 위해서 두 가지 예만 듭니다.
따라서 교회에서는 어떠한 일보다도 예배가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다른 것은 못해도 예배는 드려야 합니다. 이게 되어져야 합니다. 간혹 가다가 이것을 도와주기 위해서 다른 것을 하다가 나는 예배 못 드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런 것은 없애는 한이 있어도 모두가 교회 회원들이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너무 바빠서 교회 중진들이 예배를 못 드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그런 일이 발생할 수도 있는데 우리 전도사님들, 교회의 이런 저런 일을 다 돌봐야 하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실질적으로는 예배를 못 드리시는 경우가 있어요. 제가 전도사때 경험한 것입니다.그런일이 발생하면 안됩니다. 누구든지 그런 일이 발생 할 수 있어요. 교회일에 열심이 없는 분은 그런 일이 좀 덜해요. 열심히 하는 분들은 간혹 가다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너무 열심히 하다 보니까 전작 예배드려야 할 시간에는 너무바쁘고 졸려서 아, 이 시간은 참 내가 쉴 수 있는 시간이다. 이 시간만큼 나에게 좋은 시간은 없다. 그래서 예배를 못 드리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안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든 면을 잘 생각을 해서 이 교회가 빛을 드러내야 하는 시간이니까 에배가 전체적으로 되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또 하나, 주일날 드리는 예배와 관련해서 제가 자라난 분위기를 하여튼 주일에 모두가 예배를 드리는 분위기 였어요. 그런데 그것이 너무 율법적으로 요구가 되어 져서 제가 이제 대학교 다닐때 그게 좀 율법적인 요구로부터 풀어져야 되겠다 그런 인식이 되게끔 하여졌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가장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잘 설명해 주신 목사님께서 저한테 이런 예를 들어주신 것을 듣고 좀 놀랬습니다.
어떤 장로님이 계셨는데 이 장로님은 전국 각지를 돌아 다니시면서 사업을 하시는 분이었는데 몇 주일 동안 다른 지역에 가 있으시는 일이 있게되지 않겠습니다. 그러면 제 생각에는 옛날에 제가 자라난 분위기에서는 그래도 주일날은 자기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려야지 생각을 했을텐데 그 당시에는 제 생각이 어떻게 변했는가 하면 뭐 다른 교회에 가서 예배 드려도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을 했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리라고 생각했던 어떤 목사님, 아주 성경을 잘 가르치는 목사님이셨는데 그 목사님이 그 장로님은 꼭 주일날이면 자기 교회로 오신다는 거예요. 자기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자기가 속해 있는 교회에서 꼭 예배를 참석했다고 그래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꼭 그렇게 해야 되느냐고 말씀하실 줄 알았더니 목사님이 그러지 아니하시고 아 ! 교회를 그렇게 중요시 하고 예배를 중요시 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분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말씀하시더라구요. 그게 저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유효한 말씀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사실은 이런 이야기가 없어도 생각해 보면 그렇게 되어야 되거든요. 그런데 또 이런 이야기가 없으면 저도 옛날 설교 들을 때 보니까 성경 이야기 할 때는 졸립고, 딴 이야기 할 때는 안졸립더라구요.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라도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 하셨으면 합니다.
특별히 그게 내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교회가 그렇게 해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교회된 사명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를 통치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금 다스리시고 계신다. 그 다스리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가 지금 우리의 모든 것을 다하여서 경배하고 있다는 것을 드리는 이 예배에 우리가 정말 신실하게 참여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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