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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의 직원-목사 (엡 04: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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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교회에 가면 목사님이 계시다 교회는 다 그런 건가 보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그런 사고방식, 편리에 따라서 그런 것을 만들었나 보다 그런 생각을 하기가 쉽습니다. 만일에 성경 가운데 그런 언급이 전혀 없고 그런 이야기가 없다면 우리가 그런 제도를 만들어서는 안될 것이고 그런 것을 제대로 유지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만일에 그렇게 하는 것이 좋고 일을 하는데 아무렇게 하는데 유익이 된다 할지라도 성경 가운데 그런 분명한 말씀이 없으면 전혀 그런 제도를 만들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한마디로 말한다면 성경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원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성경의 사람들이다, 한 책의 사람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오해하면 안됩니다. 오직 한 책만을 읽는 사람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른 책을 하나도 안 읽고 성경책만 읽는 사람을 하나님이 원치도 않고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다른 모든 것도 읽고 생각하시고 하시되 늘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모든 것들을 다 규정해 나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교회의 어떤 제도가 있을 때에도 우리는 그것을 성경에서 뭐라고 규정하느냐에 따라서 생각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몇 주에 걸쳐서 장로님들, 집사님들을 세우신 주님의 뜻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서는 보다 본래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위에 오르셨었는데 위에 오르셨다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그가 땅에 내리셨던 적이 있었다는 것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위에 계시던 때,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먹고 마시고 울고 웃고 하시던 그때, 사람들을 가르치시던 그 때 이 땅에 계시셨던 그가 영원토록 이 땅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설명하고 계시냐면 “온 땅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하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가 오르셔서 온 땅을 충만케 한다고 하십니다. 그게 무슨 뜻일까 이 충만케 한다고 하는 말은 온 세상의 목적을 이룬다 또는 온 세상의 정해진 뜻을 다 이루어 낸다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던 그 본래적인 뜻을 달성하시기 위해서 그가 이 땅에 오시기도 하셨고 이 땅에 오르시기도 하셨습니다. 오르셨어도 가만 계시는게 아니라 그가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데 이 땅을 충만케 하시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이 땅을 충만케 하시는 그 일을 하면서 어떻게 하시는가 하면 주님께서 친히 그 일을 하시기도 하시지만 특별히 우리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그 일을 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일을 하시기를 원하셨는가 하면 오늘 본문에 보면 11절에서 부터 이 가운데서 목사와 교사라고 하는 말이 나오기 전까지 사도, 선지자, 복음전하는 자, 이 세가지 직분은 지금 우리들의 시대에는 없는 직분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늘에 오르셔서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직분 자로 세우셔서 온 세상을 충만케 하시는 일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은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베드로나 바울이나 또는 다른 모든 사도들을 세우셔서 온 세상의 교회가 그들의 가르침 위에 터 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벗어난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사도들이 어떻게 가르쳤는가, 왜냐하면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 하면 주께서 이 사람들을 세우셔서 온 세상을 충만케 하시는 일을 하늘에서 하고 계신다 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주님께서는 이제 온 세상에 교회가 시작될 때에 이런 선지자, 사도, 또 복음 전하는 자 이런 사람들을 세워 놓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어떤 특별한 시기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오늘날은 어떤 사람이 사도다 하고 나올 사람이 없습니다. 오직 그 시대에 있던 사도들만이 우리들의 사도인 것입니다. 1세기 때에 그 사람들이 사도였으면 20세기에도 그분들이 사도인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계속되면서 주님께서 늘 있게 하신 직책이 있습니다. 그 중에 두 가지는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뭐냐하면 장로라고 하는 직책과 집사라는 직책을 살펴보았습니다. 그것과 함께 교회가 있으면 늘 있도록 하신 직책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오늘 본문 가운데 나타난 목사와 교사라고 하는 직책입니다.
목사와 교사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주일학교 선생님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가” 뭐 그래도 좋겠죠. 그러나 이 본문의 뜻은 정확하게 말하면, 제일 좋은 뜻을 먼저 이야기하고 부차적인 뜻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일 좋은 뜻은 무엇이냐 하면 이 목사와 라고 하는 말이 목사, 즉 교사를 주셨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사의 직분이 무엇이냐 하면 가르치는 직분이다”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교회의 이 땅위에 세우시고 교회가 이 땅에서 그 목적을 잘 이루도록 하기 위해 주님께서 가르치는 직분을 우리 가운데 세워 주신 것입니다. 이게 참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다 모여들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얘기해 왔듯이 교회 안에는 젊은 사람들만 모인 교회 그것은 교회의 보편성이 없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여기는 젊은 사람들, 나이 많은 사람들, 어린아이들 다 교회에 와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 교회 안에서 주님께서 사람을 세워서 가르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학교에 가면 학생들은 다 어리고 선생님은 나이가 많으시니까 “가르친다” 하는 것이 당연스럽게 생각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는 나이가 많은 분들도 있고 나이가 적은 분들도 있고 그런데 어떻게 어떤 사람을 세워서 가르치도록 하셨는가. 그러나 그것이 주님의 뜻이면 우리가 그것을 잘 받아들여야 합니다. 무얼 가르치느냐, 자기가 자기의 지혜를 가르치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어떤 분이 “내가 목사니까 여러분은 나에게 배워야 합니다” 하면서 자기 생각을 다 가르치면 그것은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교회는 무엇하러 모인 공동체인가. 여기서 오늘 교회의 가장 중요한 측면 중의 한가지를 생각하게 되는데 교회는 우리가 별로 생각 안 해본 것이 있는데 교회는 가르침을 받는 공동체입니다. 그것은 목사와 모든 교인들이 다 같이 포함되어서 가르침을 받는 공동체입니다. 누가 가르치십니까 오직 하나님이 가르치십니다. 성령님께서 가르치십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아주 강조해 주셨습니다. 이 공동체는 내 주님에 의해서 가르침을 받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이 공동체가 가르침을 받지 아니하면 이 공동체는 주님의 뜻에 벗어난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린 언제나 이 면을 중요시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친히 가르치시는데 주님께서 어떤 제도를 내셨냐면 우리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을 목사로 세우셔서 가르치도록 하십니다. 그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왜 그렇게 하셨을까 이것이 참 궁금합니다. 그냥 주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면 좋을 텐데 왜 그렇게 하셨을까 그것은 옛날서부터 많은 사람들이 궁금하게 여겨왔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시지요” 옛날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옛날 모세 시대에 하나님께서 진짜로 친히 시내산에 강림하셔서 큰 폭풍과 큰 우렛소리를 동반하시며 말씀을 하시니까 백성들이 하나님 우린 도무지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을 세워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이 곳에서 세워진 사람이 모세였단 말이지요.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그와 같은 방식을 사용하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도 칼빈과 같은 사람은 이것을 가만이 생각하다가 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친히 가르치시지 사람을 세워서 가르치도록 하셨는가 깊이 생각 하다고 말씀하시기를 아!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겸손케 하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 왔었습니다.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직접 가르침을 받는다 하면 사람들이 아! 나는 하나님 앞에 직접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다 이렇게 될 거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중간에 사람을 세워서 가르침을 받게 하시면 우리가 일단은 그 사람을 말을 뭐라고 말하는지 잘 들어야 돼요. 그리고 나서 판단을 하셔야 됩니다. 그 사람이 뭐라고 얘기하면 그 얘기를 무조건 들으면 안됩니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옛날에는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가르치도록 하시기 위해 목사님의 말씀을 무조건 들으라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일단 목사님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시면 무슨 말을 하는지를 정확히 들어야 합니다. 그것을 모르면 안됩니다. 정확히 들은 다음 성경으로 가셔야 합니다. 성경으로 가셔서 이것이 과연 그런가 하여 성경을 늘 상고해 보아야 합니다. 그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해서 아! 저 말씀이 정말 성경에서 가르치는 말씀이다 하는 것이 분명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가 생각하고 그 말씀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했던 대표적인 사람들이 베뢰아 사람들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성경에서 뭐라고 얘기하느냐 하면 더 신사적이다 이런 말을 사용했습니다. 이 말은 마음이 더 열려져 있다라는 말입니다. 마음이 열려져 있어서 바울이 가서 가르치면 가르치는 말씀을 잘 듣고 그 다음은 무슨 과정으로 가는가 하면 이것이 과연 그러한가 하여 성경으로 돌아가서 성경을 읽고 과연 성경이 그렇게 말하는가, 확인을 해서 그 다음에는 그 말씀이 지침하는대로 저들의 갊을 드러내고 말씀에 따라 살아가겠다 이렇게 얘기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베뢰아 사람들을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아주 존중합니다. 존중하다 보니까 가끔가다 이 베뢰아라는 이름을 이용하는 이상한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오늘 한국 교회 가운데 이 베뢰아라는 이름을 이용하는 아주 이상한 집단이 하나 있습니다. 거기도 교회라고 합니다. 거기도 목사님도 있고 하는데 이상한 가르침,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가르침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성경에 아주 좋은 사람들로 나타난 그 베뢰아 사람들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잘 주의하셔야 합니다. 아, 성경 가운데서 베뢰아 사람들이 아주 좋은 사람들였으니까 오늘날도 어떤데서 베뢰아 집단이 있으면 좋은 가르침을 가르치겠구나 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한국 교회에서 지금 베뢰아라고 하는데는 아주 이상한 곳이에요. 그것은 이단적인 데입니다. 왜 그렇게 하는가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하고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그 예에서 여러분이 아주 잘 알 수 있듯이 목사님들이라 하시는 분들의 가르침을 무조건 따라가서는 안된다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들이 하시는 말씀을 일단은 자세히 들어야 합니다. 뭐라고 가르치는지, 그것을 안 듣고 다 졸고 있으면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들으셔야 돼요. 잘 들으셔서 그 말씀이 정말 성경이 가르치는 말씀이다라는 판단이 서시면 그것이 목사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정상적인 경우에는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 하면 우리 가운데서 잘 살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고 우리들 가운데서 말씀을 잘 가르쳐서 가르칠 수 있는 은사가 있다고 생각되시는 분들을 우리가 정규적인 신학 교육을 받도록 하는 것이지요. 교회에서는 늘 그렇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정규적인 신학 교육을 받도록 해서 그분들이 우리와 우리 다음 세대의 교회를 잘 가르칠 수 있는 직분자로 그런 사람들을 목사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목사로 세워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했으면 그 다음에는 정상적인 이 분들을 힘을 써서 성경 전체의 하나님의 말씀을 교인들에게 잘 가르쳐야 합니다. 교인들이 이게 아닌가 그런가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서도 “야, 이게 정말 옳은 말씀이다” 하고 따라갈 수 있게끔 잘 가르쳐야 한단 말입니다. 정상적인 경우에 그렇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그 다음에 교인들은 그 말씀을 잘 배워가지고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은혜의 말씀을 주시는 구나 하고 그 말씀을 가지고서 자기들의 삶 가운데 구현해 나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방도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의 직분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고귀한 일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왜냐하면 주님께서 주의 백성들한테 은혜를 주시는 중요한 방도인 하나님의 말씀을 선호하는 일을 맡아서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일을 우리가 전통적으로 뭐라고 말씀을 하느냐 하면 “말씀을 섬기는 일이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말씀을 섬긴다” 또는 “말씀의 사역자”라는 말입니다. 물론 온 교인들이 주님의 사역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특별히 어떤 직분을 맡아서 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봉사하는 것이라는 말이죠.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목사님들에게 기대하시고 바라셔야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쳐 주시기를 바래야 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교회는 이 광길 목사가 계시고 이승구 목사님가 있으니까 그냥 말씀을 가르쳐 주어 좋습니다 하고 끝날 것이 아니고 여러분이 언젠가는 세월이 지나고 다음 세대의 목사님들을 여러분이 찾으셔야 된다는 말이에요. 그럴 때 기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게 목사의 직분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게 그렇다고 하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가 목사님들에게 기대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 일입니다. 성경 전체에 있는 하나님의 뜻, 성경에서 그것을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경륜 전체를 차례로 우리에게 잘 가르쳐 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 개신 교회의 예배와 로마 카톨릭, 즉 천주교회의 예배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뜻을 가지고 맨 차음 예배하는 것을 재정 하셨는데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시는데 하나님께서는 예배 순서 가운데 독특한 순서를 하나 만들어 주셨습니다. 다른 순서들은 우리가 다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찬송, 기도, 자신을 드리는 헌상을 주님 앞에 드립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의 말씀을 내려주시는 순서를 에배중에 마련하셨습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세월이 지나다 보니까 천주교에서 옛날에 이것을 무시하고서 그냥 하나님께 드리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나갔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교인들이 그냥 일주일에 아무 때이고 한 번, 주일날에도 아무 때이고 한 번, 이렇게 미사를 보기만 하면 돼요. 구경하기만 하면 돼요. 그러면 신부님이 그것을 드리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드려 가지고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르침을 충분히 받아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개신 교회로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는 어떻게 했느냐 하면 예배에 모두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정성을 드려서 하되 특별히 무슨 순서를 강조했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순서를 강조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개신교의 예배는 그 중심이 설교를 중심으로 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예배당에 나오면 대개 설교가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그렇게 우리가 이것을 강조하고 나갔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서 우리 삶의 모든 부분들을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에 따라서 살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만일에 오늘의 개신 교인들이 그 면을 등한시해 버리고 점점 이 면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고 우리도 그냥 멋있는 예배, 폼 나는 예배 드리는 것에 치중하고 나간다면 종교개혁 시대에 그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하기 위해서 그 목숨을 잃어가고 피를 흘려 간 것에 대해서 역사의 반동해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뜻을 잘 살려 가지고 우리가 개신 교회의 부분임으로 개혁 교회의 그 뜻을 잘 설려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가르침 받는 것을 아주 신중하게 생각해 나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배로 모일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순서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주 여러번 모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 받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인 주일 낮 예배도 있고 밤 예배, 수요일 밤 예배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 말씀을 강론하는데 보내어 집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이 일이 주님께서 우리를 세우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데 상당한 부분을 소요해 나가는 것이지요. 여러분들이 이 과정을 통해서 바로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무슨 가르침이냐, 이렇게 목사와 교사로 세우신 이유를 그 다음 구절에서 세가지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12절인데 이는 첫번째로 성도를 온전케 한다-우리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을 잘 받아서 온전한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가르침을 받는거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성도를 온전케 하는 일은 이 세상의 어떤 지혜로 되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세상의 얘기를 해서는 안됩니다. 그럼 무슨 얘기를 해야 되느냐,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뜻을 잘 가르쳐야 합니다. 물론 그것을 잘 지혜 있게 가르쳐서 사람들이 잘 알아듣도록 해줘야 하겠지만 궁극적으로 가야 할 목적지는 바로 우리가 온전하게 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알게끔 하신 뜻이 무엇인가 잘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일 좋은 방식은 성경을 잘 풀어서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스스로 나도 이제는 성경을 읽으시면서 그 뜻에 깊이 있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가르침을 받았으면 내 생각하는 바가 이제 온전하게 되는 것으로 바꿔져야 합니다. 모든 면에서 그렇습니다.
두번째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럼 목사님들이 잘 가르치는 목적이 무언가 하면 봉사의 일을 하게 하는 겁니다. 이것은 사역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온 성도들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온전하게 받았으면 그 다음에는 교회의 지체로서의 의식을 가지고 “내가 어떻게 봉사의 일을 할 것인가” 이것을 교회 안에서의 일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이 세상에 살면서 어떻게 봉사하는 사람으로써 살 것인가, 그냥 사회의 봉사 정신이 아니고 주님께서 이 일을 해 나가시는 그 목적을 바라보면서 “주님이 지금 온 세상의 일을 어떻게 해 나가시고 계시는가, 하나님의 나라를 지금 어떻게 진행시키고 나가시는가,” 그것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바라보는 성도답게 “내가 무엇을 해 나가야 될 것인가, 나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나라의 일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잘 깨닫고 해 나가는 것이지요.
그것은 쉽게 이야기하면 두가지 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서 일을 맡겨 주신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학교의 선생님으로, 주부로써, 장사하는 자로, 정치하는 자로 다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일이죠. 우리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내게 맡겨 주신 그 일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그 일은 하나님의 일이 되어집니다. 우리가 흔히 잘못 생각하는 것들 중 하나가 교회의 일은 하나님의 일이고, 나가서 일하는 것은 육신 적이고 세상 적인 일이라고 성경이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내가 나가서 하는 모든 일이 그게 하나님의 일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제대로 해 나갈 수 있도록 설교 시간에 하는 일들입니다. 또 하나 봉사의 일은 무엇인가 우리가 교회의 지체로서 감당해야 할 사역이 있습니다. 그것이 세번째 목적과 관련이 되어지는데 이렇게 사람들이 한 사람 한 사람 온전하여지고, 봉사의 일을 하게 되면 그 결과로서 세워지는 일이, 마지막 12절에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느니라” 그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을 세우셔서 우리로 하여금 다 각자 맡겨 준 일을 함으로써 주님의 몸, 즉 교회가 세워져 나간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교회 안에 있으면서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이제 교회 교인으로써 의식을 세월이 지나면서 날마다 더가져 나가야 합니다. “나는 교회의 회원이다, 이 교회의 지체이다” 라고 하는 의식을 가진단 말이죠. 그러면 내가 지체로써 이 교회가 주님의 몸된 교회답게 되도록 하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을 찾아서 해 나가는 것입니다. 만일에 “어떤 목사님이 열심히 가르치는데 성도들은 전혀 그 일을 안한다” 그러면 두가지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는 그 목사가 잘못 가르치고 있든지, 가르치기는 잘 가르치는데 사람들이 움직여 나갈 수 있도록 하는 어떤 감동을 못 주든지, 아니면 그런 것도 다 있는데 사람들이 내일에 바쁘니까 그런 것을 다 무시하고 나가든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세 가지 중의 하나입니다. 대개 한국 교회는 가르치는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늘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목사님들 책임이죠. 목사님들이 매일 설교를 한다고 하는데 우리 생애에는 변화가 별로 없단 말이죠. 마치 무엇과 같느냐 하면 옛날 19세기 초에 어떤 사상가가 이런 비유를 하나 들었습니다.
제가 잘 드는 비유인데, 만일에 거위들이 우리처럼 이렇게 주님을 찬양하는 모임이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거위 중에 목사님은 주일날 아침마다 이렇게 설교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한테 저 창공을 훨훨 날아갈 수 있는 날개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 얘기를 들으면서 교인 된 거위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아! 그렇다 주님께서 나한테 그럴 힘을 주셨다, 날아갈 수 있는 힘을 주셨다” 그런데 그 예배가 마치고 나면 그 목사인 거위도 교인들인 거위도 아무도 날 생각을 안하죠. 거위가 나는 것 보셨어요 안 난단 말이 예요. 그렇죠 그 현실이 오늘날 교회의 현실이 아니겠어요 그 사람은 19세기의 자기가 살던 교회에 지금부터 약 100년 전에 살던 교회를 생각하면서, 지금부터 약 150년 전인데 그렇게 얘기했었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주일날마다 우리는 설교를 합니다. 그러면 교인들이 가끔가다가는 아, 그렇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겠다 하다가도 예배가 마치고 돌아서 나가면 그것과 나의 삶과는 전혀 관계가 없어요. 그러면 여기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과 우리의 삶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로마 카톨릭의 문제점을 제거해 버리고 우리가 설교를 중심으로 하는 예배를 만들어 버렸다고 할지라도 그런 일이 늘 계속되게 되어지면 이것도 다 쓸데없는 짓이란 말입니다. 차라리 얘기를 안 하는게 더 나을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저 같은 사람들, 목사님들은 늘 애를 써 가지고는 모든 교인들한테 하나님 말씀을 잘 선포하고, 이 말씀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제시하고 할 수만 있다면 정말 우리 마음속에 그렇게 살아가야겠다는 감동이 있도록 좀 해야 될 거예요. 늘 그게 어렵죠. 그러니까 혹시 감동이 없어도 늘 그런 감동을 바란다는 것은 어려우니까 없어도 하나님 말씀이 제대로 얘기되어지면 그 말씀을 잘 새겨서 우리 마음 가운데 실현해 나가도록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아까 얘기했던 그 이상한 거위들의 문제성 속에 안 빠져 들어간다는 말이죠. 이것이 늘 문제입니다. 굳이 바라기는 이렇게 나아가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한국 교회의 목사님들이 이제 막 이렇게 하다가 교인들이 전혀 반응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제 어떻게 되는 사람들이 많으냐 하면 소위 방법론을 찾아 나갑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이렇게 움직여 나갈 수 있을까 하는 방법론을 찾아 나갑니다. 그런데 그게 누구에게 치명적으로 어려우냐 하면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선생님한테 제일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제 목사님들이 몇년 목회 하시다가 어떻게 되는가 하면, “선생님 내가 학교에서 가르침 받는 대로 해 봤는데 이거 뭐 전혀 안되는 데요. 교인들이 전부 다 맹숭맹숭하고, 다 안되고 안되는데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렇게 찾아오면 다행인데, 그렇게 하지도 않고 나름대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자기들 나름대로 이상한 방법들을 찾아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게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선생님들한테는 아주 늘 어려운 것이지요. 그러면 학교는 무엇 하러 있는 것인가 학교를 그만두어 버리고 다 아디서 교회 성장 세미나, 이런 것만 하면 될 것 아닙니까 그렇죠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시점에서 아주 주의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교회는 몇 몇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지금 눈여겨보고 있습니다. 이 교회는 이 광길 목사님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이상스러운 방법을 될수록 안하면서 성경에서 가르치는 대로 좀 해보자, 특히 이 광길 목사님 같은 경우는 목에 핏대를 내세우면서 사람들한테 얘기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얘기하는데 그러면 제대로 되어 나갑니까 그건 이제 사람들이 눈여겨 볼 거란 말이죠.
더구나 이제 우리 교회의 경우에는 이제 많은 신학생들이 여러분을 바라봅니다. 이 교인들이 저 선생님은 학교에서는 저렇게 가르치는데 자기가 가서 목회할 때에도 그렇게 하나 학교에서 정말 가르치는 대로 하나 자기는 가르치는 대로 안하면서 우리한테는 그렇게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눈을 가지고 바라본다는 말이죠.
그러므로 우리가 양보할 수 없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성경이 가르치는 원리에 따라서 하도록 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그게 비록 어려운 길이고 잘 안되는 길일지라도 그렇게 갈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서 가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께서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에서 가르치는 교사인 목사를 세우신 그 뜻이 우리 가운데 구현되어져야 하고, 그렇게 되어지면 우리 각자는 주님께서 이런 제도를 세우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그 방도 속에서 하나님 말씀을 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목사님들을 잘 이용하셔야 합니다. 목사님들은 엄밀하게 얘기하면 목사와 강도사님, 전도사님 다 포함되는데 이 분들은 전부 다 무엇 하러 와 있는냐 하면 우리에게 하나님 말씀을 가르쳐 주시려고 와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사님이나 강도사님이나 전도사님이나 다 똑같은 분들입니다. 그러니까 권호인 전도사님이 이번 가을이면 강도사님이 되실 것 같은데, 그러니까 우리 교회는 이제 목사님 두 분, 강도사님 한 분, 이렇게 되어 있는데 그러면 다 똑같아요. 다 우리를 지도하시기 위해서 오신 분들이에요. 교회 안에는 누가 높고 낮은 게 없다고 그랬잖아요 그러므로 이 분들을 잘 이용하셔야 됩니다. 어떻게 이용하셔야 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침을 받는데로 이용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혹시 설교 시간에 잘 듣다가도 모르는게 있으면 끝난 다음에라도 또 어떤 때 시간을 내서라도 와서 전도사님이나 강도사님이나 목사님들한테 여쭈어 보셔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여러분들이 주님께서 그들을 세우신 뜻을 잘 이룩하시는 거란 말이지요.
또, 여러분 생활 가운데 문제가 있을 때 언제든지 그분들한테 와서 얘기하셔야 합니다. 대개 그런데 우리는 와서 얘기하지 않고, 쑥스러우니까, 그냥 눈치를 보지요. 그러지 마시고 문제가 있다, 생각이 드시면 그분들한테 오셔서 내 생활에 이런 문제가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 백성다웁게 해결해야 될지, 내 나름대로는 이렇게 이렇게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는 혹시 이것이 제대로 된 것인지, 그것을 상의할 수도 있고, 그렇게 해 나가는 것입니다.
주일날 예배 아친 다음에 제대로 된 교회는 예배 마친 다음에나 저녁에도 그렇게 언제나 그렇게 이야기 하는 시간들이 많이 있어야죠. 그렇게 되어져서 우리가 목사님들 통해서도 가르침을 받고, 또는 미리 나오던 성도들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고, 그렇게 해서 주의 교회가 세워져 나가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 아까 그 세가지 입니다.
첫번째는 우리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기독교적인 전 지식에 충만해서 우리가 온전하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어린아이만 되면 안되죠. 온전하게 되어야 합니다. 이 주일에 와서 말씀 듣고 다음 주일에 와서 말씀 듣고 그러한 것을 통해서 온전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온전한 사람 말입니다.
두번째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렇게 해서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됩니까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나에게 주어진 봉사의 일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직장에서도 하는 것이고 가정에서도 하는 것이고, 교회와 관련해서도 봉사의 일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가 세워져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성장입니다. 다른게 교회의 성장이 아닙니다. 여기에 나오는 우리 모든 사람들이 그런 의식을 가지고 나에게 맡겨진 일을 해 나가면서 교인 역할을 제대로 해 나갈 대 그것이 교회가 굳건하게 튼튼하게 서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고 아가 우리 그 거위들처럼 해 나가면 교회는 아무리 사람이 많이 모여도 그것이 교회가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허물어뜨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일은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하시겠지만 우리에게 맡겨 주신 일입니다.
여러분이 혹 교회를 허물 수도 있어요. 그냥 예배만 마치시고 가고, 내가 할 일 다했다, 그것은 교회를 허무는 일 일수 수 있다는 말이에요. 정말 이 의식에 따라서 주께서 우리를 이 사람들을 세우셔서 하게 하신 그 뜻에 따라서 주께서 우리를 이 사람들을 세우셔서 하게 하신 그 뜻에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늘 존중하고 그 뜻을 따라서 살아나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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