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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 24: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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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즈니쉬라고 하는 사상가가 쓴 책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우화가 실려 있습니다. 여우와 사자가 함께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무얼 드시겠습니까" 웨이터가 다가와 묻습니다. 여우가 저 먹고 싶은 것 몇 가지를 주문하면서 "일인 분만 주세요"라고 말합니다.
웨이터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두 분인데 어째 일인 분을"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립니다. '허허, 그 웨이터 참 눈치도 없네'하는 표정으로 여우가 설명을 합니다. "이보시오 웨이터 양반, 저 사자 양반이 배가 고팠다면 내가 어찌 이렇게 살아 있겠소!" 사자는 맹수입니다. 맹수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맹수입니다 마는 배가 부르면 착합니다. 배부른 맹수는 코앞에서 토끼가 뛰놀아도 해치는 법이 없습니다. 맹수가 배부르면 온 동산이 평온합니다. 계속하여 라즈니쉬는 설명합니다. "맹수는 식사를 위해서만 살생을 한다. 맹수는 욕심이 없다. 맹수는 동성연애를 하지 않는다. 맹수는 치부하지도 않고 저축하지도 않는다." 맹수는 욕심을 부리지 않습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랑하는 인간이 동물만도 못한 예가 무수히 많습니다.
아프리카의 성자라고 불리는 슈바이처 박사가 어느 날 식인종 추장과 함께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유럽에서 세계대전이 발발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을 때입니다. 식인종 추장은 전쟁을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고 하며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합니다. "백인들이 서로 총을 쏩니까" "불행히도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습니까" "그럴까봐 두렵습니다." 그러자 식인종 추장은 머리를 흔들면서 "그것 참 이상하군요. 백인들은 원수의 시체를 먹지 않으면서 왜 서로 잔인하게 죽이는 것입니까"라고 말했다 합니다.
왜 전쟁이 있습니까 왜 무참하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 싸우는 것입니까 한 어린 아들이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전쟁이 왜 일어나나요" 이에 아버지는 전쟁에 대하여 차근차근 설명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이렇고 제2차 세계대전은 저렇고 하며 열심히 설명을 하는데 아들이 통 못 알아듣습니다. 자꾸만 묻습니다. "아버지, 전쟁이 왜 일어나냐구요." 옆에 있던 어머니가 갑갑해서 끼여듭니다. "여보, 아이한테 설명을 하려면 분명하고 솔직하게 해야지, 그렇게 설명을 해서 알아듣겠어요" "참견하지 말아요! 얘야, 잘 들어봐라." 열이 난 아버지는 또 설명을 합니다. 어머니의 잔소리가 다시 튀어나옵니다. 결국 역정들을 내면서 부부 간에 싸우다가 아버지가 문을 꽝 닫고 나가버립니다. 이제 어머니가 아들을 붙들고 말합니다. "내가 설명해줄께."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빠 엄마가 다투는 걸 보니 왜 전쟁이 일어나는지 충분히 알 것 같아요." 아들의 기막힌 답변이었습니다.
여러분, 욕심이 문제입니다. 정욕이 문제입니다. 욕심 플러스 자존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쓸데없는 감정과 기분이 작동하여 싸우는 것입니다. 소위 명예를 챙긴답시고 형편없는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전쟁입니다. 야고보서 4장 1절을 보면 이것을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난 것이 아니냐"-욕심, 정욕이 싸움의 원인이라고 말씀합니다. 먼저 전쟁은 욕심입니다. 더 많은 땅, 더 많은 부, 더 많은 권력, 더 많은 명예, 더 많은 안정, 더 많은 자기 나름의 행복을 찾겠다고 다른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고 많은 사람을 죽이고 소란을 떠는 것입니다. 전쟁은 곧 욕심입니다.
두 번째로 전쟁은 폭력입니다. 법의 질서가 완전히 부재합니다.
모든 법의 질서가 다 무너지고 마는 '법 부재'입니다.
세 번째는 경제학적으로 전쟁은 불안과 혼란입니다. 경세의 질서 안에는 소유주가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 안에서는 가진 자도 없고 못가진 자도 없이 모두가 혼란 속에 빠져버립니다. 이것이 전쟁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소유가 다 백지로 돌아가는 시간-바로 전쟁입니다. 노력과 수고가 하루아침에 다 무너지는 것이 전쟁입니다.
네 번째로 전쟁은 무지(無知)입니다. 어리석고 미련한 짓입니다. 전쟁의 결과를 미리 알 수 있다면, 아는 사람이라면 전쟁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전쟁은 어리석고 미련한 인간들이 하는 못된 짓입니다. 독일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전쟁 후에는 세 가지의 대부대가 남는다. 불구의 대부대, 애곡의 대부대, 도적의 대부대가 그것들이다.' 부상당한 사람들이 생기고, 가족들을 잃어버려서 울고불고 통곡하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또한 도덕적으로 질서가 무너지기 때문에 도적이 난무합니다. 수고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공짜로 얻는 사람들이 많이 생깁니다.
전쟁은 혼란을 일으킵니다. 가치관의 엄청난 혼란을 가져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안다면 왜 전쟁을 하겠습니까 전쟁에는 승자가 없습니다. 오늘날도 보십시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승자가 없습니다. 이겨본들 허무합니다. 빼앗긴 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쟁 뒤에는 승자가 없는 잿더미만 남을 뿐입니다. 그런데 잿더미 위에 앉을 수밖에 없는 이 전쟁을 왜 하는 것입니까 무지하고 몽매하며, 그 위에 고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욱 중요한 정의가 있습니다. 전쟁은 메시야니즘(Messianism) 입니다. 모두들 자기가 메시야라고 주장합니다.
독재자들마다 다 '내가 메시야다, 내가 그리스도다'-나야말로 정당하고 의롭다 하면서 이데올로기적인 약속을 제시합니다. 더 밝은 세계, 더 잘사는 세계, 더 강한 나라, 더 새로운 질서를 약속하면서 집단폭력을 정당화합니다. 이것이 전쟁입니다. 독재자들이 전쟁할 때마다 꼭 내세우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가 가장 정의를 위하고, 나라를 위하고, 민족을 위하고, 세계를 위한다고 합니다. 그런 소리를 하지 않는 독재자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얼렁뚱땅 폭력을 정당화합니다. 이와 같은 메시야니즘이 전쟁의 원인이 됩니다. 이것은 불 신앙적인 공리주의입니다. 적은 사람을 죽여서 많은 사람을 살리겠다는 것입니다. 적은 손해를 만들어 큰 이득을 얻겠다는 논리입니다. 이러한 공리주의가 정당화하는 것이 바로 전쟁이라고 하는 사건입니다.
전쟁에 대한 기독교 교리를 살펴보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절대평화주의입니다. 이것은 초대교회에 있었던 사상으로 무저항주의입니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억울하게 원형극장에서 순교를 당하였으나 그 누구도 얼굴 하나 찌푸리지 않았습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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