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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의 증표-세례의 시행 (롬 0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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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난주에 교회가 교회인 표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뭐냐면 하나님의 복음이 선포되어져야 한다고 했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어떤 교회에 참석했는데 그 교회에서 복음이 선포되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는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복음은 두 가지 방식으로 선포되어 집니다. 하나는 말로써 선포되어질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 우리가 이야기했던 그 복음의 내용이 말로 선포되어진 복음입니다. 그런데 동일한 복음을 이제 눈에 보이게 선포할 방식이 있습니다. 그것을 성례 “거룩한 예식”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성례도 교회가 교회의 표인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난주에 말씀드렸던 복음의 선포와 떨어지지 아니하는 것이니 복음의 선포를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재현해 보이는 것이 성례이기 때문입니다. 성례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가 오늘 우리가 행하려고 하는 세례와 또 하나는 세례후에 행하는 성찬입니다. 그 중에 오늘 우리는 세례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세례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왜 우리는 세례를 받는 것인가 예수님 믿는 사람들은 뭐하러 세례를 받는가 오늘의 본문에 보면, 세례에서 어떠한 것들이 바깥으로 나타내지는 것인가 하는 것들이 설명되어져 있습니다. 세례라고 하는 것은 본문이 말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일들 그것이 크게는 두 가지인데 그와같은 일들이 우리 가운데서 발생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람들 입니다. 하는 것을 바깥으로 나타내 보이는 표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공적으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표와 인호다 그런 말을 씁니다. 인호라고 하는 것은 도장을 찍는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이런 일이 일어 났습니다 라고 하는 것을 도장 찍는것입니다. 어떻게 표를 하고 무엇을 도장찍는 것인가 두 가지 입니다. 그 중에 한 가지는 무엇이냐면 오늘 본문3절에 보면, 무릇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무엇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줄 알지 못하느뇨 그럽니까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줄 알지 못하느뇨. 세례에서는 무엇이 바깥으로 나타내 보여지는가 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아니, 내가 여기 살아 있는데 왜 나 보고 죽었다고 하는 것인가” 만일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그 삶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닐 것이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아닐 것이고, 하나님과 관련이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것이 무슨 말인가 예수와 함께 죽었다니 이것을 6절에서 우리한테 잘 말해줍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합니다. 여기서 이상한 소리가 하나가 나타납니다. 어, 십자가에서는 2000년전에 예수님만 못박힌 줄 알았는데, 그 십자가에서 또한 우리도 못 박혔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어떤 사람이요 옛 사람. 옛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부패한 인간성 전체를 포함하는 인간성을 말합니다. 우리 전체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모두 포함해서 하나님과 관련 없었던 나의 존재 전체, 그것이 예수님과 함께 죽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례는 그것을 이야기합니다. 이제는 예수님 안에서 나는 죽었다는 것을 표현해 내는 겁니다. 나의 옛 사람 지금까지 나를 주관해 왔고 내 생활을 영위해 왔던 것이 이제는 죽었습니다. 죽었으니까 이 사람은 더 이상 옛 사람에 따라서 생호라해서는 안되지요. 이 삶이 죽었다고 했으니까 이것은 원리적인 이야기입니다. 원리적으로 세례때 이러한 일이 일어납니다. 죽은 사람이예요. 죽은 사람은 좀 더 심각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4절에서는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으므로 그와 함께 어떻게 되었나니 하면 장사되었나니” 여러분들 이제 큰일났습니다. 장사지낸 사람들입니다. 장례식 다 치룬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 원리에 합당하게 살아가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경 본문은 분명히 우리가 장례식을 다 치뤘다고 했는데 에수님께서 무덤속에 묻히셨을때 우리도 같이 묻혔다는 말이죠.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까 우리 옛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죽은거란 말이죠. 그래서 장사지낸바 되었다는 말이죠. 자 ! 그런 사람이 이제 자기가 살아가지고서 막 움직이겠어요. 그것이 안돤다는 말이죠. 자기 옛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살아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원리적으로 우리 가운데서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에 주의하십시요. 현실적으로는 어떻게 되어져야 하면 날마다 날마다 그 옛 사람을 죽여가야 합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서 무슨 일을 하다가 남들이 나에게 조금만 이상한 소리를해요. 그러면 그것이 화나고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죠. 그러면 그것은 벌써 뭘 의미해줘요. 옛 사람이 죽지 않았으니까 끓어오르죠 죽었어봐요 끓어오르겠어요 시체를 여러분이 꼬집어보세요. 반응합니까 안한단 말이예요. 왜 죽었으니까. 예수믿는 사람은 그런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 그것은 선한 일을 행한 것이든지 악한 일을 행한 것이든지 우리 존재 전체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때 우리도 같이 죽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세례는 그것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죽으신 것처럼 나도 또한 거기서 같이 죽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어을 이야기해 주는가 하면, 이제까지 나의 삶 전체를 규정짓는 한 가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나의 존재 전체를 통해서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반해하는 입장에서 살아왔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을 우리가 성경에서는 죄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 죄에 대해서 내가 죽었다고 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나는 이제 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죽었으니까 더 이상 죄가 우리를 주관할 수 있겠습니까 죄가 우리를 사로잡고서 너 이렇게 하라고 할 수 있겠어요 죄에 대해서는 우리는 죽은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세례에 가장 기본적인 원인은 바로 이겁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은겁니다. 우리가 물론 세례를 주죠. 왜 이렇게 세례를 줍니까 물론 우리의 모든 죄를 씻었다고 하는 것을 밖으로 나타내보여주는 상징입니다. 그래서 세례때에 되어지는 일을 크게 이야기한다면 내가 예수와 합하여져서 나도 죽었습니다. 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동시에 그 말은 곧 나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이제 씻어졌다는 것을 뜻하는 겁니다. 나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씻어주셨다.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본문 가운데서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8절에 보십시요.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산 줄을 믿노니”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와 죽은 사람은 그 다음에 어떻게 되냐면,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납니다. 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연합한 그 주님께서 우리가 지난 주일날 주님께 감사예배 드린대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살나나셨으면 우리도 또한 살아나는 것입니다. 아 ! 내가 그것을 믿습니다. 나중에 에수님이 다시 올때 우리가 다시 부활할 줄을 내가 믿습니다. 그정도 우리는 이야기할 수 있죠.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안믿으면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 이상으로 이야기합니다. 5절을 한 번 보십시요.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즉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같이 죽었으면”하는 이야기죠. 그래서 어떻게 되냐면 “또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고 합니다. 이렇게 된 사람은 어떻게 된 사람인가 4절의 뒷부분을 보면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가운데서 행하게 하려하심이나라” 살리심과 같이 우리가 지금 여기서 새 생명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세례의 두번째 의미입니다. 세례의 첫 번째 의미는 죽는거라 했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나는 죽은 사람입니다. 죽은 사람은 이제 죽은 사람으로서 그냥 있느냐 아닙니다. 다시 살아납니다. 예수께서 사신 것처럼 우리도 살아납니다. 나중에만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도 살아난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제 새로운 생명으로 사는 사람이 되어야 되죠.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습니다. 하는 것을 온 교회 앞에서 인치는 예식이 세례식인 것입니다. 나에게 이미 이러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습니다. 그러면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서 예수께서 사는 것입니다. 바을이 갈라디아서 2:20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내가 사는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 가운데 있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활하실 때 공부하시는 것, 열심히 선한일 이루는 것, 교회에 열심히 일하는 것, 그모두가 그리스도의 살아계시는 힘으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그 부활한 생명이 우리 가운데 있어서 우리가 그 부활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것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이러한 생명가운데 살아간다고 하는 것을 나타내보여줄 수 있는 귀한 이야기는 주님이 내안에서 사시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 놓고서 열심히 귀한 일을 이뤄놓았습니다. 주님의 교회를 잘 세워 나갔습니다. 그래놓고서는 아 ! 이것 내가 행한 것이다. 내가 참 잘했다고 자기 머리를 쓰다듬을까요 아니지요. 왜 누가행한 것이라고요 그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행한 것이라고 본문은 말합니다. 그래서 내가 정말 세례의 의미에 충실한 삶을 사는가, 아닌가는 여기서 판가름 나는것입니다.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이제 이러한 삶,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아났다고 하는 삶이 내 삶 가운데서 잘 드러난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내가 나에게 맡겨진 일을 여심히 했다. 내가 학교 선생님으로서 열심히 살았다. 내가 참 잘했다. 내가 잘한 것입니까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하셨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죠. 혹시 내가 못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못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죠. 내가 옛 사람이 아직 죽지 않아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 아닙니다. 그래서 이제 원리적으로는 내 옛 사람이 완전히 죽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생명이 살아난 그것이 우리 가운데서 정말 약동하게 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어야 합니다. 특히 바라기는 우리가 이런 세례의 의미에 충실한 성도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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