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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치지 않는 고통 (롬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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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아버지가 회갑을 당하여 수연 잔치를 열었다고 합니다. 잔치에는 그 아버지의 친구들이 많이 초대되었고 푸짐한 음식과 풍유는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때에 그 아버지의 친구들은 회갑을 당하는 친구를 진심으로 축하하고 또 부러워하기도 하면서 이처럼 큰 잔치를 마련하여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는 효성 있는 아들에 대하여 칭찬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갑을 맞은 주인공인 아버지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면서 계속 슬퍼하고 있더랍니다. 그 이유는 이 아버지에게 아들이 둘이 있는데 그의 큰아들이 불량한 자식이 되어 아버지를 거역하며 방탕하고 동생과도 불화 하다가 집을 나가 버렸는데 몇 년 동안이나 소식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동생이 아버지를 모셨고 이 잔치도 둘째 아들인 동생이 베푼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매일처럼 오늘이나 돌아오려나 하고 기다렸으나 끝내 큰아들은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동생은 효자로써 아버지의 괴롭고 슬픈 마음을 알고 그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하여서 아버지를 위로하였습니다. "둘째 아들인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제가 맏아들 몫까지 다 하겠습니다. 집나간 형님은 잊어버리십시오!"라고 말씀드렸으나 그 아버지는 가슴 깊이 슬퍼하면서 위로를 받지 못한 채 울고 계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집 나간 불량한 그 아들도 아버지에게는 소중한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아버지로서는 모든 자녀, 온 식구가 함께 모여 있어야만 기뻐할 수 있고 잔치가 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고통과 그에 따르는 근심은 사실상 실존적인 것입니다. 문제는 어떠한 고통을 당하며 무엇을 생각하면서 근심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될 따름입니다. 그 누구에게도 언제나 고통과 근심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고통과 근심의 종류와 그 방향이 그 인간의 인간됨의 가치와 그 인간의 값을 결정하여 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가령 어떤 사람은 물질만 생각하며 그것만을 위하여 근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 입는 것, 사는 것 등 육신에 속한 일에만 신경을 쓰면서 그것이 있으면 성공이요, 없으면 실패로 아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먹으면 더 잘 먹기 위해서 근심하고, 입었으면 더 잘 입어야 하겠기에 걱정하면서 사는 그러한 인간상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동물적인 고통에 매여서 동물적인 근심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현재에 속한 일만 염려하는 것을 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깊은 면에는 전혀 고려함이 없이 보이는 대로 판단하고 언제나 순간적이며 찰라적인 향락을 위하여 근심하며 사는 인간상을 말합니다. 어린애들이 당장 입에 들어가는 것이 있으면 기뻐하고, 없으면 울 듯이 순간적인 만족을 추구하려고 고통을 당하며 사는 가련한 사람을 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극단적으로 자기 중심 주의적인 고통과 근심에 얽매여 사는 것을 볼 수도 있습니다. 자기와 자기의 자녀 그들의 안일만을 염려하며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정식품을 만들어 팔아서 돈을 벌려는 사람은 곧 이러한 이기적인 인간일 것입니다. 남이야 이것을 먹고 죽든지 살든지 상관할 바 없이 오직 나만 돈을 벌어서 잘 살면 그만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사회도, 민족도, 세계도 알 바가 아닙니다. 오로지 자기만 살면 된다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고통도 근심도 완전히 자기 중심적인 것입니다.
자기의 명예, 자기의 위신, 자기의 체면만 위할 뿐이어서 이것들이 손해 볼세라 괴롭고, 이것들이 잘못될 세라 근심하며 사는 인간이 있습니다. 돈만을 중심하는 사람에 비하여 체면이나 위신을 생각하는 자는 좀 나은 것 같이 보일지 모르지마는 실상은 자기 중심적인 입장에서 보면 저속하기 매일 반입니다.
보다 참신한 인간은 이웃을 위하여 근심할 줄 알며 나의 일 아닌 남의 일 때문에 고통을 느낄 줄 아는 자라고 생각합니다.
어린 애가 아플 때 어머니는 같이 아파하며 자녀가 근심에 쌓였을 때 같이 슬퍼하는 것이 어머니의 귀한 사랑이요, 마음씨가 아닙니까 여기에 참 인간의 아름다움이 있는 것입니다. 나는 먹었으나 굶주린 사람이 생각나서 배부름이 없고, 내게는 풍족한 음식이 있으나 가난하여 배고프고, 고생하는 그들을 생각하여 차려진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없는 그 사람이 참 인간일 것입니다.
적어도 집 나간 자식 생각 때문에 진수성찬도 목이 메어 넘어가지 아니하며, 굶주리는 이웃이 생각나서 음식을 먹을 수가 없고, 헐벗고 추위에 떠는 이웃을 생각하면 더운 방에 편히 누웠어도 잠이 오지 아니하는 그러한 사람이 참 인간일 것입니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하심은 하나의 명령이기 이전에 인간실존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해야 인간이고 사랑함으로써만이 인간이 인간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가장 마땅한 인간의 모습인 줄로 생각합니다. 이웃이 이웃만이 아닙니다. 그는 곧 나 자신인 것입니다. 이웃의 괴로움이 드디어 몇 시간 후에는 곧 나의 괴로움으로 부딪치게 되며 이웃의 근심은 곧 나의 근심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자기 중심적으로 이웃을 보았으나 사마리아 사람은 이웃을 중심으로 이웃을 보았다는 점입니다. 제사장은 내가 저 사람을 도와주면 내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였고 사마리아 사람은 내가 저 사람을 안도와 준다면 저 사람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한 것이라고 보아집니다. 이렇듯이 이웃을 염려하여 고통도 함께 당하고 근심도 같이 할 수 있는 그 인간만이 진실한 의미에서 참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좀더 높은 차원에서의 참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고통을 참고 근심도 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물질이야 있든 없든 명예야 있건 없건 간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근심하면서 만약 이것을 이루지 못하였을 때는 고통을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사회 정의를 근심하며 하나님의 뜻을 먼저 염려하는 그러한 인간 말입니다. 번영보다 정의를 염려하며 생산보다 진리를 위해 더욱 근심하고,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보다 선하게 살기를 바라는 그러한 인간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그의 나라를 위하여 고통을 당하며, 눈물도 흘리며, 뼈아픈 근심도 할 수 있어야 참 인간이 될 것입니다. 나의 이름을 염려하기 보다 하나님의 이름을 염려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모세는 죄로 인하여 멸망하게 된 그 민족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하게 하시려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 멸망할 만한 죄가 있어서 망하는 민족을 염려하기보다 이로 인하여 손해보게 되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근심하였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한 염려와 그 실현을 위한 고통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좀더 나아가서 영원한 미래와 신령한 것을 위하여 고통을 당하며 근심도 하는 그러한 인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외형과 형식으로 나타난 것들을 위한 염려가 아니라 그 깊이에 흐르는 것, 그리고 신령한 것을 위하여 염려할 줄 아는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현재는 평안합니다. 그러나 끝날에 벌거숭이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할 것을 오늘 생각하며 미래를 현재로 살 줄 아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신앙인은 장차 받을 형벌을 생각하여 현재의 죄된 향락이 저주스럽고 괴롭게만 느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감람산에 올라가시어 현재는 평화스러운 예루살렘성이지만 장차 받을 멸망을 생각하여 우셨습니다. 반대로 비록 현재는 괴로우나 장차 받을 영광을 생각하여 오늘의 의로운 고난과 진리를 위한 희생적인 수고들이 자랑스럽게만 느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장차 받을 영광과 현재의 고난은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7장 10절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원을 이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생명에 이르는 근심과 영광에 이르는 고통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근심을 보십시다. 그는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의 고통은 먹기 위한 것도, 입기 위함도 아니며 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한 것도 아니요 더구나 자기 하나가 잘 살게 되거나 생존경쟁에서 명예롭게 살아남기 위한 고통이 결코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고통과 근심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그치지 않는 고통은 그의 골육친척 곧 그의 동족을 위한 것이었으며 그들의 생계를 위한 것이거나 번영을 위한 고통이 아니라 그들의 영원한 생명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전도 여행 중에서 언제나 안식일이면 그의 동족이 모이는 회당을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의 박해를 받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는 본래 극렬적인 바리새 교인이었습니다. 결국은 옛 동지요, 친구였던 바리새교인들로부터 박해를 받아야 했습니다. 매를 맞고, 옥에 갇히고 여러 번 죽을 일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 그의 골육친척을 생각하였고 그들을 사랑하였으며 그들의 영혼을 위하여 그치지 않는 고통이 그에게는 있었습니다. 배척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면서도 그의 민족을 잊을 수가 없었고 애틋한 마음으로 사랑할 뿐이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민족애이며 신앙적인 애국심이기도 하였습니다.
소련의 이방 작가인 솔제니친은 여러해 동안 옥고를 치른 뒤 마침내 고국에서 추방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버린 고국을 버리지 못하여 이 나라 저 나라를 여행하면서 안착할 곳을 찾지 못한 채 괴로워하는 모습을 신문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민족을 사랑하지 아니하는 교인은 신자가 아니며 나라를 사랑할 줄 모르는 신자는 참된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민족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는 사랑하되 자기의 생명보다도 더욱 사랑하였습니다. 로마서 8장 35절에서 바울은 그 누구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자기를 끊을 수 없다고 증거 하였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그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언정"원하는 바라고 그의 뜨거운 사랑을 표현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이는 의미심장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언정" 그 얼마나 간절한 소원의 표현입니까 그 민족의 장래를 위하는 마음과 그 민족이 그리스도에게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에게는 최고의 고통이며 최대의 소원이었던 것입니다.
육신의 어떤 고통이나 심지어는 육신의 죽음, 즉 목숨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까지 건 최대의 소원이었습니다. 그토록 그는 민족을 사랑하였으며 애타는 열정으로 그 민족의 구원을 바라고 또 힘썼습니다. 그는 이방인의 사도였습니다. 이방 나라에 다니며 이방인에게 전도하면서도 그는 늘 고국을 생각하였습니다. 고국에 흉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가는 곳마다 연보를 요청하여 예루살렘으로 보내었으며 나아가서는 큰 위험이 따르고 있는 것을 잘 알면서도 친히 연보를 가지고 돌아왔다가 이로 인하여 체포되고 옥고를 치르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되 그들의 장래를 걱정하면서 그들의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근심한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에게 생명이 있는 것을 알고 있는 바울로서는 그의 민족이 그리스도께 돌아와야만 살 것임을 분명히 믿었고 이 절대적인 소원 때문에 그는 그치지 않는 고통을 겪어야 했던 것입니다. 죄를 짖고 회개하지 않는 민족, 율법적인 교만에 매여서 그리스도를 영접지 않는 완악한 골육친척을 근심하며 큰 고통을 당하여야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단순한 감상에 젖은 애국을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민족과 그 골육이 그리스도께 돌아오기 위함이라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희생이라도 지불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최대의 희생을 뜻합니다. 바울에게 있어 그리스도는 그의 생명보다도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민족을 구하는 길이라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 지옥으로 떨어지는 희생이라도 할 수만 있으면 지불하겠다는 것이 그의 간절한 소원이었습니다.
31운동은 기독교인들의 애국심을 보여준 가장 귀한 운동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더러는 천도교니 불교니 하고 그 운동의 주동자를 논합니다만 결과를 보아서 그 운동이 누구의 운동이었던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31운동 때에 학살당한 자는 천주교인이 1,416명, 장로교인이 1,461명, 감리교인이 465명, 무종교인이 213명, 기타가 207명이며 교회당 47개 처소가 파괴당하였습니다.
어찌하여 대다수의 기독교인만이 희생이 되었습니까 이것은 이 운동이 곧 기독교인의 운동이었다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진실한 애국은 오직 신앙에서만이 가능하며 목숨을 바치는 희생적 애국은 부활을 믿는 기독교인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애국은 참 애국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역사의 심판을 믿으며 정의와 진리의 최후 승리를 확신하고 참 자유의 승리를 믿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개인의 심령을 소중히 여기는 해방과 구원의 종교입니다.
자유와 진리의 종교입니다. 그리고 생명의 종교입니다.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소망과 하나님의 진실한 약속을 믿는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믿음 안에서만이 참된 애국과 애족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상재 선생님(31운동 때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신 분)께 일본 형사가 "누가 시켰소"라고 물을 때 그는 대답하시기를 "하나님이 시켰소."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분명한 대답입니까
이 민족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고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신앙 안에서 위대한 애국 운동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어떤 희생을 지불해서라도 이 막중한 사명을 다 하여야 하겠습니다. 내가 나의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힘쓰는 것보다도 더 큰 수고와 희생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 같은 희생이 있을 때 민족도 살겠고, 또한 자신도 살 것입니다. 이 민족의 영원한 앞길에 영광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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