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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롯의 처를 생각하라 (눅 17: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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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시간에 대하여 세 가지의 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가 시간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노력과 수고만 한다면 나는 얼마든지 건강하게 오래도록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의학과 유전공학의 발달에 막연히 기대를 걸고는 '이대로만 나간다면 어떠한 불치병도 치유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는 늙지 않는 방법도 개발될 것이다'--나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끊임없이 생각을 몰고 갑니다. 막연한 것에 기대를 걸고 살기를 좋아하는 성향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착각에 빠지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시간은 돌고도는 것이라고 생각하려듭니다. 윤회설에 근거한 철학입니다. '이대로 있기만 하면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흔히 거짓이면서 참말로 통하는 것 가운데 회춘(回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어디에 회춘이 있습니까 좀더 나은 쪽으로 회전해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셋째로, 시간은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thrown life'--'던져진 생을 산다'는 하이데거의 말처럼 나에게는 아무런 생활도 없고 다만 주어진 제한된 시간을 던져진 듯 살아갈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생을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도 과거지향적으로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현재에 집착하여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미래지향적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인의 시간관이 그러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하나님께서 섭리하시고 경륜하시며, 하나님께서 끝내시고 심판하실 것임을 믿고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시간은 온전히 하나님의 것이 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마는 특별히 얼마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있다손 치더라도 시간만큼은 하나님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부득불 하나님의 계획표, 하나님의 시간표에 맞추어 나의 마음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할 수 없습니다. 시간은 from God, by God, into God하나님의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인자의 날"이라고 하는 종말론적인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종말론적입니다. 모두가 종말론적 윤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종말론에 중심을 두고 사역하시고 가르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이상스러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로마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독재자나 기독교 박해자들은 기독교의 종말론을 하나같이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심지어 어떤 독재자는 이런 말까지 공공연히 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머리를 그리스도라 말하지 말라. 교회의 머리는 왕이요 공산당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주인은 그리스도'라는 말을 싫어할 뿐더러 아예 금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 재림'이라는 말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세상의 끝이 있을 것이라는 말도 싫어합니다. 거기에는 그럴 말한 이유가 있습니다. 혁명하고 투쟁하여 유토피아의 세계, 이상적인 세계를 구축해나갈 터인데 세상 끝 날이라니 얼토당토않다는 말입니다. 예수의 재림이라느니, 세상의 종말이라느니 하는 말이 전혀 가당치도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금지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면서 어느 정도 기독교의 자유를 허락하면서 내놓은 금령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같은 종말론적 메시지로는 설교를 하지 말라는 그것입니다.
그럼에도 이천 년 동안 변하지 않고 이어져내려온 것이 있습니다.
순순하게 바른 신앙을 지켜가는 그리스도인은 한결같이 그 근본을 종말론에 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공산치하로부터 온 편지를 보면 그 서두가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일반적으로 제가 받는 편지는 '목사님, 은혜 가운데 평안하십니까'라는 인사말로 시작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공산치하의 고난 가운데 있는 한 그리스도인이 제 방송을 듣고 멀리서 감사로 써보낸 편지는 '주님 오시는 날이 가까운 때에 목사님 안녕하십니까'라는 인사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은혜로운 말입니까 편지 내용 전체가 종말론적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간단한 말씀 가운데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 가운데서 가장 핵심적인 말씀입니다. 인자의 날에, 이 세상 끝 날에, 세상 모든 사람들이 심판 받을 때에 심판과 동시에 믿는 사람에 대한 구원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심판과 구원이 동시적으로, 그리스도의 거룩한 능력 안에서, 그 권세 안에서 이루어질 것임을 밝히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세상이 잘못되어서가 아닙니다. 역사적인 발전단계가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중심은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주님이 재림하면서 세상은 끝나겠다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종말론을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본문에서는 예로 노아의 홍수와 소돔 고모라의 멸망을 들고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 때와 같이, 롯의 때와 같이 사람들은 끝나는 그 날까지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심고 집을 짓고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때는 반드시 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두 역사적인 사건을 들어 예표적으로 상징적으로 예언적으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본문말씀을 순수하게 이해해보십시다. 현재적이면서 종말론적인 말씀입니다. 왜 노아의 홍수가 있었습니까 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 있었습니까 그 까닭은 간단합니다. 첫째로 죄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 물자가 부족했던 것이 아닙니다. 모두들 풍요한 생활을 했습니다. 개인이건 민족이건 국가건 죄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 가난한 것도 죄 때문이요 병든 것도 죄 때문입니다.
숱한 혼란과 무질서가 모두 죄 때문입니다. 분명하지 않습니까 이 세대가 살기 어려워진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물자가 부족합니까, 기술이 부족합니까, 지식이 모자랍니까 바로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둘째로, 회개하지 않았기에 망한 것입니다. 죄가 있다고 다 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의 말씀이 줄기차게 전해졌습니다마는 끝내 회개하지 않아서 망했습니다.
셋째로, 의인 없음으로 망했습니다. 몇 명의 의인이라도 있으면 그 의인을 보시고 형(形)을 유예해주실 것입니다. 심판을 연기해주실 수 있으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의인이 없습니다. 예레미야 5장에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赦)하리라(1절)."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의인이 한 사람도 없을 때에 그 성은 망하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구원해내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성밖으로 이끌어내어 구원하시고 그 성을 멸망케 하십니다. 오늘의 본문에도 나와 있습니다마는 창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를 자세히 보십시다. 롯이 머뭇머뭇하면서 떠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천사가 롯과 그 아내와 두 딸의 손을 잡아 성밖으로 이끌어냅니다. 그런 후에 유황불을 내려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십니다.
결코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지 않으셨습니다. 반드시 의인, 곧 하나님의 사람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노아나 롯이나 온전한 의인은 아니었습니다마는 저렇듯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모든 것이 넉넉한 도시였습니다. 아름다운 도시요 매력 있는 도시입니다. 그러나 죄가 관영(貫盈)하여 망하게 됩니다. 일전 제가 뉴욕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한밤중에 목사님 몇 분과 뉴욕에서 제일로 죄악이 많다는 거리를 돌아보았습니다.
넥타이를 풀어놓고 잠바 차림으로 한바퀴를 죽 둘러보고 나니 그 자리를 빨리 빠져 나와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꼭 유황불이 떨어져 멸망하게 될 것만 같습니다. 꼴들인즉 사람이 아닙니다. 짐승도 그렇게까지 추잡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모습을 보시면서 얼마나 괴로우실까, 얼마나 참기 힘드실까 하는 생각마저 했습니다. 오늘도 많은 죄악이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롯은 구원을 받습니다. 그렇다고 롯이 구원을 받을만한 자격을 넉넉히 갖춘 사람인 것은 아닙니다. 시원치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천사를 영접하는 것까지는 좋았습니다만 그 천사들과 상관하겠다고 몰려온 성 사람들에게 결혼하지 않은 두 딸을 내놓지 않습니까 무슨 짓을 하든 너희 눈에 좋은 대로 행하라고 하는 롯이고보면 그도 소돔사람이 다 된 것입니다. 아주 죄악에 물들어버렸습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까 소도마이트(sodomite)--소돔사람을 말합니다. 이 말은 추잡하고 더러운 죄의 대명사로 쓰입니다. 곧 남색(男色), 수간(獸姦)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그러면, 이렇듯 더러운 도시에 물들어 있던 롯이 어떻게 구원을 받은 것입니까 긍정적인 시각으로 성경을 살펴보면 몇 가지의 근거가 없지는 않습니다.
먼저, 롯은 아브라함의 의로 살았습니다. 창세기 18장 22절로 보면 아브라함이 소돔을 멸하러 가는 천사를 붙들고 기도를 합니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하나님께서는 의인 오십을 찾으면 인구 5만이 되는 소돔과 고모라를 용서하겠다고 하십니다. 이어 아브라함은 5인이 모자라는 45인이면, 아니 40인, 30인, 20인, 마지막으로 10인을 찾으시면 어찌하시겠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내가 십 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도 더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 기도가 누구 때문이라는 것을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마는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조카 롯을 구해달라고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그 간절한 기도가 소돔 안에 사는 롯 때문인 것을 아십니다. 조카 아닌 할아버지라도 죄인이면 죽어야지 별 수 있습니까 '제 조카가 거기에D쵹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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