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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상적 교회의 모습 (엡 04: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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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7개월 동안에 교회가 무엇인지를 성경을 통해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것을 일단락져야 될 때가 왔다고 생각해서 우리가 지난번에 이야기했던 것을 전체적으로 정리를 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여태까지 이야기한 것들을 우리가 생각해보면 그것은 계시 가운데서 교회가 무엇이라고 말해주는지 그 이상을 제시해 줍니다. 교횐는 이러이러한 것들이다. 우리가 그렇게 되어야 된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들이 우리한테 어떻게 여겨지기가 쉬우냐하면 어 ! 그것은 꿈 속에 있는 이야기인데요. 이렇게 이야기 되기가 쉽습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우리가 인간의 삶의 여러가지들이 다 그렇듯이 이상과 현실 사이에 늘 문제가 있기 마련인데 교회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해 주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질서를 우리에게 제시해 주실 때 이상으로써만 우리한테 제시해 줍니다.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계속 듣다 보면 사람들의 마음속에 ‘아 ! 그러한 것들을 우리 한테 하나의 이상으로 제시해 주는 것이지 이 세상에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 교회라고 하는 것이 유토피아가 됩니다. 유토피아-이 세상에 장소가 없는 것. 그러나 성경 가운데서 우리에게 제시해 줄 수 있는 것은 그렇게 사람들로 하여금 백일몽을 꾸는 꿈속에 있는 환상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비록 우리 현실과는 다르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마땅히 그것을 우리 가운데서 구현해 내야만 하는 현실입니다. 이것이 어려운 작업이긴 하죠. 도무지 이럴 수 없는 것 같은 것을 우리한테 제시해 놓으면서 그것을 이루라고 하다니 그래서 전반적으로 정리를 하면서 그러면 가장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은 어떠한 모습이여야 하는가 오늘 바울은 이 본문을 통해서 어떻게 제시해 주고 있냐면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은 항상 성숙해 가는 교회의 모습이다. 항상 자라나는 교회라고 이야기해 주고 있죠. 교회는 언제든지 그게 성숙헤지지 않으면 그것은 교회가 제대로 된 이상성을 상실해 버립니다. 그렇게 해 보았던 교회들이 옛날에 있었습니다. 교회가 어느 정도 진전을 해 나가다가 야 ! 이제 교회가 영광스런 교회가 되어야 되겠다고 했더니 그 교회는 자칫 잘못 부패와 어려움 가운데 빠져들어가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이 역사 가운데 있는 교회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영광의 교회라고, 완성되어진 교회라고 우리는 다 이루었다고 하는 그 순간에 그것은 곤두박질 치고 맙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언제나 우리 자신들을 계속해서 성숙해 가는 교회이다. 언제 까지냐면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 나라를 극치에 이르게 하기 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숙해 가는 교회들은 어떠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을까
오늘의 본문 가운데서 한 서너가지의 특징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번째로 13절이 우리한테 이야기해 주는 것이 있는데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을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것은 마치 그림을 그려주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키가 어느 정도 되신 것인데 그곳까지 우리가 자라나야 된다는 그림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키가 얼마나 되는 지도 모르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일종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의 그 온전하심 처럼 여기서 우리라고 하는 것은 우리 각자를 이야기하는 것 보다 일반적으로는 우리가 다 하나가 되어 한 사람을 이루어서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 교회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그 한 사람 이야기는 한 사람, 한 사람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가 다 합해서 이루는 그 한 사람, 교회를 지칭할 때 그 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그 한 사람, 이 한 사람은 교회입니다. 그것도 호산 교회만이 아니고 온 세상에 늘려 있는 참된 교회, 찬 예수 그리스도의 신자들을 다 합쳐놓은 그 교회, 그 교회가 한 사람을 이루어져 된다는 이야기죠. 그래서 그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충만하신 것 만큼 가야된다는 말이예요. 그런데 그런 사란들은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
첫번째 특징이 이 13절에 나타나는데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서 자라나는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 하는 거죠. 각자가 예수를 믿는데 다 다르게 믿는다. 그러면 그것은 성숙해 가는 교회가 아닙니다. 성숙하는 교회는, 이 세상에 완전히 성숙한 교회는 없으니까, 성숙해 가는 교회는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로 성장하는 교회는 교회성장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개념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여기서 찾아야 됩니다. 이제 4가지 특징을 이야기하면 그게 바로 교회의 성장입니다. 어떻게 됩니까 우리의 믿는 것과 아는 일이 다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이 사람은 이렇게 믿고 저 사람은 저렇게 믿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는 것이 이 사람은 이렇게 알고 저 사람은 저렇게 알고 하면 참 혼란을 일으키게 되어지고 교회라고 하는 특성을 찾을 길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것과 이는 일에 있어서, 뭘 아냐면 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떻게 아는가. 여기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이라고 했는데 왜 그것이 특별하게 나타났느냐 하면 기독교가 다른 모든 것과 뭐냐면 이 땅에 예수라고 하는 인물로 온 그분을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는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거든요. 그러니까 그것에 있어서 우리가 하나인가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시금석이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성숙해 있는가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각들을 다 모아보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점 점 점 많이 알아가고 있는가, 그런데 알아가고 있는 것이 서로 같은가, 아니면 서로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이죠. 만일 그렇게 되어 진다면 그것은 성숙하는 교회가 아니고 성장하는 교회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믿고 있는 이 하나님이 같은 하나님이여야 하고 그것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같은 생각으로 굳어져 가야 된다는 말이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한테 무슨 기준이 있어야 어느 것이 진짜인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기준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한테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의 성경 가운데서 우리한테 제시해 주신 그 기준, 그것에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고 그러한 아는 지식이 함께 모이고 그러한 하나님을 같이 믿어나갈 때 그 때야 우리가 성숙하는 교회의 모습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레서 우리는 부지런히 이 교회와 관련하여서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가 무슨 일이지를 알아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로 모아주시는 중요한 이유중의 하나입니다. 그게 다는 아니지만 굉장히 중요한 이유중에 하나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의 많은 시간을 쏟아 놓아야 합니다. 왜 그것이 교회가 성숙하는 요건인 까닭에 그것이 이 땅위에서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인 까닭에 우리가 많은 시간을 쏟아 부어가지고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 그래서 우리늬 신앙이 하나가 되는 일에 힘을 써나가야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월이 지나다 보면 우리의 신앙의 패턴들이 서로 다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다양성은 있을 수는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이런 면에 강하고, 어떤 사람은 감정적인 면에, 행동하는 면에 강하고, 뭐 그런게 다양성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다고 할지라도, 그 다양성에 불구하고 믿는 것과 아는 일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안흐명 그기에 커다란 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 성숙하는 교회는 그 일에 있어서 하나인 교회입니다.
두번째, 성숙하는 교회는 어떻습니까 이렇게 하나가 되어져서 하나님으 ㄹ바로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면 그 특징이 나타났는데 14절에서 이야기 합니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고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니라” 성숙한 교회는 어떤 교회냐 하면 사람들이 내는 사상, 궤술, 소위 시대의 풍조, 시대의 정신에 따라서 이리왔다 저리왔다 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요지부동하고 굳건하게 서 있는 교회 입니다. 그러면서 황소걸음처럼 느릴지라도 하나님께서 제시해 주신 목표를 향해서 한 걸음 한 걸음씩 나가는게 성숙하는 교회, 성장하는 교회입니다. 그렇지 아니하고 이런 문제 저런 문제로 요동하게 되면 성숙할 수가 없는 거지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렇게 요동하지 않을 수 없는가 어린 아이가 안 되면 된다고 합니다. 어린아이의 특징은 뭔가 하면 이 분이 이런 말 하면 이게 옳은가 보다 저 분이 저 이야기 하면 저게옳은가 보다 한다는 거지요. 그러나 아까 첫 번째 이야기했던 하나님을 믿는 것과 아는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일이 하나가 되어져서 아 ! 무엇을 판별할 수 있으면 이 세상에 이런 사상이 몰려올 때 아 ! 그것도 그럴 수 있겠다. 그렇게 넘어가지 않는단 말이예요. 그래서 이런 면에 있어서는 예수 믿는 사람이 아주 철저한 면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있어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아주 부드러운 사람이여야 하죠. 모든 사람을 받아 들여야 되죠. 그러나 하난미과 관련된 어떤 일에 있어서는 그렇게 부드러운 것이 다는 아닙니다. 그게 아주 이상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중에서 그런 사람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하ㅏ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들만 모독하는 소리를 하니까 아니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을 이렇게 모도하는 것일까 그래서 분을 냈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누구냐 하면 다윗이라는 한 소년 이었습니다. 골리앗이라는 크다란 장군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독합니다. 그들의 신을 모독합니다.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말이죠. 다윗이라고 하는 사람이 마음이 부드러운 사람인데 그 말을 듣고서 견딜 수가 없단 말이예요. 어떻게 이스라엘을 모독하는 것은 되겠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데 이 사람들을 모독할 것인가. 그래서 그 면에 있어서는 견딜 수가 없어서 나가서 싸우는 모습을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런 면에 있어서는 아주 철저한 면이 있어야 됩니다. 다른 사람이 이 무슨 이야기를 할때 우리는 뭐 그 이야기를 너무 반감을 가지고 이야기 한다든가, 뭐그러지 않죠. 그러나 하나님과 관련된 이야기, 지금 이 이야기와 관련된 이야기, 이 세상의 삶들을 요동시키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철저한 면이 그 사람에게는 표현다는 뜻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내 마음속에는 아주 철저한게 있어야 된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한국 사회속에서도 어떠한 이야기들이 범람을 했었냐면 아 ! 예수님이라고 하는 분이 동양 삶인데 특별히 동양적인 냄새가 많이 나는게 뭐냐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기를 아 ! 예수님이 저 석가모니가 있는 인도에 가서 배우셨다는 이야기죠.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12살 이야기가 나오고 그 다음에는 예수님이 성장한 다으의 이야기가 나오지 그 사이의 이야기는 없잖아요. 그 사람들이 하는 예기가 예수님이 그 기간 동안에 인도에 가서 불교 사상을 배워가지고 그것을 만드셨다는 이야기가 한국 사회에 많이 많이 퍼졌어요. 책도 번역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것에 대해서 아 ! 그것도 그럴듯해 이렇게 생각해 나가면 교인들에게 줏대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는 사람들한테 부드럽게 대해줘야 하지만 아주 중요한 사상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떻게 믿는가 하는 면에 대해서는 한치의 양보도 없이 아주 철두철미하게 나가야 합니다. 그런것 둥에서 아주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는데, 이 계시를 어떻게 믿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요즈음에 유행하는 설은 말씀을 그렇게 철두철미하게 믿지 말고 그냥 우리를 위해서 좋은 이야기로 믿으면 좋지 않겠는가. 이게 뭐 나쁜 책은 아니니까 교회안에서 그렇게 가르치면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교회에서 그런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우하다가는 결국에는 교회안에서 계시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는 침묵을 지키고 맙니다. 결국에는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그 면에 있어서 철두철미하게 따라서 우리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을 철두철미하게 말씀에 근거 시켜야만 한다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언제 사람들이 만들어 낸 이런 풍조 처럼 풍조에 밀려 요동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예요. 그게 아주 어려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에 아주 철두철미하게 근거한다고 하는 것이 쉬운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경을 좀 많이 써야 되고 말씀이 우리한테 어떻게 베시해 주는가. 그러니까 가끔가다가는 이렇습니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교회라고 하는게 신앙이라고 하는게 내게 있어서는 이런저런 문제를 좀 해결해 주는 것이면 좋겠다는 말잉예요. 그러면 사람들은 그런 방식에 따라서 그런 식으로 제시되어 지는 곳에 많이 몰려가기가 쉽습니다. 60년대, 70년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 마음을 쏟았던 하나의 시조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소위 풍요의 신학이라는 말입니다. 예수 믿으면 뭐든지 잘 된다는 것입니다. 잘 된다는 기준이 뭐냐면 이 세속적인 관점에서 하는 이야기 입니다. 돈도 많이 벌리고, 병도 다 낫고, 예수 믿으면 뭐든지 잘된다는 말이예요. 그 면이 일면에서는 진리가 있죠. 예수 믿으면 안 되는 일이 없죠. 왜냐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니까 그러나 그 면만 강조하다보니까 사람들이 뭘 잊어버리냐면 예수 믿는길은 십자가를 뒤쫒아 간다는 하고 길, 십자가를 따라가는 따라가는 길이라고 합니다. 고난을 향해서 나간다고 하는 것을 자꾸만 쉽게 잊어버리게 되어집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이야기를 자꾸 듣다 보면 우리 심성에 잘 닿는 것은 어떤 것이냐 하면 다 예수 믿고 복 받는다는 곳으로 나가기가 쉽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앙이라고 하는 것도 교회라고 하는 것도 그런 식으로 바꾸어 버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우리대로 버려두면 성경이라고 하는 철저한 글자를 뇌두지 아니하고 우리를 우리 마음대로 그냥 내버려두면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게 해두면 우린 결국 어떻게 되어지냐면 그런 것을 기독교회라고 만드어 나가기 쉽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주변에 그러한 현상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철두철미하게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가. 우리의 신앙은 비록 그게 내 구미에 안 맞아도 말씀이 말하는대로 우리가 지키고 나가야 합니다. 이게 되어야지 그렇지 않고 사람의구미에 맞추다가는 우리 자체가 얼마나 변하기가 쉬운 사람들입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내가 구미에 맞춰나가다가는 망하고 맙니다. 우리의 구미에 맞추면 안됩니다. 오직 말씀이 우리에게 제시해 주시는 그 굳건한 터위에 나가야지만, 말씀이 믿으라고 하는 것만 믿고 믿지 말라고 하는 것은 안믿고, 그 근거에 따라 나가야 우리가 굳건하게 흔들림이 없이 나갈 수 있는 그것이 선숙하는 교회이고 성장하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분명히 쌓아야지만 내가 안 흔들릴 수 있습니다.그것을 위해서 굳건하게 노력해야 합니다.
세번째는, 뭐라고 합니까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 까지 자라가라고 이야기 합니다.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규정해 주신 의미에서 참된 것을 행해 나가는 거예요. 교회가 하는 일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일을 행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부지런히 찾아나가야 합니다. 아까 두개까지는 우리 스스로와 관련된 어떤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인가 였는데 세번째부터는 우리가 바깥으로 도출해 나가는 참된 것을 행해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좋은 일이든 해 나가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때 그 동기가 사랑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해 주느냐 하면 참된 것을 하긴 하는데 사랑이라는 동기에서 하지 않는 일이 이 세상에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교회라고 하는게 이러이러한 곳이다. 교회는 참된 일을 하는 곳이다. 그러니까 우리한다 그러면서 해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사실상 하나님이 보실 때는 받음직한 것이 못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는 참된 일을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일을 해 나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모든 회원들이 신경을 써서 찾아내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참된 일이 무엇일것인가 내가 추구해 나가야 할 참된일이 무엇인가 교회 전체로써 해 나가야 할 참된 일이 무엇일것인가 참된 일을 찾아서 해 나가야 되는데 그게 선교일 수도 있고 구제일 수도 있고 전도일 수도 있고 이런 것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것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하는 동기가 사랑이라는 동기가 있어야 합니다. 아 ! 이것은 교회가 하는 일이기 때문에 마땅히 해야한다. 그것 뿐만 아니라 사랑이라는 동기, 그러니까 이게 어떤 것이어야 하면 기계적으로 해야 되니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이게 넘쳐나서 되어지는 일이 교회의 일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게 성숙하는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개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땅위에 살아간다. 교회의 일원으로 살아간다고 했을 때에 하나님의 사랑이 내 속에 느껴져서 그 사랑이 끓어 올라서 내가 착한 일을 하고 선한 일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그 일들을 향해서 나가는 겁니다. 그것이 끓어 오르게끔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럴려면 어떻게 되느냐. 예수님의 사랑을 자꾸 생각해 보십시요. 하나님의 사랑을 자꾸 생각해 보십시요. 하루에 한 번이라도 하도 안하니까 하루에 한번만이라도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그냥 내 현실을 놓고 보면 별로 사랑하는 것 같지 않거든요. 그러나 말씀을 통해서 내가 어떤 존재인데 하나님이 나를 어떤 존재로 만들어 주시고 어떻게 하게 하셨는지를 하루에 한 번이라도 성경을 보셔야 되겠죠. 기도를 하셔야 하겠죠.하루에 한 번이라도 이렇게 해 나가면 아 ! 하나님의 사랑이 내 속에 느껴진단 말이예요.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뭔가를 해야 할 일을 향해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혼자 해 나갈려면 아주 힘들지 않습니까
그래서 네번째 성숙하는 교회의 특징이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16절에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서로 연결이 되어져서)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며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각 지체가 서로 도와주는 거예요. 교회 안에서는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강한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또 나는 매일 남의 도움만을 받아야 할 만큼 연약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다 도움을 주고 받아야 되는 존재들입니다. 나는 강하기 때문에 주기만 해야 된다. 나는 받을 필요는 하나도 없다. 그런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나는 너무 연약해서 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 것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도움을 주고 받게끔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혼자 서 있지 않습니다. 교회는 교인들로 이루어지게끔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의도하신 것입니다. 서로 도와 주게끔 하기 위해서 이게 왜 이르냐 하면 사람의 연약성을 잘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훌륭한 제도를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제가 늘 강조하지만 우리는 혼자 세워 놓으면요 우리는 신앙생활 잘 안해나갑니다. 그것을 잘 아시니까 서로가 연결이 되어져서 이 일을 하게끔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신경을 써야 합니다. 이 현대 사회의 특징이 뭐냐하면 다 개인화 하는 것입니다. 전부다 아파트에 들어가 있어요. 옆집 사람과 인사도 안하고 대게 그렇게 살아가기 쉽잖아요. 그렇게 되어 나가는 사회 가운데서 그것을 고슬러 나가게끔 하나님께서 이런 사회를 만들어 줬단 말이죠. 그러면 늘 강조한 것이지만 우리의 마음은 자꾸 열어야 합니다. 누가 와서 내 마음을 열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으면 안됩니다. 그게 이상한 일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셨거든요.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우리의 마음을 자주 안 여는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어떤 의미에서는 심각하게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 대해서 내 마음을 안 열었기 때문입니다. 가만 따지고 들어가서 생각해보면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내 마음을 다 열었으면은요 나와 같이 나를 사랑하는 것 만큼 그를 사랑하시는 내 이웃의 형제한테 내 마음을 못 열 이유가 없단 말이예요.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그것을 하기 어려워 한단 말이예요. 그래서 우리는 늘 기다리고만 있습니다. 기다리지 마시고 내가 먼저 가서 서로 도움을 주고 받아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만든 노력을 다 해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성숙하는 교회입니다. 그렇게 함을 통하여서 우리가 이 몸을 스스로 세운다고 했습니다. 이 몸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합니다.
자, 오늘 우리가 네가지 특징을 이야기했습니다.
첫번째 그리스도를 아는 일과 믿는 일이 하나가 되는게 성숙하는 교회입니다.
두번째는 그래서 요동이 없는 것이다. 아주 면밀한 일에 있어서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목표를 향해서 굳건히 전진해 나가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한일, 착한일, 옳은일을 해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사랑의 동기가 되어서 해 나가는 것이다.
네번째는 우리모두가 서로 도움을 주고 연락하고 하나가 되어지는 그 과정을 통해서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어떤 교회의 이상적인 모습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도 야 ! 그것은 우리의 현실하고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랬을 때 우리가 성경을 그르칠 수는 없잖아요. 우리 현실에 맞게 그것은 너무 이상적인 이야기니 그런 이야기하고 말고... 어떤데서 그런 일이 발생되는가 하면 회사를 직접 운영해 나가는 분들이 경영학 하는 선생님들의 강의를 들어면 “글쎄 뭐 그럴듯 하긴 하지만 비현실적이거든요. 현실을 잘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런단 말이예요. 그와 똑 같은 이야기가 이런데서 발생할 수 있어요. 목사님들은 글쎄 성경에 그런 원리가 있으면 그게 교회에 어떻게 될까요. 그렇게 느끼는게 똑 같은 것이 우리 성도들은 그렇게 느낄 수 있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글쎄 그것이 우리 현실속에 될까요. 그 현실에 안되는 것을 되게끔 만들어 가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를 고쳐야지 하나님이 고쳐지기를 바라면 그것은 하나님을 이상한 분으로 만드는 거예요. 하나님 ! 나는 하나님이 이러이러한 존재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자기 형상대로 하나님을 만드는거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합니다. 하나미을 떠난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사람들이 제대로 기능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추구해 나가는 이 목표는 어떤 의미에서 제가 이 설교를 하면서 어떻게 생각했느냐면 자 ! 교회가 어떤 모습을 지녀야 할 것인가 아주 쉬운 방식으로 저는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교인 이었을때 내가 속하고 싶은 교회, 그런 교회의모습을 만들면 되리라고 생각해요. 성경의 원칙에 근거해서 내가 교인이었을 때 내가 속하고 싶은 교회, 그래서 주변에 있는 교회들의 모습을 제가 대학교때 부터 쭉 살펴봅니다. 야 ! 어떤 교회가 정말 그런 교회일 것인가 제대로 된 교회의 모습들을 찾아다녀보고 그런 교회의 모습들을 제시해보곤 합니다. 그런데 이게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시기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교회를 형성해서 제시하는가, 아니면 여러분이 그렇게 철저하게 하지 않으면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나오는 사람들이 자칫 잘못하면 그냥 보통, 어떤 의미에서는 조금 왜곡되어진 교회의 모습속에 만족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경을 많이 써가지고서 우리의 부담을 좀 안으면서 주님이 제시하는 그 이상적인 교회를 우리 가운데서 이루어 놓기 위해서는 이것은 이상으로써만 남아서는 안됩니다. 이상으로써만 남을 것 같으면 지난 7개월 동안 우리가 뭐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고 우리 가운데서 이것이 살아 움직이는 교회의 모습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의존해서 이 일을 다 이루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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