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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밤중에 찾아온 벗 (눅 1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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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간단한 비유는 기도하면 반드시 주시는 하나님으로 계시하며, 이기적인 사람 도 친구의 강청을 거절치 못하고 구한바를 주고 악한 인간도 사랑하는 자들의 구함 을 준다면 선하신 하나 님께서, 사랑의 하나님께서 자기백성들의 간구를 안 들어 주 시겠느냐는 가르침이다.

우리는 기도를 하기전에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생각해야 한다. 극히 양심적 인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자신만을 보고 부끄러워 기도조차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 러나 여기 "강청"이란 말은 파렴치란 뜻이다. 한밤중에 여간 파렴치한 사람이 아니 면 떡을 빌리러 갈 수 없다. 그가 파렴치 를 무릅쓰고 갈 수 있는 것은 그와의 관계 때문이다. 벗이란 관계, 충분히 파렴치한 행동도 이해 하고 들어줄만한 관계이기 때 문에 강청한 것이다.

어떤 때는 우리 스스로 내가 구하는 것이 파렴치한 것이라 생각되어 간절히 구하 지 못하는 때가 있으나 어차피 우리는 정당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가서 간구하 는 것은 아니다. 우리 의 벗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가게 된 것이지 우리 자 신만 보면 하나님 앞에 파렴치하지 않은 것은 하 나도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 파렴치한 행동을 해도 좋다거나 계속 파렴치하게 하란 말은 아 니다. 기도 하는데 있어서 어떤 점에서는 파렴치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낙심하여 기 도를 못하지 말고 파렴 치할지라도 계속 기도해야 하겠다.

주님이 가르치신 비유의 교훈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는 자신이 부끄러울 정도 로 끈질기게 기도하란 말씀이다.

기도의 가장 중요한 점은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간절하게 드리는 것이다. 즉 기도의 대상 에 대한 바른 깨달음을 가지고 그분께 어떻게 구하여야하며 얼마나 간 절히 구하여야 할 것인 가가 중요하다. 잘못된 대상에게 간절히 기도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니다. 창18장의 아브라함이나 마15:21 이하의 가나안 여인의 끈질김, 야곱 의 얍복강변의 끈질긴 간구는 마침내 응답되었다.

 잔치비유 (눅14:15-24) 이 비유는 15절에서 말한 사람에게 주는 특별한 교훈이다. 눅9:57의 경우 한 청 년이 주여 어 디로 가시든지 저는 좆으리이다 할 때에 ...여우도 굴이 있고...라고 대답하셨는데 이 비유도 이 말에 대한 칭찬이나, 격려나, 동의를 해주는 대신 무섭 도록 엄격한, 가장 강경한 말씀을 해 주 셨다.

분노와 심판, 비천한 운명으로 채워져 있는 이야기이다. 24절의 말씀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 힌 자에게나 아니면 어떤 강력범에게 혹은 그리스도 자신과 그분의 복 음에 대한 신랄한 반대 자에게 말씀이었다고 한다면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전혀 놀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를 놀라 게 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수긍해서 존경의 뜻으로 말했던 사람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점이다.

첫째, 이들은 초청을 수락했다. 그러나 잔치가 시작될 때 하인을 시켜 안으로 모시려고 하자 약 속이라도 한 것처럼 모두 변명을 늘어 놓았다. 이들은 초청을 수락할 때 철 저하고 진지 하게 생각해보고 결정하였던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막연하고 가벼운 마 음으로 응답한 것이다. 똑같은 방식으로 전반적인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저항이 나 부정이나 캐물어본 적이 없이 그냥 받아들인다.

둘째, 두번째 초청은 진정한 시험이 된다. 첫번 초청은 일반적인 것이었으나 두번째 초 청은 제 한된 어떤 일을 하도록 강요한다. 가거나 가지 않거나 해야 한다.

셋째, 두번째 초청에 불응하고 변명한 것은 주인을 무시하고 모욕한 행위다. 그들은 다 른 일이 없었다면 잔치에 참석했을 것이다. 다른 일이 있자 초청이 짐스러워졌다. 그들은 자신 들의 편의만을 우선시켰다. 우선의 원칙은 하나님께 적용해야 한다. 편의위주의 원칙을 적용하면 가공스러운 잘못이 된다. 우리가 천국에 이르기를 원하면서 그러기 위해 하는 일은 무엇인가 복-신령, 육 신-을 받기 원하면서 하는 일은 무엇인가 죄를 지으면서, 자신들을 즐겁게 하면서, 이 세상을 따라 살면서 하나님을 향하 여 죄스럽게 되었노라 고 말하는 것으로 천국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모욕이다. 하나님을 자신의 편의대로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과오는 저지 르지 말자. 천국에 가기를 원 한다면 천국의 일들을 더 좋아한다는 것을 보임으로 입증해야 한다.

이들의 변명은 속이 빤히 들여다 보이는 어리석은 짓들이다. 밭이 갑자기 움직 여 사라지기 라도 하는가 소들이 몇시간도 기다리지 못하는가 평생동안 아내와 같 이 살지 못할 것처 럼 한 것은 무례 막급한 일이다.

딛1:16. 입술로는 하나님을 선포하나 실 생활로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은 하나 님의 성호를 모독하는 일이다.

하나님 보다 더 중요시 하는 것들을 보라. 돈, 성공, 인기, 욕망, 정욕. 주님을 믿노라 하고 천 국에 가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다른 일을 그것에 우선시킨다면 어리 석은 일이다.

 므나 비유 (눅19:11-27) 이 비유의 동기는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림에 있어서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 을 교훈하기 위함이며 목적은 그리스도께서 떠나셔서 재림하실 때까지의 긴 기간 즉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없는 동안 그리스도를 위해 열심히 일할 것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제물로 십자가에 못박 혀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심으로 구속사역을 이루실터인데 저희들은 생각하기 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에 올라가시면 왕위에 오르시고 능력과 권세로 로마의 세력 을 꺾으시고 당장에 지상 천국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하였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자신이 죽으시고 승천하셔서 다시 재림하심으 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것을 가르치 시고 승천과 재림의 기간이 길게 될 것을 말씀하시며 그 기간이 의미없는 기간이 아니고 부지런히 그리스도를 위해서 충성하여야 될 것을 말씀하신 것 이다.

'므나' 희랍화폐단위--100데나리온이 1므나 행1장을 보면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라는 사도들의 질문에 너희들 은 때와 기한 에 관심을 두지 말고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 과 유대와 사마리아 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다. 승천 후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시 어 사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고 요구하 심.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가 자기가 할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은 가장 비극적이고 어리석은 일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의무-즉 성도들의 의무는 무엇 인가 예배와 봉사와 거룩한 생활이다. 집회출석, 교회봉사, 생활의 거룩함은 누구에게나 해 당된다. 교 회에서 맡은 직분에 충성, 책임감 있는 직분자들 되라.

주님이 재림하실 때 충성여하에 따라 상급이 비례된다. 태만과 게으름은 있는 것도 빼앗긴 다. 그리스도께서 왕됨을 원치 않는 자들은 무서운 진노로 죽인다.

 불의한 청지기 비유 (눅16:1-13) 비유해석에 주의할 점은 너무 세밀하게 분석하지 말라는 것이다. 부자는 누구인 가 청지기 는 누구인가 소유를 허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직분을 빼앗긴다는 것 은 무엇인가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불러 탕감하여 주는 것은 무엇인가 주인이 불 의한 청지기를 칭찬한 것은 정당한 가 등등이다.

(인간이 죄악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잃어버린 것을 비유하는 것이라고) 비트링가 는 이 비유 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던 그때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잘못함으로 지도권을 잃어버린 것을 가리킨다고 함. 그러나 이렇게 해석할 경우 많은 문제가 뒤 따른다. 이 비유는 불의한 제물로 친 구를 사귀라는 말씀이 핵심이다.

박윤선-불의한 재물은 재물을 맡은 자가 주인의 뜻대로 쓰지 않고 제뜻대로 씀.

칼빈-재물자체가 불의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재물이란 사기, 폭력, 불법수단으 로 얻는 경우 가 많으며 재물을 많이 소유하면 자랑이나 사치, 타락된 태도를 보이 기 때문에 재물이 우리에 게 위험한 것이라는 것으로 여기게 하실 목적으로 그리스 도께서는 불의한 재물이라 하셨다.

이 비유는 물질에 탐심을 가지지 말고 이웃과 친구를 위하여 선하게 사용하라는 의미이다.

이 비유가운데서 주의할 것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재물은 우리의 것이 아니고 주인이 따로 있 음을 알아야 한다. 즉 청지기 직분을 인식하여야 한다. 우리 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

우리 소유는 다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이 우 리에게 맡기신 것을 가지고 흩어 구제하고 , 이 웃에게 선물을 주고 선하게 사용하 라. 왜냐하면 재물이 없어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재물이 없어질 때라 는 의미보다 사람이 죽을 때로 해석.

많은 사람들이 재물을 쌓아올리려고 자신과 타인을 속이고 선히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오랜 인생을 계속할 것이라는 그릇된 희망으로 기만당하여 그리한다.

그리스도인은 잠시 청지기로서 맡아있는 이 세상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 영원한 재물 즉 영 원한 처소 내세를 준비해야 한다. 마6:19-보물을 땅에 쌓아두면 좀, 동 록, 도적이 해한다. 이런 것들이 해하지 못하는 하늘에 쌓아두라 없어지지 않는 재 물은 남을 위하여 선하게 구제하는 것이다. 마25:31-그렇게 함으로 천국을 얻는 것이란 의미는 아니다. 인간적 방법, 마치 친구들을 사귀는 부자가 불운에 처할 때 친구들에게 도움을 바라는 것 처럼 우리의 친절한 행위는 때에 맞는 피난처가 될 것이다.

돈뿐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한 것은 없어질 때 영원한 처소로 영접할 수 있도록 사용하여야 한다. 시간, 건강, 재능, 물질등을 하나님 나라를 예비하고 준비하는데 목적을 두고 사용하는 것 이 지혜롭다.

이 비유는 불의하고 악하게라도 재물을 많이 모아 자선을 하거나 하나님께 드리 라는 의미는 아니다. 불의한 청지기가 자신에 대해서 지혜롭게 한 것을 통하여 그 리스도인도 지혜를 배우라 는 의미이다.

 어리석은 부자 비유 (눅12:13-20) 이 비유를 하시게 된 동기는 주님께서 말씀을 선포하시고 가르치시는 도중에 그 말씀을 가로 막고 가족의 유산에 관한 논쟁의 중재자가 되어서 부당한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 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고 책 망하시고 삼가 탐심을 물리치라고 하시면서 사 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다고 가르치시면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 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데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 명하는 말씀 이다. 이것을 모르고 비유에 나타난 부자와 같이 먹을 곡식만 많이 쌓 아 놓으면 오랫동안 평안 이 먹고 마시고 즐거웁게 살 줄로 아는 것은 어리석은 짓 이다.

 1.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비그리스도인들 도 인명은 재 천이라 했다) 마6:25-공중의 새도 먹이시고 기르신다. 사람은 더 귀 하고 하나님의 백성은 더 귀하다. 이 세상에서 죽음은 참으로 다양하다. 먹을 것이 없어서 죽는 일은 거의 없다.

굶어 죽는 것도 그 사람의 생명이 다돼서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즉 기근, 흉년 등으로 죽게하는 것이다. 병으로 죽고 사고로 죽고 밥 잘먹고 갑자기 죽는 예도 허다하다. 없어서 만 못먹는게 아니라 많이 쌓아두고도 못 먹고 죽는 예가 허다하다. 결국 우리의 생명은 하 나님께서 허락하셔야 사는 것이지 소유가 많아서 사는 것 은 아니다. 이 진리를 잘 깨달으 면 탐심을 물리칠 수가 있다.

 2. 인생의 행복도 소유의 넉넉한데 있는 것이 아니다. 가난해서 행복하지 못하다 고 생각하는 사람은 부자가 되어도 행복하지 못한다. 행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로 말미암아 그 심령 이 기쁨이 있고 평안해야지 다른 것으로는 행복할 수 없다. 이 부자는 물질을 많이 쌓아두 었으니 마음껏 먹고 마시고 즐겁게 살 줄 알았으나 생명을 불러 가시니 그가 쌓아 놓은 것 누리지 못하고 말았다. 부하다고 행복한 것 은 아니다. 가난할 때는 부자만 되면 행복할 것 같지만 부자가 되면 가난할 때가 그래도 행복했다고들 깨닫는다. 부자가 건강을 잃을 수 있 고 자녀들이 잘못되는 수 도 많고 도덕적 타락도 많다. 인생을 바르게 살지 못하고 허영과 사치와 향락과 죄 짓는 생활을 많이 할 수 있다.

 어리석은 부자의 모습1) 많은 재산관리 때문에 염려와 걱정을 가짐 17-1

9.

2) 자신의 생명이 자신의 부에 의하여 잘 보전될 줄 알고 있는 점. 즉 자기 생 명을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점을 몰랐다는 것이 어리석은 점이다.

3) 재산을 믿고 안일한 생활의 확실성을 자신하는 망상. 19절.

4)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점--자기 재 물의 부요를 믿고 하나님께 의존하지 아니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분량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축복 을 망각하고 애를 쓰면서 많은 재물을 모으고 그 재물만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 을 의미하며 땅의 것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 며 주님의 돌보심만 의지하고 일 용할 양식을 구하는 자는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이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 (눅10:25-37) 성경에 기록된 많은 비유들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지고 또 가장 많이 이용되는 비유가 탕자 비유나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비유이다. 이 비유를 하게 된 동기는 어떤 율법사가 예수 님을 시험하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는 질문으로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는 율법 이상의 것을 가르 치거나 아니면 율법을 무시하고 어떤 구원을 가르치는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 라는 것이 율법의 대강령임을 알고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묻는 율법사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이들은 이웃이란 자기들에게 필요한 사람 즉 혈연, 지 연, 친구, 동족으로 제한하 여 다른 사람은 이웃으로 치지 않고 이방 사람은 원수로 대함. 그들 은 원수를 미워 하는 것이 합법적이라고 생각하였고 그래서 내 이웃이 누구인가 이웃의 범위 혹은 이웃은 어디까지 한계를 그어야하느냐 질문.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이 비유 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예수님께서 영생을 얻으려면 율법을 완전히 행해야 한다거나 사람 이 그 법을 완전하게 행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잘못은 율법에 있는 것이 아니 라 사람편에 있다. 그래서 율법의 행위로 구원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율법을 뒤밀치고 내버리 고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도구 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다. 내 행위가 나를 구원 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도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영생이 있는 자가 한다. 적극적으로 율 법을 사랑하 고 즐거워하며 이를 행한다. (야고보가 가르치는 교훈) 이웃은 범위고 모든 사람이다. 유대인 들이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증오가 얼마나 불타고 있었는가 그런 사마리아 사람을 들어서 유 대인의 이웃이 누구냐고 예수님 은 묻는다. 제사장, 레위인 포함하여 그는 스스로 대답했다.

자비를 베푼자라고.

프란시스 베이콘--꿀벌, 개미, 거미. 있어야 할 사람, 있으나 없으나 무방한 사람, 없어야 할 사람. 이 비유를 가장 많이 풍유적으로 해석한다. 상처받은 인간은 타락이후의 아담의 상 태를 비유한다고. 인간성의 타락, 반죽음,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고 치유의 가능성 시사. 선 을 행할 능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 이 아니라고. 또 사마리아인을 그리스도로 본다. 포도주에 기름을 타 부어준 것은 우리를 회개 와 은혜의 약속으로 주시기 때문이라고. 또 그리스도께 서는 우리를 당장 회복시키 시지 않고 주막집 즉 교회로 보내 점점 건강을 회복시키신다 고. 예루살렘은 교회, 여리고는 세상, 강도는 마귀, 주막은 교회, 두 렙돈은 신구약 성경. 칼 빈은 헛소리를 꾸며대고 있다고 했다. 이러한 생각은 그리스도의 마음과는 동 떨어진 잔소 리꾼들의 조작이라는 점을 누구든지 파악할 수 있다고 설명.

 씨뿌리는 자의 비유 (마13:1-23) 비유는 광의적으로는 속담, 수수께끼 같은 표현, 격언적인 교훈을 포함 하여 말하나 협의로 는 인생사나 자연현상 가운데서 뽑은 이야기로서 계시의 진리를 가르치려는 것을 뜻한다.

비유는 한마디로 말하는 명유도 아니요 세부에 미치는 자세한 비교를 하는 풍유 도 아니 요 그것 자체로서 작은 이야기가 될만한 것으로서 각각 어떤 하나의 하나님 나라의 교훈과 경고와 위로와 정죄를 중립적으로 주는 교훈의 형식이다. 즉 비유는 하늘의 뜻을 가진 지상 의 이야기이다.

예수님께서 천국의 비밀 즉 하나님나라의 진리를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어려운 진리를 직설적으로 진술하기 보다 우선 잘아는 이야기로 즐겁고 쉽게 이해하여 전 할 목적이 있 으며 마13:13-또 다른 면은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고 비유로 말 씀하신다.

비유를 해석하는데 주의할 점은 직설적으로 계시하신 다른 말씀을 충분히 알고 있어야 하며 비유의 내용의 욧점을 파악하는 일이 긴요하다.

다음으로 씨뿌리는 자의 비유가 다른 여러 비유가운데서 차지하는 위치 막4:13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찐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뇨" 이 말은 이 비유 가 다른 비유보 다 쉽다는 뜻이 아니라 기본이 되는 비유란 의미이다. 다른 비유들 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이해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다 른 비유의 이해를 위한 기초가 된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해석을 해주시면서 공관복 음에서 일련의 비유들의 선두에 위치 하고 있다. 그것은 이 비유가 하나님 나라의 기본 성격을 계시하기 때문이다.

천국의 기본 성격은 말씀을 뿌리는 것. 복음전파는 중요한 천국의 현상이다. 그 리고 천국 은 씨뿌리는 단계가 있고 추수하는 단계가 있다. 씨가 좋은 땅에 뿌려지 기만 하면 추수는 하게 된다. 그런데 뿌리기는 했는데 결실을 못해서 추수하지 못 하는 경우들이 있다. 즉 천 국 복음이 세상에 전파될 때 이러한 반응이 따르기 마련 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들을 때 듣는자의 자세가 중요하고 주의하지 않으면 안될 것을 경고한다. 눅8:18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 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 까지 빼앗기리라.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주님은 네가지 듣는 자들을 열거하신다. 1/4만 결실 한 다는 이 야기가 아니다. 이 비유는 가르침을 받는 자들에게 관련되었다. "말씀을 듣 고..." 교회출석 안하는 사람이 길가가 아니다. 성경을 않읽는 자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설교를 않듣는 자 가 아니다. 주님은 원근 각처에서 주님의 말씀을 들으러 나온 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이 비유를 볼 때 참결실하는 신자가 소수일 것만은 틀림없다. 눅13장에서 좁은 문으로 들 어가는 자가 참 적은데 들어가기를 구하는 자는 더 적고 그 적은 수 가운 데서도 못 들어 갈 자가 많다. 성경 읽고, 설교 듣고 하면서도 길가일 수 있다.

길가의 씨는 새들이 주어 먹으니-단단한 길 위에 씨앗이 노출됨. 씨앗을 마음속 에 품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양에서는 씨를 뿌리면 새들이 떼지어 줏어 먹으려고 농부의 뒤를 따 른다. 씨를 간직하지 않으면 빼앗기 위해 따라다니는 사탄이 있다.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 려버리는 경우도 있고 말씀을 듣고 잘간직하지 않으므로 빼 앗긴다. 공관복음 모두에 " 빼앗나니" 안뺐기려면 잘간직하고 늘품고 있어야 한다. 마태는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 는 마음을 이야기 한다. 자기 나름대로 자기관점대로 못 깨닫는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들 도 성경에서 윤리를 발견하고, 교훈을 발견하고, 자기 생리에 맞는것 많이 찾아낸다. 그러 나 계시를 모른다. 죄와 구속과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의 사역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 령한 것도 모른다.

듣는 일은 결실을 위한 첫단계--진리는 같은 것이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 람에 따라 결과가 다르게 나타난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성의하게 듣는 자, 알아볼 려는 관심이 없는 자, 비판하기 위하여 듣는 자, 자가중심주의, 자가 생리에 맞지 않으면 귀를 막는다. 새김질 하고 재음미해보지 않고 무관심주의 깨닫지 못한다.

비유는 영적 진리를 보다 더 쉽게 설명, 천국 진리를 인상깊게 간직할 목적-땅 에서 되는 일 로 시작하여 하늘로 인도, 볼 수 있는 일로 시작하여 보지 못하는 것 설명, 아는 것 가지고 알지 못하는 것 설명.

 돌밭에 떨어진 씨 (마13:1-9) 천국운동은 말씀운동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말씀 선포와 그리고 선포되 는 말씀을 듣 는 것과 그리고 들은 말씀을 깨닫고 이해하는 문제, 또 그 말씀을 깊 이 뿌리를 내리는가 못 내리는가 하는 문제와 말씀을 듣고 깨달으면서도 이 세상의 삶과 관련하여 침체되는 문제, 그 리고 말씀을 듣고 깨닫고 받아들여 지킴으로 결실 하는 문제를 취급하고 있다.

돌밭은 산밑의 큰 바위위에 토사로 얇게 덥혀 있는 땅. 여기에 씨가 떨어지면 싹은 나오나 결실한 열매는 얻을 수 없다. 바위가 차단하여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뿌리가 없어 해가 뜨고 바람이 불면 말라버린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 할 것은 뿌리가 없는 문제다. 뿌리를 깊 이 내리지 못하게 차단하고 막는 것이 무엇 인가 이것이(바위)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먼저 결과 를 살펴보자. 무엇인가 차단하 여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한 씨는 즉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말씀을 인 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넘어지는 자요. 누가는 배반하는 자 요. 말 씀(혹 천국, 하나님 나라, 신앙) 때문에 어떤 손실이 올 경우 배반하는 자이다. 그 러하다 면 여기서 말하는 바위 즉 뿌리를 깊이 박지 못하게 차단하는 것이 무엇인가 는 자명하다. 즉 자아이다. 자기라는 것이 도사리고 앉아 있어서 그 이상은 뻗어 내려가지 못하게 차단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도 종교를 필요로 하고 또 종교적 신앙을 가지고 그 안에서 기쁨을 얻고, 감격도 하고, 큰 보람을 느끼기도 한다. 피상적으로 보기엔 참 그리스도인인 지 아닌지 아무도 분간할 수 없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도 잘모른다. 말씀 때문에 큰 핍박과 환난이 일어나서 넘어지든지 배반할 때에야 돌밭임이 드러난다.

그들이 종교를 필요로 하고 종교적 신앙을 가지는 것은 자기를 위해서이다. 종교 적 열정, 종교 적 활동, 모든것이 자신에게 어떤 유익이 되는가 어떤 가치, 어떤 위안, 어떤 만족을 주는가에 관심을 둔다. 이런 사람들에게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지 자기 손실과 자기를 포기하고 내놓으 라고 할 때 배반하지 않겠는가 이런 사람 들도 말씀을 기쁨으로 받는다는 점을 주의하자.

사변적이고 학문적인 지식을 추구하는 자에게 만족을 줄만한 가르침을 주면 무척 기뻐한다.

그러면서도 그 말씀이 생명의 작용을 일으키지 못하는 수가 있다. 또한 종교적 감정과 열정이 감격하게 하고 기쁘게 하고 황홀한 경지에까지 도달할 수 있 다. 자신들이 추구하고 요구하는 것을 얻을 때에 좋아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길가, 돌밭, 가시떨기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 로 받았다고 해서 길가나 가시떨기보다 나을바가 없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것이지 내가 중심이 되는것 아니다. 자신을 위한 모든 종교 적 열정은 그것이 만족이나 위로를 주던지, 기쁨이나 감격을 주던지, 현실적으로 어떤 소득이 있던지 하나님 나라와는 아무런 상관 이 없다.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받을 분깃도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릴 때에 차단하는 요소가 제거되어야 어떤 경우라도 깊숙이 뿌리 를 박게 되는 것이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자신에게 유리하고 이로울 때만 받아들이고 손실이 올 때는 막고 차단한다. 그것은 버린다. 어떤 결정적인 요 구를 해올 때는 종교도 포기한다. 혹 은 형식은 붙들고 있으나 적당히 타협한다. 신 사참배-그렇게라도해야 문닫지 않는다고 논리전 개.

전폭을, 전부를, 전체를 드리지 않으면 결정적일 때 배반하거나 넘어진다. 이것 은 평소부터 그속에 바위가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 바위는 속에 들어 있어서 겉으 로 보기에는 다른점이 없 다.

 바위에 떨어진 씨 공공연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배격하는 경멸자들이 여기에 언급되고 있지 않은 사 실을 우리가 알 때 이 경고의 말씀은 우리에게 더욱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비유는 가르침을 받는 자들에게만 관련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중 대부분이 망한다면 구원 의 설교를 공공연히 거절하는 세상에 속 한 다른 자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씨를 뿌리는 것은 사람이 말씀을 듣는 것을 의미. 길가는 처 음부터 깊이 받아들 이지 않고, 씨를 표면에 놔두지만 돌밭은 처음은 밭아들인다.

종교를 왜 필요하게 생각하는가 종교는 인생을 행복하게 하고 인생을 풍부하 게 하려고 종교를 가지는데 행복은 고사하고 네 목숨까지 내놓으라고 하면 믿겠는 가 궁극적인 목적이 나를 위한 것일진대 나에게 손실과 손해가 있을 때 이런 것들 도 궁극적인 자기 유익을 얻게 된 다면 희생을 하고 손해도 봐가면서 더 큰 유익을 얻기 위하여 감수하겠지만 나 자신을 내놓으 라, 네 목숨을 내놓으라 할 때는 넘어 지고 배반하는 것이다.

길가나 돌밭이 표면상으론 다르지만 사실상 뿌리가 깊이 뻗어 들어가지 못하는 점에서는 동 일함.

말씀의 씨가 속에 뿌리가 뻗어 나갈 수 없는 마음 자리가 있다. 처음에는 외부 로 싹이 나 서 가자 소망이 있는 것 같이 보이나 뿌리가 뻗지 못하여 환난이 올 때 넘어진다. 뿌리가 없는 것이 가장 특성적인것. 뿌리가 있어야 햇빛에서 장성하고 열매를 맺을텐데 뿌리가 없어서 큰 손실이 그를 휩쓸 때 포기하는 것이다.

넘어진다, 배반한다.-교회를 떠난다거나 출석을 안한다거나 기독교를 포기하 는 것만을 의 미하지 않는다.

돌밭은 외부 사람은 물론 어떤 경우는 자기 자신도 모를 수가 있다. 왜냐하면 넘어지기 전 까지는 그가 넘어질 사람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전체 전부를 드려야지 부분을 드려가지고는 않된다. 신6:4, 마22:자기를 부인 하고 제 십자가 를 지고 좇을 것이니라.

돌밭은 참된 자와 서로 다를 것이 없다. 기쁨으로 말씀을 받되,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생명의 도리로다. 종교적 요구에 만족할 수 있는 태도로 말씀을 받아들였 다.

 가시떨기에 뿌리운 씨 (마13:1-23) 주님은 말씀을 듣는자들 가운데서 세번째 부류로서 말씀이 싹이 돋아 올라와서 자랄 때에 그것이 잘자라 결실을 못하게 가시떨기가 그 기운을 막았다고 하신다.

가시떨기는 영적 생활을 침식시키는 큰 세력인데 그것이 무엇이냐하면 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 에 대한 욕심과, 또 이 세상의 행복을 추구하는 쾌락이라는게 있어서 결실치 못하게 한다는 것 이다.1) 이생의 염려라는 것은 별다른 특수한 사람들이 가진 염려라든지 혹은 어떤 죄 악적인 염려 라는 것이 아니고 세상사람들이 아무라도 가질 수 있고 모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질 수 있 는 염려--어떻게하면 살까 사는 문제에 대한 염려이다.

사는 문제에 염려안할정도로 생활이 안정되면 어떻게 사람답게 살까 출세하고 살 까 하는 마 음의 요구로 나쁜 의미가 아님.

2) 재물의 욕심--독특한 죄악이 아니고 세상사람들이 다 추구하고 나가는 것.

미묘한 관계가 있다. 저축이라는 것. 재물에 대한 표준 성경이 안 세워진 것 아니 다. 자기가 표 준을 세워. 얼마까지는 적당하고 그이상을 보고 나가면 욕심이다. 돈 의 액수가 문제가 아니다.

마음 자리가 문제이다. 재리의 욕심이 큰 문제는 말씀의 씨에게 자기가 주어야 할 중요한 것들 을 못 주고 있는 것.

3) 쾌락--행복추구도-다 변호될만하고. 이 세상 사람들은 부적당하다고 말하 는 것이 없 다. 미국의 독립선언서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는 모든 사람이 가진 기본적인 권리다. 이런 것을 바라는 것은 사람의 기본권리다. 이런 것들이 왜나쁘 냐 문제는 그것이 무엇이라도 선 덕이라도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어 가는 일을 저해하고 그것을 질식케해서 맘 기울임과 에너 지와 정성을 그 선덕이라는 것 그유 가치하다는 것 때문에 자기맘에 도사리고 앉아서 흡수해 버리면 하나님의 말씀에 기울여야 할 자기의 정성이나 자기의 노력에는 시간이 없고 여유가 없 게 되는 것이 다. 돈을 많이 벌었던지 적게 벌었던지 그것이 최종의 문제가 아니라 이생의 염 려, 행복추구에 주의를 기울이다가 하나님의 말씀에 기울이지 못해서 열매를 못 맺는 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열매를 맺는 것으로만 이세상에서 중시되는 것이라는 것 을 볼 수 있 다. 하나님의 나라가 인간들의 생활양식, 생활양태 그속에서 나타나는 까닭에 독특하게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띠고 발휘되지 않으면, 이 세상 사람이 가 지고 있는 생활양태와 구별됨이 없으 면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한다. 씨 를 품은 사람은 많아도 열매맺는 사람은 적다. 마 음만 가지고 있어선 하나님 나라 가 형성되지 못한다. 하나님 나라는 그 백성들의 그러한 생활 로 표현이 되서 사회 를 형성해 나가는데 의미를 가진다.

열매 안 맺어도 하나님 나라라고 집어 넣고 적당하게 내맘대로 교인생활 잘했으 니까 그 사 람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못하는 것이다. 그걸 보여준다. 종교적인 색 채가 강렬하고 기독교적 인 색채가 강렬해도 마음과 생활과 사회생활을 통해서 하나 님 나라의 열매를 맺고 하나님 나라 를 증거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못 한다.

하나님 나라를 강렬하게 나타낼 수 있는 말씀의 사역이라는 것은, 즉 하나님 말 씀에 정당한 장성과 그로 말미암은 결실이라는 것은 무엇을 요구하느냐하면 그 사 람이 전생활과 생명을 오 직 거기다가 기울이고 사는 것이다. 이세상에도 마음을 주 고 하나님의 말씀에도 마음을 주고 그 렇게 해서는 열매를 못 맺는다. 아무 열매 맺 어도 되는 것 아니다. 사5:들포도. 세상 것은 조 금만 저도 잘자라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전정열을 기울이지 않으면 자랄 수 없고 열매 맺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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