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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긍정적 신앙의 표본 (벧전 02: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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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중앙부를 관류하는 미시시피 강(the Mississippi)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긴 강입니다. 그 강을 따라서 배로 여행하던 한 여행자가 지루하던 나머지 선장에게 말을 겁니다. "이 강의 발원지가 어디입니까" 선장은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이 강의 하구는 어디입니까" 그것도 모른다고 선장은 대답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어디쯤이 깊고 얕은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얕은 데로 잘못 가다가는 배가 좌초됩니다. 그래서 깊은 데를 따라서 항해하고 있습니다. 또 한가지, 나는 내가 출발한 항구와 가야 할 항구를 알고 있습니다. 내가 아는 것은 그뿐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깨우쳐줍니다. 우리는 알고 싶은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도 많습니다.
그러나 정작 알아야 할 일은 모르고 삽니다. 해야 할 일, 가야 할 길은 알지 못합니다. 정작 중요한 문제요 정작 소중한 일은 잊어버리고 삽니다.
세상에는 확실히 고난이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그 원인을 알고 싶어합니다. 형이상학적인 그 복잡한 문제로 머리를 싸매고 생각해봅니다마는 죽을 때까지도 그 원인을 다 찾을 수가 없습니다.
또 우리는 고난의 결과를 알고 싶어합니다. 도대체 이 많은 고난의 마지막이 어떤 것일까-죽을 때까지 생각해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간혹 오늘 당하고 있는 고난이 너무 극심하여 '말세다' '끝장이다' '파국이다'하고 위기임을 운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마는 어디 오늘에만 그렇습니까 이것저것 책도 읽고 남의 이야기도 듣습니다마는 그렇게 우왕좌왕 살필 것도 없습니다. 성경을 읽어보십시다. 창세기부터 하나하나 빠뜨리지 말고 다 읽어보십시다. 절절이 고난의 역사임을 알게 됩니다. 욥기가 그렇고 시편이 그렇고 예언서가 그렇습니다. 이 책들은 삼천 년 전에 기록된 것입니다. 그 당시에 이미 그랬으니 지금에 와서 그렇다고 새삼스러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대하(大河)처럼 유유히 흐르는 역사 속의 한 싯점을 내가 차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문제는 자세입니다. 내게 이 많은 고난이 있지만, 과연 내가 긍정적으로 임하느냐 부정적으로 임하느냐입니다. 혹은 신앙적으로 대처하느냐 불신앙적으로 대처하느냐의 문제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알려고 해도 다 알지 못합니다. 다 알 필요도 없습니다. 다 경험하지도 못합니다. 물론 경험할 필요도 없습니다. 결국은 믿고 사는 것입니다. 한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시장에 나왔습니다. 처음 보는 것과 신기한 것이 하도 많아서 어머니의 치마꼬리를 붙들고 자꾸 물어봅니다. "이게 뭐예요" "저게 뭐예요" "이건 어떻게 만든 거예요" 처음에는 교육적인 차원에서 친절하게 대답해줍니다. 열심으로 설명해주었습니다마는 알 필요조차 없는 것까지 질문을 해대니 나중에는 그만 지치고 맙니다. "이 녀석아, 너는 이 엄마의 손을 꼭 잡고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 제발 손만 놓지 말아라." 우리의 인생사는 것이 그렇습니다. 주님의 손만 꼭 붙들고 있으면 되었지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합니까 이것을 알고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도피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는 길은 바로 그 깊은 뜻을 아는 데에 있습니다. 그 약속을 믿고 살아가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 그 엄청난 경륜, 그리고 나를 향한 철저한 사랑-이것만 알고 믿으면 문제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십니다. 저들에게 광야 40년의 모진 고생을 주셨을 때, 저들은 감당하기가 어려워서 원망도 하고 불평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고생을 왜 주셨습니까 아시다시피 꼭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필요하기 때문에 정하신 코스입니다. 그런 코스를 거쳐 마침내는 가나안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면 이 고생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바가 무엇이었습니까 '나를 믿으라'-믿음을 가르치시고자 함입니다. '내가 약속한 땅, 저 가나안땅을 믿으라'-끝까지 가나안땅을 믿도록, 그곳을 향해 일심으로 가도록 하기 위하여 그러한 사건들을 있게 하셨습니다. 어느 책엔가 꽤 익살스런 이야기가 나옵디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광야를 지나지 않습니까 기왕이면 사우디처럼 기름이 많이 나는 곳에 정착할 것이지 왜 가나안으로 갔는지 모르겠다, 그 광야에서 기름이 많이 날 것을 알고 그곳에 그냥 머물렀더라면 참으로 좋을 뻔하였다, 모세가 큰 실수를 하였다-이런 이야기올시다마는 문제는 가나안입니다. 가나안의 약속만 믿으면 오늘의 이 고생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노예제도가 있던 시절에 주신 교훈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를 가리켜 '생명 있는 도구'라고 했습니다. 개 돼지나 마소처럼 부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노예가 받은 고난은 인간 고난의 대표적인 것이요 상징적인 것이요 극치입니다. 노예가 겪은 고난은 오늘에 그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고난입니다. 로마를 방문해보면 2천 년 전에 지어진 엄청난 건축물들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원형극장을 비롯한 많은 시설물들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로 치자면 천 오 백 년 전이라야 고작 신라 때입니다. 이야기가 안됩니다. 2천 년 전의 이 엄청난 역사(役事)는 한 마디로 말해서 노예문화의 산물입니다. 지금처럼 높은 임금(賃金)을 치러가면서 지으려 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아무도 이룩하지 못합니다. 노예들을 죽여가면서 그들의 노동력을 이용했던 것입니다. 결국 이 지나친 노예 착취로 말미암아 로마는 멸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노예 인구가 전체의 3분의 1이 넘었습니다. 자유인이 3분의 1이요, 나머지가 로마시민이었습니다. 노예를 부리면 편리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점점 늘려 가다보니 마침내 그 노예 때문에 로마는 무너지고 맙니다. 반란이 일어나고 곳곳에서 무서운 일들이 속출합니다.
기독교가 로마에 들어간 것은 그런 무렵입니다. 많은 계층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습니다마는 특별히 노예들이 예수를 믿습니다. 그 주인들이 깜짝 놀랍니다. 예수 믿는 노예는 순종을 잘하고 온유합니다. 저희들끼리 모여서 기도회를 가질 때마다 특별히 포악한 주인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주인을 사랑하고 주인을 위해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침내 저들의 마음이 돌아섭니다. 로마제국이 붕괴되고 기독교가 로마를 정복합니다. 마침내 로마가 기독교국가로 된 것은 여러분도 아시지 않습니까 이 큰 변화의 보이지 않는 절대적 공로자가 기독교인 노예들입니다. 그 변화는 사랑의 승리요 의의 승리요 신앙의 승리였던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노예가 당하는 고난을 세 가지로 나누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 때문에 당하는 고난, 애매히 당하는 고난, 선택적으로 당하는 고난입니다. 어떤 성격의 고난이냐고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종합적으로 말하면 이것을 어떻게 감당하느냐가 문제입니다. 긍정적으로 믿음으로 받아 감당하고 참으면 창조적인 능력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진리가 이것입니다.
첫째, 죄가 있어서 당하는 고난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잘못으로 인하여 내가 당하는 고난입니다. 형벌이요 보응(報應)이요 심판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대체로 이렇습니다. 내 잘못 때문에 당하는 것입니다. 아니라고 합니다마는 다 쓸데없는 소리입니다. 내가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란 대개 나로 인한 것임에도 사람들은 억울하게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원인이 다른 사람에게 있다, 사회에 있다, 세상에 있다고 밀어붙이기 일쑤입니다.
여기에 대처하는 길은 회개뿐입니다. 내 잘못으로, 내 죄로 인하여 당하는 고난이기에 회개하는 길밖에 길이 없습니다. 회개가 필요할 뿐입니다. 회개는 고통을 축복으로 바꾸어줍니다. 비록 내 잘못으로 당하는 고난이지만 그 가운데서 겸손을 얻고 진실을 찾고 믿음을 얻을 수만 있다면 그 고난은 엄청난 축복이 됩니다.
우리는 남의 경우이건 내 경우이건 얼마든지 이런 간증을 할 수 있습니다. "잘못은 내게 있으나 그 고난 중에서 비로소 나 자신을 찾을 수 있었으며, 하나님 앞에 바로 돌아올 수 있었다." 탕자가 집을 나가서 고생하는 것은 자기 잘못입니다. 그러나 굶어죽게 되었을 때에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옵니다. 고난이 주는 축복입니다. 회개만 있으면 모든 고난은 축복의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늘(사 1:5, 6)"-고난을 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랑의 매요, 교육의 매요, 그 깊은 곳에 신비한 약속이 있는 매라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매맞으면 아프기만 해서 어떻게든 안맞으려고 했습니다마는 철이 들면서 그 매맞은 것이 참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저는 어머니로부터는 맞은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마는 아버지로부터는 많이 맞았습니다. 왜 이렇게 때리실까 불평불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저를 때리면서 아버지가 우신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그 매가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때에는 그 매가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매의 뜻을 알고 회개만 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축복이 없습니다.
둘째, 애매히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애매히'-헬라어로는 '아디코스'이며 영어로는 'unjustly'입니다. 불공정하게 불의 하게 부당하게 당하는 것입니다. 왜 이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그 의미를 모릅니다. 그저 당할 뿐입니다. 사랑하는 친구의 사업 보증을 섰다가 집을 날리는 사람도 많습니다. 남 때문에 왜 이런 고생을 해야 합니까 이웃집에서 불이 나 내 집까지 타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억울함이 어디에 있습니까 다른 사람의 일에 어쩌다 말려 들어가서 정말 무모하게 무의미하게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말씀합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19절)"-아름답다는 말은 은혜가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한다,' 헬라어로는 '디아 쑤네이데씬'입니다마는 여기에는 좀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 '쑤네이데씬'에는 '양심'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헬라어에서 양심이라 함은 감정의 요소가 아니라 지성의 요소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양심, 하나님 앞에서 나를 생각하는 양심, 그 양심을 가지고 생각하면서 참으라는 것입니다. 바른 은혜를 생각하고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생각하고 하나님 앞의 내 존재를 생각하면서 이 고난을 참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참으면 은혜가 됩니다. 나는 그 의미를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 나로서는 의미를 모르지만 하나님께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우연이 있으나 하나님께는 우연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우연적 사건(accident)이 있지만 하나님께는 섭리가 있을 뿐입니다. 나는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있어야 하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께는 분명히 뜻과 경륜이 있습니다. 이 점을 믿고 참는다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은혜가 됩니다. 이는 결코 무저항주의가 아니요 사랑주의입니다. 박애주의가 아니요 신앙주의입니다.
여러분, 바이올린을 아십니까 저는 가끔 오케스트라를 들으러 갑니다마는 갈 때마다 제일 신경에 거슬리는 것이 막이 오르기 전에 삑삑거리면서 조율하는 소리입니다. 참 못마땅합니다. 미리 준비해놓고 있으면 안되나 하는 생각이 늘상 듭니다. 그 시간에야 줄을 바짝 죄면서 조율을 합니다. 줄이 끊어지라고 죄는 것이 아닙니다. 죄어야 아름다운 소리가 나기 때문입니다. 아시는대로 느슨하게 풀어져 있으면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습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몸과 정신을 바짝 긴장시켜야 아름다운 반향이 납니다.
느슨하면 썩어버립니다. 사람 잘못되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속물이 됩니다. 안정이다, 평화다, 무환(無患)이다, 번영이다 하고 외칩니다마는 번영이 먼저 되면 다 멸망하고 맙니다. 정신부터 차려야 합니다. 오늘,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간혹 우리가 왜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참으면 은혜가 될 것입니다.
셋째, 선택적으로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선을 행함으로 당하는 고난입니다. 최고의 가치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 동기가 선하고 인식적입니다. 알고 당한 것이지 모르고 당한 것이 아닙니다. 불가피적인 것이 아닙니다. 선택적인 것이요 자원적인 것입니다. 선택적 고난만이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쿠오바디스'라는 작품을 아실 것입니다. 로마에 갔을 때, 저는 그 작품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는 장소를 찾아갔었습니다. 거기에는 베드로의 것이라고 하는 발자국이 새겨져 있습니다마는 사실 여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저는 거기에 서서 한참을 생각해보았습니다. 베드로가 네로 황제의 핍박을 피하여 도망가려고 성밖으로 나가 언덕 위에 올라섰을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로마를 향하여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쿠오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베드로가 묻습니다. "너를 대신하여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러 로마로 간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자 베드로는 아차하고 몸을 돌립니다. "주여, 제가 가겠습니다." 그는 발길을 돌려 로마로 되 들어갔으며, 끝내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합니다. 자원적인 것입니다. 할 수 없어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이요 신앙 때문이요 진리 때문입니다. 얼마든지 피할 수 있습니다마는 피하지 않고 자원해서 당하는 그러한 고난이 몇 가지나 있습니까 그런 고난만이 의미가 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고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의를 위하여 자청하는 고난이어야 합니다. 피해가다 피해가다 할 수 없어서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을 행함으로 당하는 선택적이요 자원적인 고난에 하나님께로서 축복의 약속이 있습니다. 노예적인 고난이 아니요 주인된 고난입니다. 죄인이 당하는 형벌적인 고난이 아니요 크리스찬의 주권적인 고난입니다. 시험이나 징계적인 고난이 아니요 선교적인 고난입니다. 고난을 당할 줄 아는 데에 모든 승리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특별히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로 들어서 표를 삼았다는 말씀을 합니다.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21절)." 본을 보이시어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시는 모습을 잠깐 생각해보십시다. 본문에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가 고난을 당하시나 결코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다. 고난을 당하는 사람은 자신이 짓는 죄가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워낙 가난하니까 도둑질해도 괜찮다' '억울하니까 욕을 해도 된다' '모진 고생을 했기 때문에 반항을 해도 된다'라는 말을 합니다. 맞았으니까 때려도 된다는 것입니다. 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지으시지 않았습니다. 어떠한 고난을 당할지라도 죄를 지을 수 있는 정당한 권리는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 죄가 내가 당하는 수난으로 말미암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정상(情狀) 참작이란 없습니다. 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40일을 굶으셨습니다마는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였습니다. 40일이나 굶었으니 이제 무슨 일을 해도 된다는 이야기는 성경적이 아닙니다.
둘째로 입에 궤사(詭詐)도 없으셨습니다. 꾀를 내어 피하려 들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구차하게 고난을 면하려고 비겁한 말을 입에 담지 않으셨습니다. 쓸데없는 말, 마음에 없는 일, 비겁한 행동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아무리 고난을 당해도 끝까지 당당하게 당할 것이요, 구차한 변명이나 행동을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절대로 비굴해지지 말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고난 당하는 모습입니다.
셋째로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시지 아니하셨습니다. 고난 당할 때에 대항할 힘이 없으면 욕이라도 합니다. 이 또한 잘못입니다. 좀 미안한 이야기입니다 마는 가끔 남편에게 매를 맞고 억울해서 분해서 목사를 찾아와 하소연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폭군이다, 속물이다, 고약한 사람이다 하고 갖은 욕을 다합니다. 저는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웃기만 합니다. 그리고 다 듣고 나서 마지막으로 한마디 묻습니다. "맞을 때에 조용히 맞았소" 죽여라하고 대들었답니다. "죽이라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조금 때리고 만 것을 보니 그만하면 자비로운 사람이 아닙니까" 여러분, 생각해보십시다. 내가 고난을 당할 때 대신 욕하지는 않았습니까 한탄하고 한을 품고 저주하고 욕하고 신세타령이나 하면서 무슨 고난을 당했다는 것입니까 물리적인 고난은 당했을는지 몰라도 정신적으로 당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고난을 당한 일이 없습니다. 자기 할 바를 다했습니다마는 예수님께서는 억울한 고난을 당하시면 서도 대신 욕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미워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넷째로, 위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은 이렇지만 두고보자, 말세에 다 지옥으로 보내겠다-절대로 위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고난 당할 때에 보면 한을 품는 경우가 많습니다. 언젠가는 보복을 하리라-이런 생각을 한다면 고난 당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위협하지도 말고 한을 품지도 말 것입니다. 물론 미워해서도 안됩니다. 스데반을 보십시오. 돌에 맞아죽으면서도 죽이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복을 빕니다.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고난 당하는 모습이요, 이 본을 따라갈 때에만 거기에 승리의 약속이 있습니다.
다섯째로,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에게 부탁하시었습니다.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당신이 어떻게 되건 저 사람이 어떻게 되건 모두 하나님께 의탁하십니다.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에도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핍박을 받아도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복을 빌라' 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 당하는 참된 모습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재판하던 빌라도가 이런 모습에 납득이 가지 않자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이 사람을 보라(Behold this man.)-뭐, 이런 사람이 다 있단 말인가! 어찌 이리도 죽음 앞에서 태연할 수 있단말인가! 내가 너를 살릴 수 있으니 내게 부탁이라도 해봐라." 그러나 부탁하시지 않습니다. 구차한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다. 누구 때문이라고 변명하시지 않습니다. 미워 하시지도 않습니다. 빌라도는 이런 예수님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정신적으로 예수님께 완전히 굴복 당하는 모습을 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우리로 그 본을 따라오게 하셨습니다.
'본'이란 헬라어 원뜻대로 하면 '습자본'을 말합니다. 글씨를 쓸 때에 본이 있지 않습니까 밑 글씨를 따라 쓰면서 공부를 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가신 그 길을, 그 본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부활의 아침이 있고 영광의 세계가 있습니다. 승리는 고통의 의미를 아는 데에 있고 고통의 의미를 바꾸는 데에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신앙적으로 대하는 그 자세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갈 때에 더 강해질 수 있고 승리할 수 있고 영광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야고보는 말씀합니다.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약 1:2, 12)"-이 길을 분명히 알고 이 길에 굳게 서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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