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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혜 (고전 03: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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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에 최권능 목사님은 밤낮으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고 다녔다. ‘예수천당 불신지옥’ 이것만큼 기독교 복음의 핵심을 명쾌하게 집약한 단어는` 없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 진리의 핵심을 대표하고 있는 것이지 전부를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복음의 내용을 확인하고 그래서 천국에 갈 것을 확신한 다음부터는 그 배짱 속에서 다함없는 휴가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하신 자녀들에게 거룩히 살 것을 요구하고 있고 하나님이 요구하는 삶을 살 것을 바라고 계신다. 우리는 지금까지 배운 과정들을 통해 우리가 정리하지 못한 세상의 원리들과 방향과 유혹들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집요하도록 추적하시고, 환난과 고통을 겪게 하셔서라도 그것을 잘라내려고 하시는가 하는 사건들을 살펴 보았다.

구원이 확보된 자에게는 믿음의 성숙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구원 이후의 삶은 성숙을 위한 삶이 되어야 한다. 신앙은 언제 입학했을지라도 죽는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졸업이 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계 20:12)” 위의 말씀을 보면 지옥에 가는 자들도 거기에 등급이 있음을 알게 된다. 신자들이 받는 상급도 마찬가지로 등급이 있다. ‘죽은 자들’은 시체라는 말이 아니다. 성경에서 ‘죽은 자들과 산 자들’을 이야기할 때는 생물학적인 기준에서 이야기 하지않고 영적인 기준에서 이야기한다. 이들은 각각 불신자와 신자를 의미한다. 그래서 신자들의 죽음을 가리켜 ‘죽었다’하는 표현이 없고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이다. 언제나 신자는 ‘산 자’이다. 여기에서는 분명히 불신자와 신자들의 심판에 등급이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9-10)” 이 말씀도 천국과 지옥에 가는 사람들이 각각 등급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3장을 보면 구원을 얻었던 자의 구원이 취소되는 일은 없다고 말한다.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전 3:14-15)” 바로 이 상급에 관한 대목에서는 구원 자체가 취소되거나 반복되는 일에 관하여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구원을 얻은 자들이 하나님 앞에 상급을 받는 등급에 관하여 그의 생애를 하나님 앞에 경주할 싸움이 있는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취소되지 않는 구원이라고 해서 쉽게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불 가운데서 구원을 얻는다’에서 구원을 얻는다는 점에다 너무 마음을 놓아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신자들에게 요구하는데 있어서 두 가지 방법을 쓰신다. 권면과 채찍의 방법을 쓰시기도 하고 상급이라는 것으로 쓰신다. 신자가 그릇된 길로 걸어갈 때 하나님은 인생 채찍으로 때리사 돌이키게 하신다. 때로는 ‘이렇게 행하라 이런 상급이 있을 것이다’ 말씀하신다. 인생 채찍이나 상급은 다같이 하나님이 인간들을 사랑하시는 방법이다.

우리가 자녀를 기르면서도 공부를 시키는 문제에 있어서 공부가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를 자녀들이 모르니까 자녀들이 열심을 내도록 상급을 제시하신다. ‘몇점 받아오면, 몇등을 하면 뭘 사주겠다’는 식으로 해서 자녀의 성적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3장을 보면 하나님의 뜻이 자명해진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 3:5-9)” 고린도 교회는 分派가 문제가 되었다. 그리스도파, 게바파, 바울파, 아볼로파 등이 그것이다. 바울은 이와 같은 분파 현상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 3:9)” 우리들 각자는 하나님께서 집으로 짓고 밭으로 갈기 위하여 끊임없이 하나님의 위인으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한쪽에서는 상을 걸고 한쪽에서는 그 상을 탈취하는것이 아니라 상을 받을 수 있는 수준으로 높이기 위하여 가정교사들을, 개인교수들을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하나님은 성경 속에 그 많은 축복을 선언하고 있는것은 이렇게 하면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 상급을 받을 수 있는 수준에 오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그 많은 상을 열거하고 있고 거기에 도달케 하기 위하여 바른 길로 안가고 곁길로 갈까봐 수많은 하나님 나라의 청지기들을 나열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는 얼마나 많은 ‘숙달된 조교’들이 나열되고 있는가! 우리를 위하여 아담, 노아, 아브라함, 요셉, 모세, 엘리야, 다니엘, 세례요한, 베드로, 바울, 스데반 모두가 숙달된 조교들이다. 이렇게 저렇게 살았을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모델 케이스가 되어서 열심히 훈련해 보이고, 한 예화가 되어서 기록된 사람들이 성경으로 하나 가득하다.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다. 오고 가는 세대 가운데도 위대한 신앙인들을 통하여 우리를 목표하신 하나님의 요구의 수준으로 초대하고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우리를 곤고하게 만들고 우리를 치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상급을 걸어 놓고 우리를 권면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축복임을 알아야 한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고전 3:21-22)” 역사, 정치, 경제, 문화, 자연도 모두 우리의 것이다. 우리의 것이라는 것은 ‘소유’라는 개념에서가 아니라 그것이 모두 나를 하나님 앞에서 축복받게 하기 위한 성장을 위해서 오늘 우리 앞에 펼쳐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 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우리가 초대받은 그 축복을 아는 자들마다 그 축복된 길을 권면할 수 밖에 없다. 기초를 닦아놓고 다 되었다고 해서는 안된다. 집을 지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짓기 원하신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길로 순종하여 좇아 오라고 하신다. 상급을 걸어놓고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상급이 문제가 아니라 그 수준에 도달하는 것이 우리의 축복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시 8:1-9)” 5절 말씀을 보자.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여기서 천사라는 말은 난외주(欄外註)를 보면 이는 ‘하나님’이란 뜻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만드신 그 창조의 영광을 인간들이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그 영광의 자리에 올라오는 것을 인간이 싫어한다. 이것만큼 인간의 미련함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대목이 없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여기에 집념을 갖고, 열심을 갖고 초대하고 계신가를 잊지 말아야한다. 한손에는 채찍을 들고 한손에는 상급을 들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진정 눈물로 호소하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과 축복의 초대를 외면하는 것처럼 바보같은 일도, 비극적인 일도 없다. 그것을 순종하는 신자가 누리는 축복과 그 기적만큼 살맛이 나는 인생이 없다.

주를 위하여 실수한 경험도 없고 주를 위하여 나의 것이 베어지는 아픔의 경험도 없는 것이 안타까움이다. 이 기쁨, 이 감격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경험이 아니요 지식으로 얻을 수 있는 경험이 아니기 깨문에 기왕에 하나님을 믿고 주일마다 여기까지 와 앉아있는 사람으로서 이 맛을 모르는 것만큼 불행한 것은 없다. 예수 믿는 것은 ‘확보된 것’이 재미있는 것이 아니라 ‘하는만큼’이 재미있는 것이다. 아침에 기쁨으로 눈을 뜨고 보람으로 눈을 감는 생활이 예수믿는 삶이다. 하나님 앞에 칭찬은 그 증거가 벽에 줄줄이 있고 하나님께서 잘하고 있다는 칭찬과 위로의 말씀이 알알이 들어와 박힌 이것보다 더 신나는 인생이 없는 줄 성경이 증거하고, 상급으로 약속된 것들이 증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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